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고 생활(5)
중간고사가 끝난 이후, 1학년들 분위기는 다른 학년들과는 달리 겉으로 보기에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비만 오면 물이 고이고, 잡초가 나던 텅 빈 운동장이 점심식사 시간과 저녁식사 시간마다 운동하고 뛰어노는 1학년들 때문에 북적였고, 중간고사 시험 결과가 나왔음에도 분위기가 가라앉지 않아 예민한 2, 3학년 선배들을 자극했다.
하지만, 엄마들 사이에서는 1학년들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아이들이 세부류로 나눠지는 듯했다. 조기졸업과 조기진학이 가능한 아이, 조기진학과 3학년 진학 사이의 경계에 있는 아이, 그리고 3학년 진학이 확정되었다고 생각하는 아이.
아직 중간고사 성적만이 나왔을 뿐인데도, 학원의 공포 마케팅 레퍼토리인, "중간고사 등수를 뒤집는 학생은 본 적이 없다."를 정설로 믿는 듯했다.
학교에서는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사이, 다양한 행사들을 치르느라 분주했다.
1학년부터 3학년까지 각 반이 한 팀(1학년 1반, 2학년 1반, 3학년 1반이 한 팀)이 되는 체육대회도 했고, 울 아들이 과학고에 오는데 큰 영향을 끼쳤던 입학설명회도 있었다. 1학년 학생들이 강사로 참여하는 동구 창의적 과학 체험교실도 열려, 주말에 학교에 나가 인근 초등학생과 중학생들에게 다양한 과학 지식을 전달하는 역할도 했다.
그런 와중에, 아이들은 저마다 목표를 세우고 수행평가와 기말고사 공부에 매진했다.
특히, 중간고사 성적이 조기진학과 3학년 진학 사이의 경계에 위치한 아이들의 치열한 경쟁이 시작되었는데, 울 아들도 성적을 조금 더 올려 조기졸업이든, 조기진학이든 안정권에 들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 같았다.
아이 아빠는 아이의 중간고사 성적을 보고 대견해하면서도, 몇 가지 당부를 잊지 않았다.
"OO아, 힘든 과학고 생활을 잘 견디려면, 3가지를 꼭 기억했으면 좋겠다. 체력관리, 시간관리, 그리고 멘탈 관리."
"와, 명언인데?"
아이 아빠는 아이에게 이 3가지가 왜 필요한지를 설명해 주었고, 실제로 아이가 과학고 생활을 하는데 도움이 많이 된 말이었다고 한다.
첫째, 체력관리.
울 아들의 경우, 학기 초반 원인 모를 열이 올라 응급실에 몇 번가기도 했고, 체력적으로 힘들었는지 몸살을 앓기도 했다. 인후염이 생기고, 감기에 걸리고, 피곤함을 못이기도 했는데, 그래도 우리가 우려했던 일들은 일어나지 않고, 아이가 잘 버텨낸 것 같다.
아이 아빠는 아이에게 틈틈이 운동을 해서 체력을 길러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건강을 한번 잃어본 적이 있는 아이도 아빠의 말을 명심하고 그 바쁜 학교 생활 중에서도 운동을 자주 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친구 엄마들이 아이가 과학고를 갔는지 체육고를 갔는지 모르겠다고 했던 학기 초반, 나도 울 아들의 학교생활 대부분이 운동으로 채워져 있어 의아하긴 했다.
"이번 주에는 뭐 했어?"
"월요일에는 반대항 축구를 했고요, 화요일에는 우리 반 애들이랑 농구했어요. 수요일 점심시간에는 선생님들이랑 배드민턴을 쳐서 제가 이겼고요. 목요일에는 우리 반 OO이가 헬스 가르쳐준다고 해서 저녁 먹고 헬스 하다가 자율학습을 했어요."
"그래... 잘했구나..."
