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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헤미안 Jan 03. 2021

08. 대하소설 토지를 탐하다


고민이 많아질 때면 무언가에 푹 젖어서 잠잠히 자신을 되새김질해보고 싶은 경향이 있다. 


1990년의 전후로 한 권씩 출간될 때를 손꼽아 기다리며 완간을 더불어 기뻐하던 대하소설 ‘토지’를 떠올렸던 건, 이후로 바쁘다는 핑계로 다시 읽을 엄두를 못 내던 때문이기도 하고, 이제 다시 읽을 이유가 생겼다는 점과 시간이 여유를 허락한다는 소소한 변명거리가 자리하고 있다.


연초에 진주를 다녀올 일이 있어서 올라오는 길에 문득 하동의 평사리를 들려보고 싶었다. 가본 적이 없었던 곳인데 왜 갑자기 평사리가 머릿속에 휙 떠올랐는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들른 평사리의 최참판댁 촬영세트장은 오른쪽 멀리로 산허리를 휘감아 도는 섬진강, 전면에 활짝 펼쳐진 평사리 마을과 들판이 한눈에 들어오는 기슭에 높은 위용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토지를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은 그렇게 평사리에서 시작되었고, 돌아오는 길 섬진강 가의 음식점에서 맛본 구수한 재첩국은 다시 토지를 읽어보라고 권하고 있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대하소설 토지는 16권이다. 이후 출판사마다 다른 묶음으로 내다보니 20권짜리가 많은데 처음 완간형은 16권으로 출판되었다. 서른 즈음에 소설 5부의 각 권을 기다리고 밤을 새워 읽으며 자신을 다잡아보던 추억이 이제는 누르스름하게 변색된 책장에 눌러앉아 있다. 


회갈색으로 변한 들판은 허무하고 황량하다.
햇볕은 포근한 편이었고 논바닥에 괸 물은 아직 얼지 않았다.
쭈빗쭈빗한 논둑의 마른 풀이 논물에 그림자를 내리고 있었다.


13권쯤 읽을 무렵 원주에 소재하는 박경리 선생의 고택을 찾았다. 이제는 문학공원으로 잘 정돈되어 있지만 선생이 마지막까지 거주하며 글을 쓰던 옛집은 지금도 그 정취를 느끼기에 충분하였다. 비가 부슬한 몸짓으로 흩뿌리던 그 날, 다행히 아무도 찾는 이가 없어 고즈넉한 그 날, 선생이 작업을 하던 1층 서재의 창 밖 의자에 앉아 두어 시간 동안 소설을 읽었다. 불과 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25년 전 글을 쓰고 있는 선생과 그 글의 치열함을 함께 교감하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원주 박경리 문학공원 내 고택


소설의 주인공은 섬진강이다. 


어디론가 오고 가는 사람들이 발길을 향하는 나루터나 숨 막히는 가슴으로 바라보는 많은 이들의 눈길을 받아주던 강물이나, 애절한 삶의 현장이었던 강가나 모두 하나로 묶어주는 섬진강은 먼 만주 벌판을 돌아 지금도 그렇게 흐르고 있다. 그 긴 시간과 역사와 푸닥 거림과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을 묵묵히 바라보며 흐르는 섬진강은 소설 ‘토지’를 안아주고 토닥이는 숨결이다. 


겨울의 강물은 추위에 거칠어진 사람의 살갗 비슷하다.
잘게 이는 물결은 돋아난 소름같이, 그리고 떨고 있는 듯 보였다



호흡이 벅차다. 짧은 한 호흡으로 끝까지 읽어내려갔다. 26년의 집필 기간을 가진 작가의 고뇌를 어찌 활자로 이해할 수 있을까마는 읽는 사람마다 느끼는 바가 조금 다른 들 어떠하리. 그렇게 각자의 고민을 강물에 내려놓고 강물처럼 산을 돌아 들을 지나 자기의 길을 찾아 떠나면 될 까닭이다. 


토지를 읽고서 앞으로의 시간들에 대한 느낌이 정돈되는 듯하다. 흐르는 강물에 몸을 맡기면 때로는 강가의 고운 모래밭에 멈추기도 하겠지. 


나를 얽매여 지정하려고 하지 않기. 이 순간에 감사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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