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3, 4세(5, 6살) 육아 & 놀이(교육) (3)
어린이집 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마지막 워밍업날, 그렇게 혼자 가지 않겠다고 울던 아이는 3월 정규반이 시작되고 1주일 만에 어디론가 사라졌다. 역시, 견디기를 잘했다.
정규반이 시작되고 난 후 1주일 정도는 레고 버스를 타고 갈 때마다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 가길래, 하루는 걱정이 되어서 하원할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가봤다. 조금 일찍 도착해 아이가 수업받는 모습을 몰래 지켜봤는데, 아침에 울먹이던 아이는 더 이상 없었다. 선생님 말씀도 잘 듣고, 친구들과도 재미있게 지내는 것 같았다. 원장선생님께서도 이제는 진짜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말씀해 주셨다.
아이도 차츰 적응하기 시작했는지, 정규반을 다니기 시작한 두 번째 주 월요일 아침에는 레고 버스가 도착하자 내 손을 놓고 씩씩하게 버스에 타더니 차창밖으로 손을 흔들어주며 등원을 했다. 그리고 수업을 잘 마치고 하원을 해서는, 그날 레고센터에서 있었던 일들과 본인이 느낀 점 등을 이야기해 주었다. 특히 원장 선생님이 제일 좋다는 둥, 아이들이랑 어울려 노는 게 조금 부끄럽다는 둥 자신의 느낌을 말로 표현하기 시작해 신기했다.
하지만, 한 달도 안 돼서 레고센터 원장선생님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원장선생님이 바뀌면서 일부 원의 운영방침에 변화가 생겼다.
하원하는 시간이 늦어졌고, 선생님들도 몇 분 교체가 되었다. 교육내용이나 아이들 식사, 간식 등은 기존대로 유지되었지만, 한동안 환경이 어수선했다. 예상치 못한 변화에 몇몇 학부모들이 반발하자, 새롭게 바뀐 원장선생님께서 부모 간담회를 개최해 원을 어떻게 이끌어갈지, 바뀐 부분과 바뀌지 않은 부분이 무엇인지 등을 설명하는 자리를 마련하셨다.
나는 원의 교육방침이 바뀌는 게 아니라면, 이제 겨우 적응한 아이를 흔들어놓고 싶지 않았서, 빨리 레고센터가 정상화되길 간절히 원했다. 울 아들에게는 다른 무엇보다도 선생님이 바뀐 게 가장 영향이 커 보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간담회날 아이 교실에 잠깐 가봤더니, 바뀐 선생님에게 적응하느라 그러는 건지 말도 잘 안 하고 가만히 상황을 지켜만 보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걱정했던 것과 달리 능력 있는 새 원장선생님 덕분에 레고센터는 금방 안정을 찾았고, 울아들도 다시 적응해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하고 친구들과도 잘 지내다 오는 것 같았다. 선생님 말씀으로는 수업시간엔 얌전하게 집중해서 수업을 듣지만, 쉬는 시간엔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텀블링도 하는 개구쟁이 아이라고 하셨다. 아이도 레고센터 생활이 재미있는지, 매일 레고센터 가는 시간을 기다리며 미리미리 준비했고, 주말에도 레고센터에 가고 싶다는 이야길 종종 했다.
2년간의 레고센터 생활은 여러 가지 면에서 만족스러웠다.
일단, 교육 커리큘럼이나 환경 모두 아이의 성향에 잘 맞았던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원했던 대로 유아 교육에 레고놀이를 접목하는 창의적인 수업이 많았고, 한 반에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 5명 정도가 배정돼 선생님이 아이 하나하나의 생활을 꼼꼼하게 케어해 주실 수 있었던 것도 만족스러웠다.
울 아들도 처음에는, 어른들 틈에서 지내다가 비슷한 또래의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이 좀 어색하고 부끄러운 것 같았지만 곧 적응해서 5명 반 친구들 중 절친까지 생기며 어린이집 생활을 너무 행복해했다.
그러던 어느 날, 6세 반을 다니고 있던 때였는데, 아이가 아직 원에 있을 시간에 레고센터로부터 전화가 왔다. 휴대폰에 뜬 레고센터 전화번호를 보자마자 갑자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OO이에게 무슨 일 있나요?"
선생님 말씀으로는 쉬는 시간에 친구와의 다툼이 좀 있었는데, 친구가 화를 참지 못하고 울 아들의 이마를 레고로 때렸다고 하셨다.
하원한 아이의 이마를 살펴봤더니, 빨갛게 맞은 흔적은 있었지만, 긁혔다거나 부었다거나 하는 정도는 아니어서, 저녁 먹을 무렵엔 거의 원래의 피부톤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속은 상했다.
선생님과 아이의 이야길 종합해 보면, 일방적으로 맞고 온 건 맞는데, 장난감 하나를 두고 갖고 노는 순서를 정하는 과정에서 그 친구의 주장을 울 아들이 조곤조곤 말로 반박하다가 생긴 일인 것 같았다.
