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고 생활(3)
아이가 과학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3월 한 달간은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겪으며 학교 생활에 적응했던 기간인 것 같다.
다른 아이들이 주말에도 학원이며 과외를 받으러 다닐 때, 울 아들은 집에서 자기주도학습으로 공부를 해나갔는데, 역시나 과학고 생활이 체력적으로 힘들었는지, 주말 내내 잠만 자다가 가는 날도 있었고, 몸살을 앓아 아무것도 못하는 날도 있었으며, 어떤 주말에는 숙제가 너무 많아 공부는 1도 못하고 학교로 돌아가는 날도 생겼다.
앞서 언급했다시피(제18화 참조), 아이의 건강이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라서 늘 노심초사할 때라 아이가 잠만 자고 가는 날에도 푹 자라고 놔뒀었는데, 조금씩 적응이 되는지 주말에 집에 와서도 자는 시간보다는 공부하는 시간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우리도 아이가 과학고를 다니는 동안에는 주말에 약속을 잡거나 다른 이벤트를 만들지 않았고, 아이의 스케줄에 되도록이면 맞춰, 혼자 하는 공부에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학교 수업의 경우, 처음에는 너무 방대하고 스피드 해서 뭘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 헤매기도 했고, 어떻게 하는 게 효율적인지, 시간관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허둥지둥 대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선생님들이 이해하기 쉽게 잘 가르쳐 주신 덕분에 다른 친구들에 비해 부족했던 선행을 만회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선행이 되어 있지 않다 보니, 다른 친구들은 알고 있는 공식이나 용어를 혼자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지만, 그런 건 수업 전에 교과서를 미리 잠깐 봐두면 해결되는 문제라며 크게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았고, 선생님의 설명이 이해가 안 된다거나 하는 경우는 없어서 자기주도학습 자체가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또한, 선생님들의 수업이 선행을 전제로 하지 않아서, "이런 건 학원에서 배웠지?" 같은 경우는 전혀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학원의 선행시스템을 접하지 않은 것이 학교 수업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건 아닌 것 같았다.
다만, 하루치의 수업이 끝나면 복습해야 할 양이 어마무시하게 나왔고, 선생님이 설명하실 때는 알아들었지만, 복습하려고 보면, 잠시 감이 안 오는 것들도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체크해 뒀다가 다음날 선생님을 찾아가 여쭤보면 다시 차근차근 설명을 잘해 주셔서 일단 학교 공부에 대한 만족도는 높았다.
물론, 시험은 별도의 문제였지만(해당 이야기는 곧 발행 예정).
어쨌든, 3월 한 달은 모든 것을 고등학생 버전으로 업그레이드하는 과정이었고, 결국 아이는 본인에게 맞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 매일매일 치열하게 공부해 나갔던 것 같다. 아이가 찾은 방법이 모두 다 정답은 아니겠지만,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그 과정만으로도 아이가 충분히 잘하고 있는 것 같아 대견했다.
어렵고 힘든 공부를 제외한 나머지 학교 생활은 울아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아이들이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특히, 남학생 엄마들 사이에서는 과학고에 보낸 건지, 체육고에 보낸 건지 헷갈릴 정도로 운동을 너무 많이 하는 것 같다는 하소연이 들릴 정도였다. 울 아들도 공부 스트레스를 운동으로 푸는지, 체력적으로 힘든 와중에도 아이들과 어울려 틈틈이 축구도 하고, 농구도 하고, 배드민턴도 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교우 관계 형성도 제법 잘 되었던 것 같다.
일단 한 반에 20명 정도가 배정되어 있다 보니, 반 친구들하고도 두루두루 잘 지내는 것 같았고, 일정 수준 이상의 아이들이 모여 있어 그런가 팀프로젝트 같은 것을 해도 특별히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것 같았다. 또한 정규 수업 외 자율학습 시간에는 학년 전체가 한 독서실에서 공부하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고, 기숙사 룸메도 분기마다 바뀌다 보니, 1학년 전체 80명이 다 친해질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던 것 같다.
