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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헤미안 Dec 28. 2020

02. 질풍노도의 직장인 내려놓기


스물여섯에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2020년, 올해가 꼭 30년이다. 그것도 한 직장에서 30년을 근무했으니 참 나도 어지간하다. 주변머리가 없다고 하는 게 맞을 듯싶다. 다들 그렇듯 나의 직장 30년도 쏜살같이 흘러간 게 사실이다. 그냥 빨리 지나갔다고 해서 ‘질풍노도’라고 표현하는 건 좀 아닌 것 같고, 많은 일들 사이에서 정신없이 보냈다는 것이 맞는 거 같다.


나름 손꼽아 줄 만한 그룹사에 다니다 보니 남들이 쉬이 경험하기 어려운 것이 하나 있다. 30년 동안 두 번의 합병과 한 번의 계열사 전배를 하다 보니 4개 회사를 다니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4군데 회사를 다니는데 나의 의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회사가 바뀌는데 내가 조금의 고민도 한 적이 없고, 회사를 옮기는데 주체적인 노력을 하지도 않았으니, 나는 가만히 있는데 회사가 움직였다고 하는 게 맞겠다. 아직 한 번도 써본 적은 없지만 나의 이력서를 쓴다면 나름 화려하게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두 번째는 부서장 생활이 거의 절반인 14년이다. 과장 6년 차에 팀장이 되면서 나름 ‘최연소 팀장’, ‘최초의 과장 팀장’, ‘유일한 30대 팀장’ 같은 사내 타이틀을 지금껏 가지고 있으니 꽤 성공한 축에 들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영광의 순간보다 고생 고생하던 기억이 너무 크다. 한 때는 부서원이 50명이 넘는 적도 있었으니 부서원 이름 외우는데 1달 이상이 걸리기도 했다. 게다가 부서가 거의 매년 바뀌었으니 ‘무능력’하다고 하기보다는 ‘능력 있음’의 꼬리표가 달린 거 아닌가 싶은 자축도 해보곤 한다.


세 번째는 스스로 선택한 길이어서 나름 자부심을 갖는 것인데 30년 동안 ‘영업’만 했다. 자부심의 근거는 회사 내의 소위 힘 있는 부서로 갈 수 있는 몇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거절했다는 거다. 신입 사원 때부터 선택한 ‘영업’의 한 길을 내리 달려온 건 지금 와서 생각해봐도 참 잘한 일이지 싶다. 30년을 비즈니스의 최전방 전선에 서 있어온 게다. 그것도 자원 근무라니. 사원 시절에는 경쟁사 정보를 얻겠다고 상대 회사 쓰레기통을 통째로 담아와 여관방에 풀어놓고 뒤지기도 했을 정도로 무모함과 뜨거움 같은 것들이 마구 뒤엉킨 필름들이 씩 웃음 짓는 기억들을 소환하기도 한다.




임원 승진을 못했으니 직장 생활이 성공적이었다고 하거나, 마냥 잘했다고 평가하기에는 객관적이지 않은 거 같다. 하지만 내내 감사한 몇 가지가 있어서 참 고마운 일이다.


먼저는 30년 동안 하루도 아파서 결근해 본 적이 없다. 휴가를 내려고 핑계로 아프다고 한 적은 당연히 있지만 말이다. 게다가 하루도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없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두 번째는 승진에 누락되는 일이 없었다. 잘 나가는 직장인들처럼 특진하는 경험도 없었으니 피장파장일 수도 있겠으나 나름 진급에서 좌절감을 겪어보지 않아서 감정의 격함을 피할 수 있었다는 점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세 번째는 하고 싶었던 일들을 참 무던히도 하고 싶은 데로 한 점이다.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실행해볼 수 있었다. 영업부문에 일하면서 나의 의지대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꾸준히 가져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의 선물인지 직장 생활을 해본 이들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듯하다. 성공도 있었지만 실패도 참 많았다. 일에 대한 아쉬움이 남지 않게 되니 감사하다.


그리고 지난 30년을 돌아볼 때 크게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기억이 없다는 것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회사 내에서나 밖에서 참 많은 사람들과 관계가 있었고, 서로의 다름으로 갈등과 다툼이 생길 수 있지만 상처를 주는 일은 없었던 듯하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누군가를 만나도 마냥 반가울 수 있다니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물론 나의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돌아보면 크게 돋보이지 않지만 그닥 모나지도 않은 직장 생활이었다. 그래서 나의 직장 생활은 늦가을 갈대 색이다. 거친 호흡으로 오른 능선에서 뜬금없이 만났던 갈대 말이다. 늦가을 햇빛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에 마냥 흔들리는 그 갈대가 내뿜는 단음의 소리를 보는 듯하다. 


이제 능선의 갈대를 뒤로하고 내려가야 한다. 앞으로 걸어야 할 길은 다른 길이다. 그 길에서 만나고 그려갈 그림은 다른 색깔의 풍경이다. 


갈대가 뒤덮인 멋진 능선의 사진을 남겼으니 즐겁게 또 다른 내리막 길을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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