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3, 4세(5, 6살) 육아 & 놀이(교육) (4)
방귀대장 뿡뿡이에서 뽀로로, 토마스 기차로 이어지던 아이의 최애 프로그램이 유아기에 들면서부터 "번개맨"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생후 13개월 무렵 애용하던 망토를 다시 꺼내 번개맨 변신 놀이를 시작했다. 하지만, TV 속 번개맨에 비해 자신의 보자기 망토가 영 초라하게 느껴졌는지, TV를 보다 말고 갑자기 방에 들어가서 연필과 종이를 들고 나오더니 좀 도와달라고 했다.
뭘 하려나 했더니, 외할머니께 번개맨 망토와 장갑을 만들어달라는 의뢰서를 만들려는 것이었다. 이제 막 한글을 쓰기 시작해 아직은 삐뚤빼뚤한 글씨로 작성한 의뢰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계약서> 외할머니는 O일 O일까지 OO이에게 번개맨 망토와 장갑을 만들어 주시오. 계약을 어길 시에는 5,000원을 벌금으로 내시오."
아직 의뢰서라는 말은 잘 몰라서 계약서라고 쓰긴 했는데, 도대체 이런 문서 내용은 어디서 본 건지, 아이가 쓰고 싶은 말을 가르쳐주면서도 한참을 웃었다.
오랜 시간 공들여 직접 쓴 손자의 계약서를 받으신 친정엄마께서는 "이렇게 일방적인 계약서는 처음 본다." 하시면서도 외할머니의 멋진 재봉 솜씨로 별그림이 그려진 검정 망토를 직접 만들어 주셨다. 아이가 원하는 번개맨 장갑은 시중에서 파는 걸 사다가 별을 수놓아주셨는데, 아이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했다.
외할머니께 번개맨 의상을 의뢰한 후 완성품을 받기 전까지 제법 긴 시간을 망토 없는 번개맨 놀이를 하면서 보냈는데, 하루종일 쏘아대는 번개 파워에 온 집안 식구들이 각자 나름의 방법으로 반응했지만, 외할아버지와 아빠의 반응이 제일 재미있었는지 두 사람과 함께 하는 번개맨 놀이에서는 아이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달랐던 것 같다.
친정에서 분가를 하고 난 후에도 아이는 종종 낮시간을 외가댁에서 보냈다.
대부분 내가 없을 때 그랬는데, 주로 친정아버지와 번개맨 놀이를 하거나, 카드놀이(원카드)를 하거나, 혼자 레고를 만들면서 나를 기다렸던 것 같다.
만 3세에 외할아버지로부터 전수받은 카드놀이는 원카드에서 시작해 훌라, 포커로 이어졌고, 나중엔 장난감용 카드칩까지 사서 놀기 시작했다. 지금도 가끔 명절에 식구들이 모여 카드놀이를 하는데, 오랜 시간(?) 실력을 쌓아 그런지 울 아들을 쉽게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어린이집 정규반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교구로 구입한 레고는 매주 금요일 집으로 들고 와 주말 내내 가지고 놀다가 월요일에 다시 어린이집에 갖다 놓곤 했다. 그리고 차츰 기성품으로 나온 레고에도 관심을 보였다. 즉, 매뉴얼을 보면서 레고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나, 또는 아빠의 도움이 꼭 필요했는데, 어느새 혼자 매뉴얼대로 부품을 찾아 작품 하나를 뚝딱 만들어냈다. 그런데, 기성품 레고는 매뉴얼을 읽는 능력 향상 외, 레고가 원래 가지고 있던 창의성 향상 측면에서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울 아들에게는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일단 매뉴얼에 맞춰 작품을 다 만들고 나면, 그 작품에 맞는 놀이로 이어졌다. 예를 들면, 소방서를 만들고 나면 관련 장난감들을 모두 모아 소방서 놀이를 했고, 한 2~3일 같은 놀이를 한 후, 미련 없이 작품을 모두 해체했다. 그리고 그 부품들로 자기만의 다른 작품을 만들어냈다. 소방서 부품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다른 건물이 되기도 하고, "우주선"이라고 부르는 그 무언가가 되기도 했다.
유아기의 일상 중 가장 큰 변화는 아이의 목욕을 아빠가 담당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대중목욕탕을 주로 이용했는데, 자전거에 유아용 안장을 설치해 아이를 태우고 한 달에 2~3번은 목욕탕을 갔던 것 같다. 아빠와 목욕탕에 가는 날에는 목욕을 마친 후, 바나나 우유를 함께 사 먹으며 나는 모르는 둘만의 추억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것 같았다.
