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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헤미안 Dec 29. 2020

03. 스물한 살의 청년을 회상하다



나에게 스물한 살은 지금까지의 삶에서 첫 번째 변곡점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그다지 넉넉하지 않은 살림 가운데 4형제의 막내인 나는 위로 두 명의 형이 대학생인 탓에 당시에는 조금 이른 대학교 1학년을 마친 상태에서 군입대를 스스로 결정하였다. 병무청에 알아보니 7,8월 정도가 입대 예정일 거라 한다. 거의 반년 넘은 시간이 남게 되었고,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다가 앞으로 인생에서 경험하지 못할 듯한 몇 가지 사회 경험을 해보면 어떨까 싶은 치기 어린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는 아르바이트란 개념이 거의 없었던 시절이라 대학생 신분으로 뭘 하기에는 별로 선택지가 없는 때문이기도 했다. 




스물한 살의 1월. 구직 광고를 보고 일신방직 영선계 고졸 직원으로 취업했다. 


당시 광주에서 가장 큰 공장이었던 일신방직은 말 그대로 실을 만드는 방직회사였다. 영선계는 일제시대 잔존 용어로 시설 및 장비들의 유지, 보수 등을 맡는 말 그대로 온갖 잡동사니 업무들을 처리하는 부서였고, 그냥 몸으로 때우는 일이었기에 젊은 나이만으로 충분히 취업의 관문을 넘게 되었다. 공장은 실이 끊어지지 않도록 높은 습도에 실내온도 30도가 넘게 항상 유지되는 곳이어서 겨울철 근무지로는 최상으로 보였다. 


출근 첫날 바로 작업을 시작했다. 2 공장 낡은 배선을 재설치하는 공사인데 내게 주어진 일은 기존 공장 바닥의 배선을 철거하는 일이었다. 아뿔싸, 바닥이 콘크리이트였다. 공장을 가로지르는 콘크리이트 바닥에 선이 칠해지고 선을 따라 해머 드릴로 바닥을 뚫어야 했다. 그렇게 1주일 정도를 작업하게 되었다. 공장 내 근무자는 모두 여자다. ‘여공’이라고 불리는 주로 10대 후반의 여자애들이 가득한 공장에서 러닝 셔츠 차림으로 해머 드릴로 바닥을 뚫으며 비오 듯 땀을 흘리는 21살의 청년. 작업 중간마다 땀을 식히기 위해 겨울의 찬바람을 맞으러 나올 때면 하얀 머릿수건을 두른 어린 여공들의 시선이 춤을 춘다. 문 밖에서 쉬는 어느 날, 슬며시 초코파이 한 개를 내밀던 어느 여공의 수줍은 손길이 기억난다. 


하루는 낡은 공장 지붕의 보수공사에 투입되었다. 낡은 공장 지붕의 슬레이트는 겨울의 한파로 더욱 몸을 움츠려 딛는 발걸음에 얇은 얼음장 마냥 부서지기 일쑤였다. 지붕 밑 얇은 기둥 줄기 만을 밟고 나아가야 하기 때문에 익숙한 영선계 아저씨들이 직접 작업을 하고 나는 어리다고 지붕 끝에서 줄을 잡고 있으란다. 그런데 기둥 줄기가 약했는지 그만 작업하던 내게 줄을 잡고 있으라 하던 아저씨의 발이 빠졌고, 공장 내부 천장마저 부서지며 공장 바닥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지붕 아래의 철구조물들에 부딪히며 떨어져서 심각한 중상을 입게 되셨다. 그 날 저녁 영선계 아저씨들과 연탄 화로의 돼지갈빗집에 둘러앉아 막걸리 잔을 나누며, 스물한 살에게는 낯선 삶의 파편 하나가 각인되었다.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작업하고 월 15만 원을 받던 방직공장에서의 첫 사회생활은 그렇게 매서운 겨울바람 소리로 남아있다. 




스물한 살의 3월. 전남대학교 후문에 위치한 당구장에서 일을 시작하였다.


13개의 당구대를 가진 당구장은 직원 2명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당시 100점을 치던 초보의 당구 실력이어서 이왕이면 당구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겠다 싶어 선택한 당구장은 사장 아들이 1천 점의 실력자였다. 아침 8시부터 밤 12시까지의 긴 근무시간 동안 바닥 청소, 당구대 청소, 당구공 닦기, 큐대 손질, 음료수 서빙, 요금 정산까지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야 했다. 월급은 그럼에도 10만 원. 


당구를 배우려는 속셈이 더 커서 틈나는 대로 혼자서 당구 연습을 하는데 막상 고수 아들에게 당구를 배울 기회가 오지 않아 애를 태우던 어느 날. 졸업장을 받을 요량으로 전문대학교 국민윤리학과에 적을 두고 있던 고수 아들이 나를 불렀다. 중간고사 리포트 과제가 나왔는데 나의 학력을 알고 있던 아들이 리포트를 써달라고 부탁한다. 리포트 한 개 당 1시간씩 당구를 가르쳐주기로 약속하고, 3개의 리포트를 대신 써주었다. 