나는 아이가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 아니 운동하는 것이 내심 마음에 들었지만, 운동까지 실력을 키우려고 너무 열심히 할까 봐 조금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반 모임에 나갔다가, 엄마들로부터 뜻밖의 이야길 들었다.
"OO이가 그렇게 운동을 잘한다면서요?"
"OO이가요?"
"울 아들이 그러는데, OO이는 축구, 농구도 잘하지만, 배드민턴은 적수가 없을 정도라던데, 아니에요?"
"아~, 뭐 배드민턴은 제대로 배웠으니 그럴 수도 있는데, 축구랑 농구를 잘한다는 건 금시초문이네요."
초등학교 때 방과 후 수업으로 배드민턴을 오래 배웠다 보니, 아이의 배드민턴 실력은 확실히 남달랐던 것 같다. 결국, 과학고에서는 2, 3학년이 주로 참여하던 대구시 고교 배드민턴 대회에, 1학년으로는 처음 학교 대표로 발탁되어 대회에 다녀오기도 했다. 물론 등수에는 들지는 못했지만, 선배들과 함께한 새로운 경험이고 도전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축구와 농구는... 아이가 좋아하긴 했지만, 잘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과학고 내에서는 꽤나 잘하는 축에 들었던 것 같다.
어쨌든, 운동을 좋아하고 잘하는(?) 아이다 보니, 차츰 아이의 건강상태도 좋아졌고, 교우관계도 무난했으며, 체력적으로 힘든 2년간의 시간들을 잘 버텨낸 것 같다.
두 번째, 시간관리.
중간고사 치기 전까지, 아이는 월 ~ 금요일까지 수업을 해내고(과학고에서는 해내고라는 표현이 정확한 것 같다.), 일과가 끝나면 친구들과 운동을 잠시 한 뒤, 저녁식사 후 자율학습 시간 1부엔 과제, 2부엔 그날 수업의 복습(대부분은 수학 위주)을 했다고 한다. 어떤 날에는 과제가 너무 많아서, 학습계획이 흐트러지는 날도 있었지만, 그래도 최대한 해보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하지만, 중간고사가 끝난 이후, 수행평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할 일이 자꾸 쌓이고 공부에 투자할 시간이 줄어들자 어떻게 하면 정해진 시간 안에 효율적으로 공부할 수 있을지를 꽤나 고민하는 것 같았다.
아이 아빠는 아이에게 과학고의 방대한 공부량을 소화하려면 지금의 공부방식을 조금 업그레이드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길 해줬다.
"시간은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져 있는데, 누구는 이만큼 해내고, 누구는 이것밖에 못해내는 건 시간 관리의 차이라고 생각해. OO이는 누구보다 건강이 중요하니, 잠을 줄이려고 하지 말고, 깨어있는 시간을 어떻게 하면 최대로 활용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보는 게 좋겠다. 그리고, OO이의 공부방법이 틀린 건 아니지만, 다른 친구들은 어떻게 효율적으로 공부하는지도 눈여겨보면서 너의 공부방식을 업그레이드해 보는 게 좋겠다."
아이는 아빠의 조언을 귀담아듣고, 학교에 가서 친구들은 어떻게 공부하는지, 자신의 공부방식을 어떻게 바꿔보는 게 좋을지 고민을 한 것 같았다. 실제로 그 이후 공부방식에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일단, 너무 바쁜 과학고 생활로 잠시 방치되었던 다이어리 쓰기를 다시 시작한 것 같았다. 어릴 때부터 습관들인 방법(제03화 참조)이라 금방 제자리를 찾았고, 단기 목표와 장기 목표를 세워놓고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을 적어놓기 시작했다.