평일에는 아빠의 귀가 시간이 꽤 늦어 대부분 내가 아이의 샤워를 도왔지만,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하고서부터는 이 닦고, 손 닦고, 세수하는 일상을 거부하던 아이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머리도 감고, 몸도 닦고, 드라이기로 머리카락을 말리기도 하는 등 조금 어설프지만 스스로 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일상의 잘못된 행동을 통제하고 긍정적인 행동으로 전환하는데 유용한 "칭찬 스티커"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였다.
승부욕이 강한 아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칭찬 스티커"가 잘 먹혔다. 너무 목표량이 많으면 시작부터 거부하거나 중간에 지칠 것 같아 첫 스티커판은 5개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보상은 아이와 이야길 해서 정했다.
내 육아일기 기록에 따르면, 첫 스티커판의 보상은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사달라는 것"이었다. 그 아이스크림을 먹기 위해, 스스로 장난감을 치우고, 신발장 정리를 하고, 이를 잘 닦았다. 첫 스티커판을 다 채운 후, 차츰 목표량을 늘려갔고, 보상 역시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아이가 만족할만한 것들로 정했다. 우리의 칭찬 스티커는 유치원에 다닐 때까지 유효했고, 아이가 자라면서 스스로 만든 보상도 "언제든지 원할 때 쓸 수 있는 1회 소원권"이나 "용돈" 같이 다양해졌다.
그리고, 또 하나 아이의 일상에서 달라진 점은 친정에서 분가를 하면서 분리수면을 시도한 것이었다.
아이가 어릴 때는 모유수유를 하기도 했고, 친정살이를 하느라 분리수면을 할 상황이 못되었지만, 분가를 하면서 아이 방을 만들어줄 수 있게 되어 혼자 자기를 권해봤다. 처음엔 자신만의 공간이 생겼다고 좋아하면서 혼자 자보겠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무서웠는지 새벽에 자다 깨서 우리 방 문을 두드리는 날이 잦았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전에 아이의 의사를 먼저 확인해 혼자 자겠다고 하면 아이가 자신의 방에서 잠이 완전히 들 때까지 책을 읽어주면서 옆에 있어주었고, 엄마 아빠와 함께 자겠다고 하면 아이를 밀어내지 않고 한 방에서 같이 잤다.
혼자 자겠다고 한 날도 새벽에 깨서 우리 방에 찾아오곤 했는데 그럴 땐 본인 방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잤다. 나는 아이의 정서상 그게 맞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부모를 필요로 할 때 항상 옆에 있어 주는 것, 자신의 곁에 항상 부모의 따스함이 느껴지는 것이 "분리수면 훈육"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억지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자다 깨서 얼마나 무섭고 불안하면 엄마, 아빠 방에 찾아오겠는가? 엄마, 아빠 방문을 두드렸는데 반갑게 맞아주고 따스하게 안아주면 그걸로 아이의 근심은 사라질 텐데, 뭣이 중허다고...'
결국 분리수면은 초등학교 6학년때까지 성공하질 못했다. 주변에서는 너무 오래 아이를 끼고 자는 것 아니냐고 우려를 나타냈지만, 나는 내 아이의 성향상 때가 되면 혼자이고 싶어 하는 시기가 반드시 올 거라고 생각해 기다렸다. 그리고 내 판단은 정확했다.
진짜 갑작스럽게, 6학년 말, 중학교 배정을 받은 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날 갑자기 "오늘밤부터는 혼자 자겠습니다."라고 하더니, 정말 하루아침에 뚝 떨어져 혼자 자기 시작했다.
내 경험에 비추어 봐도 육아는 정답이 없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러니, 주변의 가이드라인에 내 아이를 끼워 맞추지 말고, 참고는 하되 내 아이에 맞는 맞춤형 육아를 엄마(주 양육자)가 주관을 가지고 해 나가는 것이 가장 올바른 육아인 것 같다.
20살이 된 울 아들은 꽤 과묵한 청년으로 자랐다.
아빠를 닮았는지 말을 아끼는 편이고, 말보다는 행동으로 먼저 보여주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유아기에는 꽤나 조잘조잘 이야길 많이 하는 아이였다.
그래서 이 시기 나는 2가지를 신경 썼다.
