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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빛 그릇에 담긴 전통의 품격, 강진 청자 이야기

by 길가영
강진 청자_11.02.png 강진 청자 이야기


강진 청자는 고려 중기부터 조선 전기에 이르기까지 우리 도자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예술이자, 남도 음식문화의 품격을 상징하는 유산이다. 푸른빛 속에 남도의 인심과 예술정신, 그리고 식문화의 정체성이 함께 녹아 있다.


고려시대 강진은 청자의 고향이었다.『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송나라 사신 서긍은 “고려의 자기는 푸르며 맑고, 중국의 청자보다 빼어나다”라고 기록하였다. 이는 강진 청자가 이미 12세기 동아시아 무역의 중심에서 인정을 받은 사실을 보여준다. 현재까지 강진군 대구면, 칠량면 일대에는 188개 이상의 고려청자 가마터가 확인되었으며, 그 밀도와 규모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강진의 청자는 단순한 생활용품이 아니라 왕실과 귀족을 위한 예술품이었다. 특히 12세기 중엽 상감기법(象嵌技法)의 발달은 강진 청자의 절정기였다. 회색빛 태토 위에 백토나 흑토를 상감하여 연꽃·국화·학·운문 등을 새겨 넣는 기술은 정제된 미의식과 정신성을 드러냈다. 이러한 청자들은 주로 왕실 연회, 제례, 사찰의 공양용으로 사용되었으며, 고귀한 식문화의 매개가 되었다.


강진이 청자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강진만을 둘러싼 지리적 조건은 도자 생산에 최적이었다. 인근에는 고령토·규석 등 천연 원료가 풍부했고, 산에는 가마용 목재가, 해안에는 완도·해남을 잇는 바닷길 운송망이 있었다.


이는 청자 제작과 유통을 모두 가능하게 한 천혜의 환경이었다. 실제로 2007년 태안선에서 발견된 목간(木簡)에 “탐진(耽津)에서 개경으로 보내는 사기 80개”라는 문구가 확인되면서, 강진 청자가 중앙으로 직접 공납되었음을 입증하였다.


그러나 14세기 이후 왜구의 침입과 고려의 정치적 혼란으로 도요지들은 점차 쇠퇴하였다. 도공들은 전국 각지로 흩어져 분청사기와 조선백자로 그 맥을 이었다. 그럼에도 강진은 청자의 본향으로서 예술혼과 기술적 유산을 지켜왔으며, 오늘날 강진 고려청자박물관이 그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강진 청자는 단순히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오늘날 남도 음식문화의 품격을 상징하는 식기로 재해석되고 있다. 남도 한정식의 상차림에 청자 그릇이 쓰이는 것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문화적 계승이다. 조선 후기부터 강진의 유지와 사대부들은 연회와 접대 자리에서 청자 식기를 사용하여 격조를 높였고, 일제강점기에는 강진 부호들이 서울의 궁중요리사를 초빙해 청자 식기에 남도음식을 올리며 손님을 맞이했다. 이는 청자가 단순한 공예품이 아니라, 음식의 미학과 정신을 담는 그릇임을 잘 보여준다.


오늘날 강진의 음식점, 다원, 한정식집에서는 여전히 청자 그릇을 사용한다. 밥그릇과 국그릇, 찻잔, 젓갈 종지에 이르기까지 청자는 남도의 식문화를 품격 있게 완성하는 매개체로 기능한다. 특히 강진청자축제와 남도음식문화대전 등 각종 지역행사에서는 청자에 음식을 담아 전시하며, 그 미적 가치와 문화적 상징성을 함께 알리고 있다.


강진 청자는 그릇 하나에 예술과 생활, 역사와 미학이 공존하는 존재이다. 비색의 푸른빛은 남도의 하늘빛을 닮았고, 상감 문양은 강진의 들과 바다의 생명력을 상징한다. 남도의 음식이 인심과 풍요의 상징이라면, 강진 청자는 그 풍요를 가장 아름답게 담아내는 그릇이다. 청자는 강진의 땅에서 태어나, 오늘날까지 남도의 음식문화와 함께 살아 숨 쉬는 예술이다.



참고문헌

서긍, 『고려도경(高麗圖經)』, 1123년.

문화재청, 「강진 고려청자 요지 발굴조사보고서」, 2009.

강진군청, 「강진 고려청자박물관 전시해설자료」, 2020.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태안선 수중발굴조사보고서」, 2007.

조원재, 「고려청자와 강진 도요지의 역사적 가치」, 『도자문화연구』, 2018.

강진군, 「강진청자축제 30주년 기념백서」,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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