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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헤미안 Jan 02. 2021

07. 크레타섬에 내려놓은 설렘



석회 빛이 넘치는 토양 위에는 군데군데 뿌려놓은 듯한 포도밭이 에게해의 더운 바람에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있다. 뜨거운 햇빛을 피해 올리브 나무 밑에 펼쳐 둔 목재 식탁 위에는 어제 밭에서 직접 수확한 토마토, 오이, 양파, 딸기에 옆 집에서 만든 페타 치즈를 얹은 샐러드가 놓여 있다. 우유가 크림처럼 들어간 프레도(freddo) 커피와 함께 하는 늦은 아침이다.


에어비앤비를 통해 예약한 이 농가 마을의 한적한 외딴 집은 이제 생활한 지 열흘이 지나가는데, 마을의 기슭에 위치하고 있어서 너무 좋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산과 농장과 햇빛과 더할 나위 없이 싱그러운 공기뿐. 하나 둘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돌집들이 자리 잡은 이 곳은 크레타(Creta) 섬 중부내륙의 아포스톨리(Apotoli)라는 작은 마을이다.


열흘 전, 아테네 피레우스 항구에서 크루즈를 타고 크레타 섬의 아름다운 항구도시 하니아(hania)에 도착했다. 이제 이틀 뒤에는 다시 아테네를 경유, 이스탄불로 가서 며칠을 보낸 후 서울로 돌아가게 된다. 20일간의 휴가이다. 근속 30년 휴가로 에게 문명의 발상지라는 크레타 섬을 다녀올 요량을 손꼽은 지 오래되었다.


그리스 대문호인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 아름답게 묘사되는 크레타 섬은 ‘파란 지붕을 가진 하얀 벽돌집’들의 풍경으로 널리 알려진 산토리니 섬보다 그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고, 낯선 크레타는 어느 사이 ‘마음속 저장’이 되어 있었다.


도착한 이튿날 다녀온 이라클리온(Heraklion)에 위치한 그의 묘지와 그 유명한 묘지명은 글로 읽고 사진으로 보던 것과 사뭇 다르게 설레는 눈길을 떼지 못하게 하였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기원전 3천 년, 헬레니즘의 근간이라는 미노아(Minoa) 문명이 활짝 피었고, 플라톤이 이야기하는 아틀란티스라고 묘사되는 섬 크레타에는, 더 이상 푸를 수 없을 만큼 파란 바다와 하늘이 하나가 되고, 지중해의 눈부신 햇살만이 크노소스(Knossos)의 흔적과 그리스 신화의 테세우스(Theseus)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오래되었으나 아무것도 없는 곳, 아름답지만 현란하지 않는 곳, 크레타는 조르바가 노래하던 와인의 향에 올리브 기름으로 굽고 볶은 무사카가 그 향을 더해주는 단절된 공간의 섬이다. 크레타의 와인과 함께 보내는 이 며칠의 시간들은 내게 단절된 사색이고 무채색의 향유이다.


높은 가지에 새 가지가 뻗으면 처음엔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처음 거기에 달리는 건 쓰디쓴 열매뿐이다.
시간이 자라고 태양이 열매를 익으면, 마침내 꿀처럼 달콤한 물건이 된다.
바로 포도다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꿈이었다. 깜박 낮잠이 들었나 보다. 근속 30년 휴가로 예약했던 크레타 여행을 조금 전 취소했다. 코로나가 이 여름의 여행을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아 고민 끝에 취소하기로 했다.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허탈함에 잠겨 잠이 들었던 게다. 꿈은 멀리 예약하였던 크레타의 내륙 농가 마을로 데려다주었고, 짧은 아침 식사의 풍경은 오래된 올리브 나무 밑 의자에 자리 잡았다. 20일간의 크레타 여행으로 새로운 삶을 위한 희망의 충전을 기대하였건만 준비하는 내내 깊어졌던 크레타의 정취만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크레타 섬에 내려놓은 설렘을 다시 만나러 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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