원장선생님도 전화를 주셨고, 친구 엄마로부터 사과 전화도 받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친구와 다투고(?), 아니, 일방적으로 맞고 온 날이라 아이의 기분은 어떤지, 어떤 마음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잠자기 전 책을 읽다가 물어보았다.
"오늘, 많이 속상했었니?"
"아니요. 좀 놀라고 아프긴 했는데, 친구가 금방 사과했어요."
나는 아이가 친구와의 다툼에서 일방적으로 맞았기 때문에 졌다고 생각하거나 그 친구보다 힘이 약하다고 생각해 주눅이 들진 않으려나 걱정했는데, 의외로 너무 담담해서 놀랐다.
아이가 생각하기에, 일방적으로 맞은 건 그냥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그랬던 것 같고, 선생님이 잘 다독여 주셨는지 그 자리에서 친구에게 사과를 받고 난 후, 그 일은 아이에게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난 거 같았다.
힘으로, 폭력으로 당한 것을 똑같이 힘으로,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은 점을 칭찬해 주었고, 친구의 잘못을 이해하고 용서해 준 것도 잘한 일이라고 칭찬해 주었다.
어린이집을 다니면서, 아이의 몸과 마음이 쑥쑥 자라나는 것 같아 참 대견했던 날이었다.
만 3, 4세, 어린이집을 다니는 동안 주중 아이의 일상 루틴은 다음과 같았다.
오전 7시 기상
아침 식사 및 등원 준비
오전 9시 레고 버스 타고 등원
오후 3시 하원
레고 버스를 타고 하원하는 경우엔 집에 와서 간식을 먹고, 좋아하는 TV 프로그램 1시간 정도를 보고, 각종 놀이 활동하기
데리러 가는 경우엔 밖에서 간식을 사 먹거나, 집에서 준비해 간 간식을 차에서 먹인 후, 월드컵 공원이나 근처 초등학교, 동네 놀이터 등에서 놀다가 귀가
주중에는 하원 후 저녁식사시간 전까지 3~4시간 정도의 여유밖에 없어서 대부분의 시간을 아이가 원하는 놀이를 하면서 보내거나 함께 장을 보러 가는 등의 일상생활 활동을 했다.
저녁식사 후에는 아이와 함께 다음날 등원 준비(알림장 확인, 준비물 확인, 가방 챙기기 등)부터 하고 나서, 같은 공간에서 각자 혹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울 아들의 경우, 혼자 책을 읽거나 레고 만들기를 주로 했고, 나는 그 옆에서 같이 책을 읽거나 강의 준비를 했다. 그러다 "공부"를 같이 하자고 하면, 아이 곁에 앉아서 아이가 하고 싶다는 "공부"를 함께 했다.
생일이 좀 늦어 만 3세부터 어린이집에 다니긴 했지만, 1월생 친구들과도 무난히 잘 어울렸고, 학습적인 부분, 인지적인 부분에서도 뒤떨어짐 없이 잘 지냈던 것 같다.
레고센터에서도 다른 어린이집처럼 다양한 행사들이 있었는데, 공개수업이며, 현장체험학습이며, 연말 재롱잔치 같은 크고 굵직한 행사들이 있을 때면 온 식구가 아이의 모습을 보기 위해 참석했다. 다른 사람들 눈에 좀 과하게 보였을지 모르겠지만, 우리 모두 처음 겪어보는 것들인 데다가 그 당시 아이의 모습 하나하나가 다 소중하고 대견해서 그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3년 만기 친정살이가 끝이 났다.
친정 부모님과의 계약대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육아"와 "경력" 사이에서 고민하다 아이를 위해 프리랜서로 일하기로 결정을 했으며, 아이 또한 어린이집에 잘 적응하자, "이제 그만 나가라."는 통보를 받았다.
아, 오해는 마시길... 그냥 말 그대로 "이제 그만 나가야 하지 않겠니?"라는 의미지, "당장 꺼져."는 아니었다.
안 그래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해, 집을 알아보고 있던 차라 흔쾌히 나갈 준비를 했다. 사실 친정부모님이 말씀하시기 전에 나갔어야 했는데, 이 편한(?) 생활을 접으려고 하니 너무 아쉽기도 하고... 불효막심한 생각이 막 들었던 참이었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한 지 약 4개월이 지났을 무렵 이사를 나왔는데, 그 당시 내 일 자체가 들쑥날쑥이라 아이 하원시간을 못 맞춰 친정 부모님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종종 생겼다. 그래서, 울 신랑과 의논 끝에 친정에서 도보 10분 거리의 아파트를 구해, 매일은 아니지만, 종종 친정식구들과 어울리는 이웃사촌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엔 바쁜 아빠 덕분에 큰 집에 아이와 단 둘이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늘 북적이던 집이 너무 고요하니 뭔가 외롭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했는데, 차츰 적응하고 나니 "우리 가족"만의 보금자리가 편하고 안정감이 들어 좋았다. 아이도 외할머니에 비하면 너무 부족한 솜씨지만 내가 정성스럽게 만들어준 음식에 길들여져 가며 무럭무럭 자라났다.
이후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우리는 친정 근처에 살면서 육아 도움을 계속해서 많이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