그 밖에 동아리 활동이나 학교 뒷산 소풍, 선후배 관계를 이어주는 학교 행사, 체육 대회와 축제 등을 통해 힘든 학교 생활의 활력을 찾아 나갔던 것 같은데, 그중 동아리 활동과 관련해서, 울 아들은 조금 특별한 경험을 한 것 같았다.
중학교 때부터 AI에 관심이 많았던 아이는 학기 초 동아리 모집이 시작되자마자 코딩 동아리에 지원을 했다고 했다. 하지만, 관심에 비해, 혼자 공부하던 완전 초보 상태의 코딩 실력이라 동아리에서 떨어질까 봐 걱정을 했다. 그런데, 나중에 물어봤더니 동아리 지원을 취소했단다.
"왜? 그 동아리 들어가고 싶어 했잖아?"
"동아리 선발 기준이 춤이라고 해서 포기했어요."
"코딩 동아리에서 웬 뜬금없는 춤?"
"그러니까요. 코딩 동아리에 들어가고 싶지만, 선배들이 실력이 아닌 춤으로 선발하는 건 옳지 않은 것 같아서 포기했어요."
그래서 나는 아이가 '동아리 활동을 하지 않을 건가 보다.'하고 지레짐작했었는데, 결국은 스스로 코딩을 공부하는 동아리를 만들어 1년 넘게 동아리를 운영했던 것 같다.
아이가 코딩 동아리를 직접 만들어 운영했다는 사실은 거의 1년이 지난 후 알게 되었는데, 2학년 1학기에 정보 수업이 편성되어 있다는 소식을 접한 엄마들이 "OO이도 같이 수업 들을래요?"라고 제안을 해주셔서 아이에게 의향을 묻다가 알게 되었다.
사실 나는 아이 아빠도 코딩을 어느 정도 하던 사람이라, 아빠한테 배우는 게 좋을지, 친구들과 같이 학원이나 과외를 하는 게 좋을지를 물어보려고 한 것이었는데, 이미 아이의 코딩 수준이 "정보 수업"을 충분히 해나갈 정도가 되어 있었다.
"코딩 초보이면서 친구들을 어떻게 모았던 거야?"
아이가 코딩 동아리를 직접 만들었다는 것을 뒤늦게 접하고 어떻게 동아리를 만들고 운영했는지가 궁금해서 물었더니, 코딩을 진짜 잘하는 친구를 제일 먼저 섭외하고, 그 친구를 중심으로 코딩 스터디 그룹을 구성했다고 했다. 하지만, 코딩을 제일 잘하는 친구에게만 의지하면 그 친구가 부담스러울 테니까 코딩을 잘하는 친구의 도움을 받되 본인도 열심히 공부해서 동아리장으로서의 역할과 책임을 다했고, 동아리 부원이 되어준 모든 친구들이 동아리를 통해 무언가를 얻어갈 수 있게 도우려고 노력했다고 했다.
"우와, 대단하다. 엄마 같았으면, 길이 없는 줄 알고 그냥 돌아 나왔을 텐데, OO이는 스스로 길을 만들었구나!"
아이는 1년간의 동아리 활동으로 리더로서의 자질도 갖추게 되었고, 코딩 실력도 남 못지않게 늘었던 것 같다. 덕분에 그 당시 2학년 1학기에 편성되어 있던 정보수업은 아이에게 보너스 같은 수업이었다. 1등급을 받은 건 당연했고, 정보시험과 과제로 친구들이 시간을 투자할 때, 다른 과목을 공부할 만큼의 여유도 생겼던 것 같다.
물론, 자율동아리 개설이 처음부터 정보수업을 겨냥했던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워낙 관심이 많았던 분야였고, 또 일찍부터 그런 분야에 능통했던 친구들이 있다 보니, 그 친구들과의 협업으로 실력을 키워나가게 된 케이스라 재능 많고 능력 있던 과학고 친구들 덕을 많이 본 것 같다.
아이의 만족도와 별개로, 나도 아이가 과학고에 입학하고 난 후, 학교가 마음에 쏙 드는 부분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아이의 알레르기와 학습적인 부분에 대한 케어였다.
첫 번째 만족요소는 급식실 조리사님들과 영양사 선생님이 해주신 아이의 알레르기 케어였다.
