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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헤미안 Dec 31. 2020

05. 중년 캔버스의 바탕색


빨강의 배색은 파랑이다. 


색은 사물이 주는 시각적 의미가 뇌를 통해 전달되는 순간의 느낌일 수 있고, 전체적인 느낌을 감각적으로 기억하게 하는 매개이기도 하다. 어렸을 적 어머니가 입으셨던 옥색 치마의 기억은 옥색을 만날 때마다 내가 푸근함을 피부로 살갑게 느끼는 까닭이다.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라는 그림을 본 적이 있다. 미술에 참으로 문외한인 나의 시선은 파란색 머리띠에 끌렸는데, 그 이유가 강렬한 눈빛과 대비되는 폭넓은 머리띠의 색깔 때문이었는지 혹은 빛이 들지 않은 검은색 배경과 달리 가시광선이 베어 들어 있어서 더욱 생생한 질감을 느끼게 하는 머리띠의 색감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소녀의 파란색 머리띠는 내 기억 속의 무언가에 맞닿아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요하네스 베르메르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색은 형태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삶은 색의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돌이켜 보면 노란색 유치원 원복이 떠오르고 연하늘색의 중고등학교 여름 교복이 생각나는 것도 그 나이에 걸맞은 색으로 상징된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붉다’라는 단어의 어원은 ‘밝다’라고 한다. 밝음에서 시작된 상징의 색 표현을 ‘빨간색’이라 이름한다. 그래서 빨강은 세상을 밝히는 색이다. 젊음의 상징이다. 의도하든 아니든 지금까지 삶의 색은 온통 빨강이 주된 색이었게 분명하다. 


이제 앞으로 그려질 삶의 색은 이름이 바뀌어야 할 때이고, 스스로 어떤 색을 고를지 선택해야 한다. 선택지는 너무 넓지만 정답은 없다. 각자의 색, 형광색이어도 되고, 무채색이어도 좋다. 서로 마주 보는 보색을 선택할 수도 있다. 저마다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면 그 어떤 색깔도 아름답다.


나는 앞으로 만나게 될 인생 캔버스의 바탕이 ‘파란색’으로 칠해지면 좋겠다. ‘푸르다’는 ‘풀’을 어원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파란색은 자연의 색이다. 열정과 뜨거움은 없지만 평안과 자연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파란색과 빨간색은 질서와 균형 감각이 어울리는 배색의 관계이다. 이왕이면 강하지 않은 파스텔톤으로 옅게 칠해지면 좋겠다. 


초등학교 미술시간이 생각난다. 넉넉지 않은 살림들이라 그림을 그릴 도화지가 제법 귀할 때였다. 책상 위에 찌그러진 플라스틱 물통과 몇 개 안 되는 물감, 한 귀퉁이가 깨진 팔레트를 펼쳐놓고 신문지 한 장을 깐 다음 그 위에 도화지 한 장을 놓았었다. 짝꿍과 시시덕거리면서도 실수해서 망치면 안 되기에 조심스레 도화지 위로 붓질을 하던 두근거림이 생생하다.


이제 다시 색칠의 떨림을 감싼 채 스케치를 시작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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