아이가 써놓은 다이어리를 보면, 어떤 날에는 하루 일과가 다이어리 두 페이지를 넘어가기도 했는데, 각각의 날에 반성과 다짐, 자신을 격려하고 응원하는 글들을 적으면서 자신이 세워놓은 계획들을 다 소화하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그리고, 친구들의 공부방식 일부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변형하여 자기주도학습을 업그레이드하는 것 같았다. 아이가 한 공부방법 중 가장 내 눈에 특이하게 보였던 것은 "마인드맵"을 그리는 것이었다. 중간고사 치기 전까지는 "문제집을 어디까지 풀고, 학습지를 어디까지 하고, 교과서는 어디까지 본다." 하는 것에 중점을 둔 공부방식이었다면, 이후에는 각 과목별 챕터 하나마다 A4 한 장씩을 준비해서 자신이 공부한 것들, 개념과 중요 내용을 정리해 나가는 마인드맵 그리기에 중점을 두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저렇게 하는 게 공부가 되나 싶었는데, 아이는 마인드맵을 그려보면서 자신의 강점 부분이 뭔지, 자신의 약점 부분이 뭔지를 명확하게 찾아 공부의 집중도를 높이는 것 같았다.
세 번째, 멘탈 관리.
"혹시 OO 이는 학원의 도움이 필요하진 않니?"
학기 초, 아이들이 주말에도 학원을 다닌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이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음... 학교 수업이 이해가 되지 않으면, 학원을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근데, 일단 저는 학교 수업 자체는 이해가 되니 굳이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들을 필요는 없는 것 같고,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래서 좀 많이 느리긴 해도, 저 혼자 공부하는 게 저한테는 맞는 것 같아요."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여러 번 느꼈지만, 확실히 울 아들은 내 생각보다 단단하고 멘탈이 강한 아이였던 것 같다.
하지만, 아이 아빠는 아이에게 멘탈 관리에 대한 중요성도 다시 한번 짚어 주었다.
"이번 중간고사 성적이 기대이상이라 고무적이긴 하지만, 긴장을 늦추지 말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멘탈 관리가 필요할 것 같구나. 분명 성적 때문에 멘탈이 흔들린 친구들도 있을 것이고, OO이의 성적이 계속 유지되리라는 보장도 없으니, 최선을 다해되 결과는 겸허히 받아들이고 네 계획대로, 네 목표대로 다음 스텝을 밟아 나가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중간고사 이후, 멘탈이 무너진 아이들이 속출하면서, 학교 분위기가 한동안 꽤 어수선했다. 친구 엄마들로부터 소식을 접한 나도 마음이 참 착잡했다.
"우리 반 OO이가 전학을 가기로 결정했다네요. OO이도 지금 전학을 가야 하나 고민 중이라고도 하고요."
그 해, 대구일과학고등학교 역사상 중도 포기하는 학생 수가 역대급으로 많았었다. 보통은 1명 내지 2명 정도가 첫 중간고사 이후 전학을 택하는데, 겉으로 드러나기에는 전혀 변화가 없는 것 같았던 1학년 4~5명이 중도포기를 선언했었다. 더군다나 2학년 중에서도 중도 포기를 하는 학생이 나와 학교에서도 입장이 많이 난처했던 것 같다.
과학고에서의 중도 포기는 아이들 입장에서는 "실패"라고 느끼는지, 꽤 상처를 많이 받는 듯했다. 아이 스스로 그만두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부모님들이 "과학고에서 공부를 계속하다가는 내신으로 좋은 대학을 가는 건 힘들겠다."라는 판단으로 결정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 것 같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학을 간 아이들이 성공하는 케이스(인 서울 대학 합격 등)도 종종 나오기 때문에 아이의 성향과 멘탈을 잘 고려해 전학을 가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소문에 의하면 과학고를 중도 포기하는 경우, 대구시에 있는 여러 학교들에서 영입 제안이 들어온다고 한다. 일반고에서 개설해 놓고 있는 우수 인재반이나 서울대반, 의대반 같은 특별 혜택을 제안하면서 편입하기를 권한다고 하니, 과학고생의 우수성을 인정받으며 학교 생활을 할 수 있어, 과학고 첫 중간고사로 무너진 멘탈을 회복하는 데에도 좋은 기회가 될 것 같기도 하다.
