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트해의 붉은 숲 8
6월 23일. 라트비아에서는 일년 중 낮이 가장 긴 하지를 즐기는 명절이다. 2년 전만 해도 가족들과 풀과 꽃을 모아 집을 성대하게 장식했고, 고향친구, 이방인 할 것이 없이 한데 모여 먹고 마시는 축제를 벌이던 날이었다.
그 성대한 날에 알료샤는 울디스와 장갑차 위에 올라와 앉아있었다. 봄을 알리는 지에도니스가 라트비아에서 온 소련군인들에게 안식을 주려고 찾아온 듯, 새소리 하나 없이 고요한 돌산. 그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조용한 목소리로 고향에서 하지 축제 때마다 부르던 노래를 불렀다.
야니스는 양철북을 울려라. 리구오, 리구오
대문기둥 꼭대기에서 리구오, 리구오
야니스 어머니가 들어오시도록 리구오, 리구오
야니스 자식들을 맞이하도록 리구오, 리구오
안녕하세요, 야니스 어머니, 리구오 리구오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나요 리구오 리구오
무슨 치즈를 드셨나 리구오 리구오
좋은 맥주를 빚으셨나 리구오 리구오
야니스 어머니 화가 났네 리구오 리구오
치즈가 너무 적다고 리구오 리구오
화내지 마요, 야니스 어머니 리구오 리구오
하느님이 우리를 배부르게 해줄 거에요 리구오 리구오
오랜만에 맛보는 평온한 느낌을 즐길 여유도 없이 정찰 명령이 떨어졌다. 스체니친 대위를 찾기 위한 수색을 시작하라는 것이었다. 벌써 며칠째 같은 명령을 하달 받았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그날따라 알료샤와 울디스는 같은 정찰대에 편성되어 장갑차 한 대에 함께 타고 이동을 했다. 그 장갑차 안에는 몇 명의 병사들이 더 있었고, 울디스는 해치를 열고 무장한 채 장갑차 위에 올라가 있었다. 덜컹거리는 장갑차의 진동을 즐기며 한참을 달리고 있었다.
갑자기 알료샤 눈앞에 팔이 내려와 잡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울디스는 알료샤가 내민 손을 휘어잡아 순식간에 위로 끌어당겼다. 그들이 밖으로 나오는 순간, 순식간에 영혼들의 공습이 시작되었다. 두 병사는 방향을 잃고 뒤뚱거리는 장갑차에서 떨어졌다. 마침 그들이 떨어진 곳엔 전날 내린 비로 물이 불어난 계곡이 있었고, 두 친구는 바로 그 물줄기 속으로 몸을 피할 수 있었다. 계곡의 빠른 물살 덕에 그들은 순식간에 참혹한 전투지에서 멀리 휩쓸려 내려갔다. 영혼들의 공습은 부대의 이동 경로를 미리 알고 있던 것처럼 조직적이었다. 물살에 휩쓸려가는 그들 눈에 영혼들 뒤쪽에 서있는 사람이 보였다. 눈에 익은 몸의 실루엣. 그리고 공포스러울 정도로 붉은 얼굴. 발 아래에 똬리를 틀고 하악대고 있는 사막의 구렁이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는 그의 모습은 그레고리우스 대성인인지도 몰랐다. 대성인이시여, 제발 우리를 이 풍랑에서 구해주소서.
그들의 기도를 그레고리우스 대성인이 들어주신 것일까. 두 병사는 물살이 나뉘는 곳에 몸이 닿아 구사일생으로 살아날 수 있었지만, 기뻐할 여유가 없었다. 돌산에서 밤을 맞이하거나 영혼을 마주치게 되면 살아남을 확률도 아주 적었다. 정신 없이 헤매고 있는 돌산에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산 위에서 그들을 본 아프가니스탄 병사가 쏜 총알이 알료샤의 팔을 관통한 것이다. 울디스가 쓰러진 알료샤를 부축하여 총알이 빗발치는 공간을 지나 커다란 바위 밑으로 몸을 숨겼다. 울디스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수통 가방이 풀려 땅으로 떨어졌다.
그들이 바위 밑으로 들어간 순간 총소리가 멈췄다. 분명 산을 내려오는 중이거나, 무언가 움직임이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확실했다. 둘은 바위 그늘에 앉아 거친 숨을 내쉬며 주위를 살폈다. 주변엔 그들이 내쉬는 거친 숨소리만 울려 퍼졌다.
핏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흡자 모래사막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듯 크게 들릴 만큼 주위가 고요했다. 모래가 묻어 나오는 칼칼할 허파의 숨소리를 들으며 죽음이라는 자유가 그들을 선택해 주기를 기도했다. 그들의 숨이 점차 차분해지는 동안 사위는 내내 고요하기만 했다. 그러자 영혼의 공습에 대한 공포 때문에 잠시 둔감해졌던 팔의 통증이 미친 듯이 알료샤의 뼈를 찔렀다.
알료샤가 입을 열었다.
“울디스, 너 풀 있니?”
풀이라도 피울 수 있으면 잠시라도 고통을 잊게 될지 몰랐다. 울디스는 말이 없었다. 알료샤는 사랑을 고백하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살아서 못 나가게 될지도 모르니 여기서 마지막으로 한대만 피워보자.”
울디스는 모래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잠시 후 입을 열었다.
“라트비아에 가고 싶어. 지금쯤 고향에서는 하지 축제가 열리고 있겠지?”
고개를 든 울디스의 아이 같은 청명한 눈동자는 라트비아의 6월 하늘처럼 빛났다.
“우리 어머니는 나를 주려고 치즈를 만들고 있겠지? 우리 동네 떡갈나무는 잎이 무성해졌을까?”
울디스는 정신이 나간 듯 눈을 반짝거리며 고향 이야기만 쏟아내었다.
“그래, 아마 지금쯤 숲에 가면 고사리가 많을 거야. 오늘 밤엔 꼭 그 고사리꽃을 찾으러 가야 하는데……. 그 꽃을 찾으면 어떤 소원도 들어준다고 하던데……. 가족들은 우리가 안전히 돌아오기를 바라면서, 그 고사리꽃을 찾아다니고 있지 않을까?”
그 순간 알료샤의 머릿속에 다시 울려퍼지는 하지축제의 노래.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고사리꽃을 찾고 있을 그의 연인 라임도타의 청순한 댕기머리와 그 향기여. 리구오, 리구오...
두 명의 입에서는 동시에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울디스는 아이 같은 얼굴을 들어 한층 밝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알료샤. 우리끼리라도 여기서 하지 축제를 벌이자.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내가 풀 가지고 올게.”
바위 밖으로 후다닥 뛰어나가는 울디스.
“울디스, 어디 가는 거야?”
알료샤는 울디스가 군복 어딘가에 풀을 숨기고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풀은 수통 가방 속에 들어있었고, 그 가방은 저 편에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족히 50미터는 되어보였다.
리구오 리구오 리구오......
순간 알료샤의 귓가에 다시 바람을 날카롭게 찢는 소리가 들려오면서 머릿속에서 맴돌던 선율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수통을 향해 뛰쳐나가는 울디스의 성급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저런 머저리......”
그는 고개를 내밀고 울디스가 움직이는 방향을 살펴보았다. 영혼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돌산사막. 수통을 잡는 울디스. 밝게 웃으면서 알료샤를 향해 돌아서는 그의 얼굴. 그리고 지진이 나는 듯 흔들리는 바위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