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법을 선택하는 과정은 결국 삶의 우선순위를 알아가는 과정
진단을 받고 나서 바로 직 후의 충격이 조금 가시고 시간이 많지 않다는 데서 오는 조급함이 잦아들면서 지금껏 만나본 의사들의 소견을 종합해서 이성적으로 현재 상황을 정리하려고 노력해봤다. 공통적인 소견은 엄마의 현재 상황은 수술이 불가능하고, 항암치료를 시작하는 것이 가장 적합한 치료법이라는 것이었다. 항암치료를 하게 되면 기존의 기대 여명에서 3개월 정도 연장을 기대할 수 있다고 했다.
항암제 독성에 의한 부작용이 걱정되긴 했지만, 의료진의 의견에 따라 이 방법이 최선이라는 생각으로 항암치료를 시작하기로 했다. 엄마는 아빠와 함께 KTX를 타고 아침 일찍 서울로 와서 간단하게 진료를 보고 항암치료 주사실에서 4-5 시간에 걸쳐 약을 투여받았다. 새벽부터 집을 나서느라 피곤하셨던 데다가 병원에서 거의 종일 있느라 힘드셨을 터라 엄마 아빠는 하룻밤 서울의 언니 집에서 쉬고 다음 날 대구로 내려가셨다.
항암 부작용은 개인차가 크다고 알고 있어서 엄마에게 어떤 증상이 있을지 걱정이 됐다. 언니와 나는 하루에 몇 번씩 전화를 하면서 엄마의 컨디션을 계속 체크했다. 주사를 맞은 지 하루가 지나자 여러 반응이 동시에 나타났다. 엄마가 제일 힘들어하셨던 건 메슥거림을 동반한 소화기 계통 불쾌감이고 전반적인 체력 저하로 엄마는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하기가 힘들다고 했다. 엄마는 며칠 더 증상을 두고 보자 하더니, 일주일쯤 지나 다음 치료일이 다가오자 항암을 그만하겠다 하셨다. 생각지도 못한 엄마의 갑작스러운 결정이 충격적으로 다가왔지만, 원래 아픈 곳 하나 없던 엄마에게 이 상황은 받아들이기 힘든 게 당연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이렇게 아파하고 고통받으며 환자로서만 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항암을 하지 않는다고 했을 때 우리에게 별다른 대안이 없었다는 데 있었다. 엄마 없이 언니 혼자 의사 선생님과 진료를 보고 상황을 설명드렸다. 선생님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시면서, 하지만 항암 치료를 하지 않더라도 암이 커지는 속도로 봤을 때 정상생활을 할 수 있는 기간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라서 삶의 질의 측면에서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했다. 곧 엄마는 암이 커지면서 장기를 침범하며 치료가 필요한 순간이 올 것이라 병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질 거라고 했다.
답은 없어 보이고 길을 잃은 것 같았다. 이때 우리는 조바심을 거두고 큰 그림을 봐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료진의 의견도 중요하지만 결국은 치료의 주체는 엄마이기 때문에 엄마의 의견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삶의 질을 우선으로 하는 것과 최대한의 생명 연장에 목적을 두는 것. 어떤 결정도 어느 하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지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는 나아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때 언니는 중간 점을 찾아 지금 당장 포기하기엔 조금 이르니, 하나의 사이클인 2번의 주사를 더 맞아보고 그때 결정을 하는 게 어떠냐는 의견을 냈다. 그때도 항암제로 인한 부작용이 우리가 약에서 얻는 효과보다 크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으면 그때 그만두자고 했다. 그리고 엄마도 괜찮은 생각이라고 동의해서 다시 두 번 더 치료를 받는 걸로 결정했다.
돌이켜 보니 이렇게 머리 터지게 고민했던 시간은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했다. 엄마와 우리는 많은 대화를 하면서 삶의 질을 심각하게 저하하는 공격적인 치료는 하고 싶지 않다는데 함께 동의했고, 의료진의 의견에 한 발짝 거리를 두고 엄마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지금 어떤 도움이 필요 한지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엄마가 우리와 함께 앞으로도 엄마에게 중요한 삶의 우선순위를 중심에 두고 엄마에게 맞는 치료법을 같이 찾아갈 거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했다.
지금 엄마에게는 무엇보다 정서적인 돌봄이 필요해 보였다. 진단 이후 한 달 남짓이 지난 시간 동안, 많이 받아들인 것처럼 보였지만 여전히 정서적으로 약하고 불안정했다. 엄마는 암이라는 무서운 병이 왜 나에게 찾아왔는지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누구도 엄마에게 정확한 여명에 대해 이야기한 적은 없었지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 익숙해지지 않는 비극 같은 현실을 받아들이는데 엄마에게는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그리고 그런 대화를 함께 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아빠는 경상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부장적이고 무뚝뚝한 성격에 정서적인 소통이 어려웠다. 특히 우리들과 데면데면해서 같이 있으면 정적이 흐르거나 아빠의 의견대로 되지 않을 때 소리부터 지르고 보는 소통방식을 갖고 있었다. 이제껏 엄마가 온전히 희생하며 아빠에게 맞춰주며 살아오는 것으로 집안의 평화는 유지되어왔다. 하지만 엄마가 아프고 나서 아빠는 놀랍게도 많이 바뀌었다. 집안일을 도맡아서 했고, 아빠 중심으로 돌아가던 집안이 처음으로 엄마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엄마에게 필요한 감정적인 서포트를 해주기엔 두 사람의 감정의 간극이 컸다.
어떻게 해야 할지 우리들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그즈음의 나는 지난 4년간 몸을 담아온 현재 회사에서 팀 헤드로 막 승진을 한 참이었고, 운이 좋게도 가고 싶었던 다른 회사로부터 오퍼를 받아서 계약서에 사인을 마치고 출근일을 조정하던 중이었다. 회사 일에 사활을 걸고 열심히 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10년쯤 해 온 회사 생활에서 한 발 진보하는 그런 중요한 포인트에 있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하지만 임신 초기였던 언니와 대학원 마지막 학기에 취업 준비에 한창이던 동생의 상황을 생각하면 그때 엄마 옆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금 내 삶을 잠시 멈추고 한국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분명 쉽지 않은 결정이었고, 특히 오퍼를 받았던 회사는 놓치기 아까운 기회였지만, 의외로 한번 마음을 먹고 나서는 크게 망설임은 없었다. 이렇게 쉽게 결정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의 완전한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는데, 다른 건 걱정하지 말고 나와 엄마만 생각해서 결정하라고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었다. 그리고는 내가 한국으로 간 뒤부터는 시간이 될 때마다 최대한 자주 주말과 휴가를 이용해서 한국으로 와서 힘든 시간을 겪는 엄마에게 그리고 나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렇게 한국을 떠난 지 10여 년 만에 다시 나의 한국생활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