3시간의 당구 수업. 그리고 3개월 남짓 당구장 일을 하고 나올 때 나의 당구 실력은 300점. 고수 아들로부터 배우는 3시간 동안 그다지 특별한 기술이나 설명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저 함께 게임을 하면서 간간이 하는 몇 마디가 전부였지만 3시간 동안의 호흡과 공기는 배움의 의미가 무언지 느끼기에 충분하였다. 


지금의 당구 실력도 그 시절 3시간의 경험 덕분이지 싶지만, 학습의 방법론에 대한 시사점은 지금까지도 유효한 기억이니 참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스물한 살의 6월. 화장지 장사를 시작하였다.


뭔가 색다른 경험을 모색하던 중 리어카에 화장지를 싣고 파는 장사가 눈에 들어왔다. 당시는 대형마트나 일반 슈퍼마켓이 없었고 화장지를 재래시장에서 구매하거나 리어카를 끌고 다니는 노상 판매 형식으로 사던 시절이었다. 피고용자가 아닌 장사를 해보면 어떨지 구미가 당겼다. 알아보니 화장지 도매점이 있고 주민등록증을 맡기면 리어카 한 대와 리어카에 가득 화장지를 실어 임대해주었다. 하루 장사가 끝나면 리어카와 남은 화장지를 반납하고, 판매한 화장지는 약정된 가격으로 정산하는 방식이었다. 장사 밑천이 필요 없어서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장지는 통상 10개 롤이 들어있는 한 묶음을 1,500원의 약정 가격으로 받는데, 대부분 3,000원 내외로 판매한다고 하였다. 판매 가격은 물론 파는 사람 마음이지만. 1묶음에 1,500원의 마진, 10묶음을 팔면 15,000원의 마진이었다. 앞서 방직공장이나 당구장에서 받던 월급을 생각하면 5묶음 이상을 팔 수 있다면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다.


장사 1일 차, 1개도 못 팔았다. 


창피함에 “화장지 사세요” 소리가 도무지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3일 차가 되었는데도 개시를 못한 채 더위를 식히려 담벼락 그늘에 앉아 쉬고 있었다. 지나던 아주머니 한 분이 가던 길을 돌아오더니 아들 생각이 난다며 화장지 하나를 팔아준다. 첫 개시였다. 너무너무 고마운 순간,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내 또래의 아들을 둔 아주머니들이 비슷한 생각이 들 수 있겠다고 상상이 되자, 바로 주택의 문을 두드렸다. 당시 광주에는 아파트가 거의 없었고 일반 주택 형식이었는데, 방문 판매가 별로 없던 시절이라 대문을 열어주는데 그다지 인색하지 않았다. 무작정 대문을 밀고 들어가 마루에 화장지 묶음을 내려놓았다. 대학생인데 학비 벌려고 장사를 하고 있다고 말하면 아주머니들은 너무 간단히 지갑을 열어 주었다. 그 날부터 하루 4시간 정도 장사를 하면, 돼지고기 2근 정도와 현금 1만 원을 들고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장사의 맛을 알게 되었다.

 

한 달쯤 되던 어느 날, 광주 시내의 법원 근처를 지나게 되었다. 쭉 늘어선 변호사 사무실들을 보며, 그동안 주택 방문만 하였는데 이런 사무실들도 화장지 수요는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불쑥 변호사 사무실 한 곳을 들어갔다. 사무장과 여직원이 앉아있는 사무 공간과 안 쪽에 변호사 사무실이 있는 구조였다. 에어컨이 없던 시절의 여름 날씨라서 창문이며 방문이며 모두 열려 있었다. 무슨 일이냐는 사무장의 질문에 ‘화장지’라는 말이 나오기 무섭게 나가라고 한다. 좀 사주세요 하며 덧붙이는 말을 하고 있는데 안 쪽에 있던 변호사가 고개를 내밀고 무슨 일인지 묻는다. 잽싸게 변호사 방으로 들어가서 법대생인데 학비 조달을 위해 화장지를 팔고 있다고 하니, 잠깐의 망설임 뒤에 변호사 왈 몇 개 사주라고 한다. 사무장이 2개를 놓고 가라고 하면서 만 원권 몇 장을 빼면서 얼마냐고 묻는다. 순간 만 원씩이라고 대답하여 2만 원을 받아 나왔다. 아, 변호사에게 법대 고학생이란. 그리고 그 하루 동안 법원 앞에 쭉 늘어선 변호사 사무실 30여 군데를 다 돌아 화장지 50여 개를 팔고 20여만 원의 이익을 남겼다. 


그 날로 화장지 장사를 끝냈다.




스물한 살의 7월에 군입대를 하기까지 6개월간 짧게 경험한 일탈 실험은 이후의 삶 내내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비즈니스적으로 타깃 마케팅의 경험과 ‘월급을 받는 자’ vs ‘월급을 주는 자’의 차이를 느끼게 해 준 화장지 장사는 직장 생활 동안 큰 도움이 된 적도 많았다. 겁 없이 뛰어들고, 생각나는 데로 실행해 보고, 낯선 일에 부딪히는 것을 인색해하지 않았던 스물한 살의 6개월은 지금까지 지치지 않게 지탱해준 자양분이 되어주었음이 틀림없다. 


이제 30여 년 직장 생활을 마쳐야 하는 시기가 다가오는 지금, 스물한 살의 그 청년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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