첫째, 아이의 말을 절대 끊지 말자.
아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무리 쓸데없게 느껴져도 눈을 맞추고 이야길 들어주었고, 혹 식사 준비 같은 일을 하고 있어서 눈을 맞추지 못한다면, 리액션이나 추임새라도 넣어 '너의 이야길 집중해서 듣고 있단다.'라는 느낌을 받게 했다.
둘째, 아이가 하는 모든 질문에 답을 해주자.
가끔은 내가 모르는 걸 질문하기도 했다. 그러면, "아빠한테 가서 물어봐."가 아니라, "아빠한테 가서 같이 물어볼까?"하고 같이 가서 질문했다. 만약 아빠도 잘 모르는 문제인 경우엔 아이와 함께 책, 인터넷 등을 총동원해서 찾았다. 그리고, 그 질문이 그냥 질문으로 끝나지 않도록 관련 책을 사서 꼭 읽게 했다.
울 아들은 세 돌 전에 이미 웬만한 한글은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책에 대한 거부감도 없었고, 오히려 책을 좋아하는 편이어서 아이의 질문이 새로운 책으로 연결되는 과정을 즐기는 것 같았다.
아기 때부터 해주던 "잠자기 전 책 읽기"는 한글을 뗀 이후에도 계속 이어져 초등학교에 입학 전까지 해줬는데, 밤에 읽어 주는 책들은 인문학 감성이 풍부한 책들을 읽어주려 노력했지만, 아이가 읽어주길 원하는 책이 있으면, 그게 아무리 같은 책을 여러 번 반복한다 할지라도 읽어주었다.
한글에 대한 관심은 글쓰기로 이어져 본인의 이름부터 따라 그리기(?) 시작했고, 글자 그리기에서 글자 쓰기로 변한 뒤에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틈틈이 동화책 속 글자를 필사하기 시작했다. 아이에게는 그게 놀이인 것 같았다.
유아기에는 간판 읽기, 수수께끼 내기, 끝말잇기 같은 놀이도 가능해졌고, 영어동화 테이프 들으며 놀기, 더하기, 빼기 같은 숫자놀이 하는 것도 좋아했다.
하지만, 이 시기 다른 친구들은 한다는 "눈높이", "구몬" 같은 학습지는 시키지 않았다. 아직은 그저 재미있는 놀이로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해, 아이가 원하면 그걸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줄 뿐 학습적 교육을 일부러 시키려고 하진 않았다.
분가 이후 더 많은 시간을 아이와 함께 하게 되면서, "육아"를 선택한 내 결정이 정말 잘한 일이라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되었다. 물론 주변의 시선과 기대에 불쑥불쑥 마음이 힘든 순간도 있었지만, 아이가 커가는 사랑스러운 모습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때의 그 선택은 내가 한 선택 중 가장 잘 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에필로그]
"OO아, 무슨 생각해?"
하루종일 부지런하게 쉴 틈 없이 놀던 아이가 가끔씩 멍을 때리곤 했다. 그러면, 잠시 지켜보다가 말을 걸었고, 대부분 즉각 반응을 해 그때 당시엔 그냥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 멍 때림이 요즘은 뇌전증, 자폐 등의 단어와 어울려 젊은 엄마들 사이에 이슈가 되고 있는 듯하다. 나는 어른들이 멍 때리듯이 아이의 뇌도 잠시 휴식을 취하는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후배 아이가 잦은 멍 때림으로 병원 진료를 받고 왔단다. 다행히 별 이상은 없다는 소견을 들었다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과거의 울 아들 모습이 떠올랐다.
울 아들의 멍 때림은 그렇게 잦은 편은 아니었지만, TV를 보다가, 아니면 신나게 춤을 추고 난 후 잠시 쉬면서, 그리고 생각하는 의자에 앉혀뒀을 때 주로 나타났던 것 같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생각하는 의자를 이용한 훈육은 정말 무용지물이었다. 차라리 왜 혼이 나야 하는지 납득을 시키고 이해시키는 게 더 효과적이지, 생각하는 의자에 앉혀두면 반성하기보다는 멍 때리는 안식처 내지는 상상하는 장소로 활용해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요즘은 아이의 멍 때림조차도 혹시 다른 병의 전조증상이 아닐지 걱정하고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아야 한다니... 세월이 흐를수록 육아의 난이도가 점점 더 올라가는 것 같아 안타까움과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