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헤미안 Dec 30. 2020

04. 종로 해장국 집과 지친 무릎


종로 뒷골목, 낮은 천장의 해장국 집이 후끈하다.


잔뜩 어깨를 움츠러들게 하던 겨울 추위가 육수를 끓이는 열기로 가게 안이 뜨끈한 탓인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쉬이 녹는다. 오랜만에 들렀다. 10,20년 전에 퇴근 후 삼삼오오 들르던 곳이어서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게 정감스럽다. 한쪽 구석 빈자리에 자리를 잡고 천천히 가게 안을 둘러본다. 예전 그대로인 듯 가지런히 놓인 국그릇이며 벽에 흘려 쓴 글씨로 매달려있는 메뉴들이 참 푸근함을 더한다.


채 아련한 추억을 되새김하기도 전에 선배가 들어온다. 선배를 마지막 본지 한 3,4년 되었을까. 나보다 네 살 많은 선배는 정년을 몇 년 앞두고 나이에 대한 압박을 조금 받는가 싶더니 위로금을 받을 기회가 있어서 선뜻 회사를 그만두었다. 선배는 예전부터 생각하던 조그만 사업을 한다고 하였고, 몇 달 전에 다른 후배에게서 선배가 지금은 집에서 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함께 팀장 생활을 꽤 오래 같이 하면서 정도 많이 들었던 처지였고, 선배의 성향을 볼 때 사업을 잘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집에서 쉬고 있다 하니, 오랜만에 예전 선술집에나 같이 가자고 연락을 하였던 터였다.


“너는 회사에 꼭 붙어 있거라. 회사 밖은 너무 춥다”


자리에 앉자마자 언 손을 비비고 목덜미를 쓱 매만지면서 선배가 하는 말이다. 회사를 그만둔 이들을 만나면 거의 대부분은 회사를 그냥 다니는 게 나았을 것 같다고 한다. 자리를 차고앉아 있는 게 눈치 보이지만 나와서 찬바람 맞아보면 그게 훨씬 낫다고 한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시래기 하나를 건져 입에 쑥 들여놓더니 언 속이 좀 풀리는가 싶게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오고 간다. 자녀 이야기, 회사 이야기들을 돌고 돌아서 드디어 선배의 사업 이야기에 이르렀다. 소주 한 잔을 탁 털어 넣더니 긴 한숨 하나가 꼬리처럼 흘러나와 김이 서린 유리창에 먼지처럼 슬며시 내려앉는다.


선배는 외삼촌이 하고 있던 인테리어 부품 도매업을 간간이 도와주고 있었는데, 연세가 많은 외삼촌이 정리하려고 하자 그대로 인수받기로 하였다. 평소에 익숙하게 보아 왔고, 도매업의 특성이나 사람들도 잘 알고 있던 터여서 나름 준비된 출발이 될 수 있겠다는 확신도 제법 컸었다. 언젠가 창고 이전을 할 때 일손이 필요하여 함께 다녀온 적이 있어서 내게도 제법 익숙한 사업장이었다. 시장성도 있어 보이고, 회사 생활의 경험을 살려 프로세스만 일부 개선하면 누가 보기에도 경쟁력이 충분해 보이던 매우 실한 사업체였다. 그렇지만 인수하고 1년쯤 지났을 때 대형 거래처의 부도가 발생했고 그 여파로 2년여를 고생하다가 작년 말에 끝내 손을 들고 말았다.  


직장 생활 20년 하고 버금가는 2년이었다고 한다. 명치끝에 차오르는 스트레스는 차치하고 사람 만나는 게 무서울 정도로 대인기피증까지 왔다고 한다. 그렇게 사업체를 정리했다. 들였던 돈도 다 날리고, 몸도 망가지고 몰려오는 파도에 정신까지 부서져 가더라고 했다. 다행히 정리하고 나니 잃은 게 너무 많기는 하지만 그나마 마음은 편해지는 것 같아 좋다고 했다.


선배는 얼마 전 혼자서 낚시터에 다녀왔다고 했다. 종일 말없이 좌대에 앉아 빨간색 찌만 바라보고 왔다고 했다. 그리고 잔잔한 물 위로 무심히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고 한다.


“늦은 나이에 회사를 그만 둘 때는 회사의 연장선에서 할 일을 찾는 게 아니었어. 직장에서 하듯 이만하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잘못이었던 거 같아. 준비도 훨씬 치열하게 했어야 해. 월급을 받는 직장과 목숨을 걸어야 하는 사업은 다른 것인데. 다시 돌아간다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맞을 듯 해. 나이가 들면 일을 대하는 방식도 바뀌어야 하는 것인데 말이야”


해장국 집을 나서는 길에 다시 추위 한 줌이 지친 무릎에 버겁게 차 온다. 발걸음이 무겁다. 소주잔을 기울이는 선배의 축 처진 어깨 뒤로 슬쩍 지나가던 함께 보낸 지난날의 직장 생활이 떠오른다.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자조 섞인 말도 귓가를 맴돈다. 어둠이 깊은 만큼 생각도 깊다.


회사를 떠난 후 나는 무엇을 하는 게 좋을까? 무엇을 하고 싶은가?

이전 03화 03. 스물한 살의 청년을 회상하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