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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sygoing Oct 20. 2023

죽는 건 힘들다

경험은 없고 생각은 짧다

내가 처음 죽음을 자각했던 건 유치원 때였다. 방에 누워 뒹굴 대다가 느닷없이 지구의 중심이 미국인데 나는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 망했네. 다시 태어나야겠다. 이러면서 밤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을 참았다. 몇 번 시도했지만 힘들어서 포기했다. 


어릴 때 사극이 유행이었는데 혀 깨물고 자살하는 장면이 자주 나왔다. 살짝 씹어도 죽을 것 같은데 죽을 때까지 깨문다니! 감히 시도할 생각도 못할 만큼 무시무시했다. 혀 깨무는 건 충성스러운 신하와 독립군만이 할 수 있는 최상급 기술이라고 결론 내렸다. 


중학생이 되면서 영화관람이 취미가 되었는데 거기는 또 그렇게 손목을 긋는 장면이 자주 나왔다.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고 누워서 손목을 그으면 죽는다네. 뭔가 중2병을 자극하는 야리꾸리함이 있었지만 일단 우리 집은 식구가 많아서 화장실이 항상 붐비기 때문에 불가능했다. 


당시 일진이던 옆집 언니가 옥상에서 본드 불다가 떨어져 죽는 애도 있고 가스 불다가 목구멍이 막혀서 죽는 애도 있다고 친절하게 알려주었지만 역시나 그런 방법은 뭔가 극적인 느낌이 부족하다고 할까. 섬세한 사춘기 소녀의 마지막으로는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 


스무 살이 넘어가자 술 먹고 죽는 애들이 생겼다. 학기마다 학교 호수 주변에 새로 심어지던 누구누구 나무들… 

밴드 동아리 친구들이랑 진정한 뮤지션은 27살에 죽는다며 뮤직은 글렀으니 건강을 해치는데 전념하자! 비장한 건배로 결의를 다졌지만 하필이면 딱 그 시절의 내 간 기능은 어찌 그리도 우월했던지. 


그리고 서른 즈음에 교통사고가 있었다. 붕 날아서 퍽 떨어졌는데 그 순간 '드디어 끝났구나' 하면서 마음이 너무나 평화로워졌다. 그렇지만 금방 정신이 들었고 엄청나게 아팠다. 아빠가 울었다. 다친 것이 죄스러웠다. 머릿속이 새하얘지도록 아파 누워 있는데 사람들이 즐겁고 반가운 얼굴로 줄줄이 병문안을 왔다. 부담스러웠다. 


사람이 쉽게 죽지 않는구나. 깨달았다. 이런 젠장 이거 잘못하면 100살까지 살겠네. 어떡하지.


하늘에서 피로감이 비처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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