과학고 중도 포기를 결심하지 못하고, 결국 3학년까지 진학한 아이들 엄마 중에는 3년 내내 "아이를 중도 포기 시켜야 하는 게 아닐까?" 하고 고민하는 분도 계셨다. 간혹, "일반고에 갔더라면 더 잘했을 텐데, 과학고에 와서 꼴찌를 한다."며 한탄하는 엄마들도 봤다. 물론, "우리 OO이는 공부 빼고 학교가 너무 좋다네요. 그래서 "중도 포기"하자는 말을 못 했어."라거나, "나는, 이왕 하위권으로 확정된 거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똑똑한 친구들 많이 사귀는 것도 큰 자산이니 학교 생활 즐기라고 했어요."라며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시는 분들도 계셨지만, "중도 포기"를 고민하는 경우 십중팔구는 아이의 과학고 입학이 아이의 성향을 고려한, 혹은 아이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저 중학교 때 성적이 우수해서, 선생님들의 권유로 지원했고, 합격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과학고 입학에서만큼은 "동기부여(제13화 참조)"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아이 아빠가 아이에게 당부한 "멘탈 관리"는 멘탈이 무너지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한번 무너진 멘탈을 다시 끌어올리는 회복탄력성, 자존감이 높은 아이들이 가지고 있다는 그 회복탄력성도 포함하고 있었다.
2년간 아이의 과학고 생활을 지켜보면서 느낀 건, 과학고는 자존감이 높은 아이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정글 같은 곳이었다. 징글징글했다.
[과학고에서 살아남는 아이들(ft. 개인적 의견)]
1. 동기부여가 확실한 아이들
무엇보다 과학고에 온 이유가 확실한 아이들은 과학고의 힘든 상황들을 잘 견뎌내는 것 같다.
성적이 좀 떨어져도, 다른 곳(실험이나, R&E 수업 등)에서 즐거움을 찾으며 과학고 생활을 해나가고, 결국에는 이공계열 대학들로 진학했다. 반면, 중학교 때 성적이 우수하다는 이유만으로 과학고에 진학한 경우에는 중도 포기를 선택하거나 학교 생활 내내 방황하는 경우가 많았다.
2. 이과적 성향이 강한 아이들
간혹 과학은 못하고 수학만 잘해서 걱정이라는 부모님들이 계신다. 내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수학만" 잘하는 아이들은 과학고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매우 높다. 과학의 모든 기초가 수학에서 나오기 때문에, 과학은 과학고를 다니면서 보완해도 된다. 또한 학교 교육과정에 수학 시수가 매우 많아서, "수학만" 잘하는 아이들은 다른 성적이 좀 떨어져도 만회가 가능하다.
3. 응용력이 뛰어나고 창의적인 아이들
중학교 때까지는 교과서나 문제집의 문제 풀이 정도로 내신 성적을 올리는 것이 가능하지만, 과학고에서는 단순 문제 풀이만으로는 성적을 올리기가 쉽지 않다. 응용력이 필요한 문제들도 많고, 창의적인 해법을 내놓는 아이들이 많아서, 중학교 내신이 아무리 뛰어나도 인문학적 감성이 더 강한 아이라면, 과학고는 맞지 않은 것 같다.
4. 공부 외 특기가 있는 아이들
숨통이 막히고 답답함을 느낀다는 과학고 생활을 잘 견뎌낸 아이들을 보면, 공부 외 한 가지 이상의 특기를 가진 경우가 많았다. 울 아들처럼 운동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수준급 실력의 피아노 연주, 바이올린 연주 등 악기를 다룸으로써 자신만의 힐링 포인트를 찾는 아이들도 있었다. 아이들의 이런 특기를 잘 살릴 수 있도록 학교에서도 다양한 이벤트(간이 연주회 등)를 마련하기도 하니, 특기 하나씩은 갖고 있는 것이 과학고에서 살아남는데 필요한 요소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