초등학교 때도 그랬고, 중학교 때도 그랬고,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고 나면, 아이에 대한 정보를 적어야 하는 서류가 있었는데, 거기에 항상 "들깨 알레르기"에 대한 정보를 적어 보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학교에서 아이의 "들깨 알레르기" 정보를 눈여겨보지 않아서, 나는 아이에게 급식을 먹을 때마다 들깨가 있는지부터 확인하고 대처하라고 신신당부를 했었다.
그런데, 과학고에 입학한 후, 첫 점심식사 시간에, 제일 마지막에 식사하는 1학년이 들어서자, 영양사 선생님께서 울 아들을 찾았다고 했다.
"혹시 1학년 O반 OOO 왔니?"
"네, 제가 OOO입니다."
"네가 들깨 알레르기가 있는 친구구나? 선생님이 확인했으니 앞으로 내가 조심할게."
아이로부터 그 말을 전해 듣고 너무 감사했는데, 그날 이후 실제로 국이나 반찬에 들깨가 나오는 날엔, 들깨를 넣기 전에 울 아들 것부터 먼저 따로 빼놓고 난 후, 들깨를 풀거나 섞었다고 했다. 그래서 울 아들이 점심을 먹으로 내려오면, 조리사님 또는 영양사 선생님께서 들깨가 들어가지 않은 국 또는 반찬을 꺼내주셨다고 했다.
얼마나 감사하던지...
전교생이 200명 남짓으로 소수정예(?)라 그렇게까지 해 줄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조리사님들과 영양사 선생님의 세심한 배려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했다.
들깨 알레르기 케어는 아이가 졸업할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아이가 2학년에 올라가서 보니, 후배 중에도 들깨 알레르기가 있었는지, 따로 챙겨놓은 국 또는 반찬이 두 그릇이었다고 했다.
영양사 선생님께서도, "들깨 친구가 한 명 더 늘었다?"라고 하시면서 웃으셨다고 했다.
두 번째 만족요소는 아이의 학습적인 부분에 대한 선생님들의 케어였다.
울 아들의 경우, "사교육 없는 자기주도학습"을 계속해 왔기 때문에 공교육의 시스템 속 선생님들의 도움이 매우 절실하게 필요했다.
중학교 때까지는 그래도 내가 아이의 스터디 메이트가 되어서 공부 방법을 알려주고, 공부 루틴을 만드는 것을 도왔었다(제11화 참조). 하지만, "왜?"라는 의문을 달고 사는 아이에게 합리적이고 정확한 답을 알려주기보다 바쁜 일정을 핑계 삼아 아이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것이 늘 안타까웠었다.
그런데, 아이가 과학고등학교에 간 이후부터는 아이의 "지적 호기심"을 학교 선생님들께서 해결해 주셔서 너무 좋았다. 물론, 선생님들께서도 아이의 질문에 답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던 것 같긴 했다.
학부모 상담이 있던 날, 1학년 담임 선생님께서 아이에 대해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OO이가 교무실 문을 열면, 모든 선생님들이 긴장을 하셨어요. 누굴 찾아왔을까 서로 눈치를 보고 있다가 OO이가 한 분을 콕 집어 다가오면, 다른 선생님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시는 걸 여러 번 봤습니다."
선생님 말씀으로는 아이의 질문이 매우 창의적이었고, 매우 심도 있었으며, 가끔은 고등학교 수준을 넘어서는 생각들로 가득 찬 경우가 많아서 힘들었다고 하셨다. 특히, 시험 문제나 수행평가의 오류를 짚으러 올 때면, 방어하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고도 하셨다. 최대한 설명하고 설득해서 아이를 돌려보내긴 하지만, 간혹 "이런 건 고등학교 수준에선 이게 답이야."라고 밖에 대답하지 못할 때는 자괴감이 들더라는 이야기를 다른 선생님들께서도 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아이가 어떤 학교 생활을 하는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아이의 당돌함(?) 까지도 선생님들께서 예쁘게 봐주시는 것이 이 학교와 이 학교에 부임해 오시는 선생님들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아이도 이런 환경 속에서 점차 적응해 가면서, 첫 번째 중간고사 시험 준비를 착실히 해 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