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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y Way Dec 26. 2024

방황의 시간

과학고 생활(6)

과학고에서의 첫 중간고사 이후, 친구들 몇 명이 학교를 떠나면서 1학년들 사이에 어수선했던 분위기가 감지되었지만, 곧 수행평가 지옥이 펼쳐지자 모두들 자신 앞에 놓여 있는 것들을 해결하느라 주변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던 것 같다. 

울 아들도 주중, 주말, 심지어 기말고사 전날까지 수행평가를 치느라 힘들어했고, 성적을 좀 더 올리겠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기말고사 공부까지 병행해서 하다 보니 공부에 푹 파묻혀 살았던 것 같다. 


기말고사를 치른 후, 학교는 또 한바탕 회오리바람이 불어닥쳤다. 

기말고사 성적은 따로 나오지 않았고, 대신 중간고사와 수행평가, 그리고 기말고사 성적이 합쳐진 1학년 1학기 전체 성적이 공개되었는데, 상위권의 성적은 큰 변동이 없었지만, 조기진학과 3학년 진급 사이의 경계에 해당하던 학생들의 약진으로 1학년 1학기 최종 등수에 꽤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한마디로, 학원의 공포 마케팅 단골 레퍼토리였던 "중간고사 등수를 뒤집는 학생을 본 적이 없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울 아들의 경우도 중간고사 때 20등대 후반이던 성적이 꽤 많이 올라, 아이가 원하던 "안정권"을 넘어 조기졸업까지도 넘볼 수 있는 성적을 받아왔다. 게다가 그 당시 교과별로 5%에 해당하는 아이들에게만 준다는 교과우수상도 한 과목 받아왔다. 

덕분에 아이는 2학기 공부에 대한 자신감이 붙고, 자신의 공부방법에 대한 확신이 생긴 것 같았다. 우리도 아이가 과학고등학교에 잘 적응하고 있다는 것에 안도했고, 어쩌면 조기졸업 혹은 조기진학으로 2년 만에 과학고를 탈출(?)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졌었던 것 같다.


그런데, 생각보다 쉽게 얻은(?) 아이의 성적은 결국 독이 되고 말았다.

물론, 아이가 한 학기 동안 얼마나 노력했는지, 얼마나 힘들게 공부했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성적이 노력의 대가로 받은 정당한 결과라는 것에는 이의가 없지만, 우리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성적이 쉽게 나와 버린 것도 사실이었다. 그만큼 울 아들이 똑똑했던 건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이도 스스로 "해볼 만한데?"라고 생각하며 좀 안일해진 것 같았다. 


짧은 여름방학이 끝나고 1학년 2학기가 되자, 1학기때와는 전혀 다른 공부가 시작되었다. 

일반고의 1학년 수업을 한 학기 만에 끝내버린 과학고에서는 2학기부터 물리학 II, 화학 II, 고급 지구과학, 고급 생명과학 등 일반고의 고2, 고3 수준 이상의 수업을 진행했다. 

사교육 없이 공부를 하고 있던 아이는 기출문제집, EBS 교육방송 등의 자료를 더 이상 구할 수 없게 되자, 학교 수업과 학교에서 해주는 방과 후 수업에 매달려 공부하기 시작했고, 여전히 자신만만하게 혼자 공부해 보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그런데, 주말에 집에 와서 공부하는 모습이 1학기때와는 사뭇 다르게 보였다.

주중에는 학교에서 어떻게 공부하고 있는지 사실 알 도리가 없으니, 주말에 아이의 모습만으로 판단하는 것이긴 했는데, 왠지 집중도 잘 못하는 것 같고, 중간고사 공부할 때는 전혀 관심조차 없던 "휴대폰"에 신경을 쓰는 것 같기도 했다.


의지는 불태우는데 실행이 안 되는?

공부와는 별개의 생각이 너무 많은 것 같은?

사춘기인가 싶게 인생에 대해 너무 깊은 고찰을 하는 것 같은?


주말마다 그런 아이를 보면서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나는, 내가 도울만한 일은 없나 싶어 아이와 이야길 나눠보려고 시도했다. 

그런데...


"알아서 할게요."

"신경 쓰지 마세요, 할 거예요." 


솔직히, 아이의 반응이 너무 섭섭했다. 

내가 잔소리를 한 것도 아니고, 대화를 나눠보자고 한 거였는데, 아예 대화를 차단해 버리는 대답이었기 때문에 더 속상했던 것 같다. 

'이 중요한 시기에 설마 사춘기가 온 건가?' 


아이는 1학년 2학기 중간고사를 치고 나서 떠나는 "세계 우수 교육, 연구기관 탐방 학습"에 더 관심이 있는 듯했고, 중간고사 코앞까지 아이의 방황은 계속되었다.


'저러면 안 될 텐데...'

아이의 모습이 안타까웠지만, 대화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있는 아이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래서, 계속 속만 태우고 있었는데, 아이 아빠가 보기에도 아이의 상태가 어딘가 모르게 어수선해 보였는지 하루는 날을 잡고 따끔하게 충고를 해주는 것 같았다.


"OO이의 목표가 조기졸업? 조기진학이라고 했었나?"

아이의 아빠는 공부하라는 잔소리가 아니라, 아이의 목표지향적인 성향을 자극하는 충고를 해주는 것 같았다. "힘든 과학고를 빨리 벗어나는 길은 조기졸업이나, 조기진학뿐!"이라던 아이의 말을 다시 한번 되짚어 주면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래서 지금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등을 아이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 같았다. 

평소에 잔소리를 지양해 왔던 아빠라서 그런지, 아빠의 말은 귀담아듣는 듯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몸과 마음, 머리와 행동이 따로 노는 듯하더니, 아빠의 충고에도 행동이 바로 교정되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결국, 아이는 과학고 입학 이래 최악의 준비상태로 시험을 쳤고, 결과는... 참담했다.

1학기 성적이 아이에게 독이 되는 순간이었다. 

성적이 너무 안 나오면 좌절할까 봐 걱정했는데, 성적이 너무 잘 나오니까 또 이런 문제가 있을 줄이야... 


아이도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스스로의 공부법에 자신이 생겼고, 이 정도 하면 이 정도 수준까진 나오더라 하는 기준이 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너무 자만했고 오만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았다. 특히나, 자신만만해하던 국어 성적이 많이 미끄러진 것을 보고, 이 학교에서는 대충 해서는 절대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예 만회하지 못할 만한 성적은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남아있는 수행평가와 기말고사에서 성적을 최대한 끌어올리면, 1학기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조기진학 등수에는 포함되지 않을까 하는 정도의 성적을 받아왔다. 


학교에서는 1학기와 2학기 등수 판도가 또 달라졌다. 

아이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공부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방증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성적이 많이 오른 친구들 뒤로 전 과목 과외 중이라는 소문이 따라다녀 사교육이 얼마나 성행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중간고사 이후, 충격을 받아 끝없이 추락할 것 같았던 아이는 "세계 우수 교육, 연구기관 탐방 학습(미국 서부 쪽)"을 다녀온 후, 다시 힘을 내기 시작했다. 1학년 1학기 성적은 아이에게 독이 되었지만, 1학년 2학기 중간고사 성적은 아이에게 새로운 자극제가 되었다. 조금 느리긴 했지만, 차츰 정신을 차리고 원래의 페이스를 찾아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이의 방황이 그리 길진 않았던 것 같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 하루하루 애가 탔다. 

아이가 학교에 가있는 주중에는 잠시 잊고 지내다가도, 주말에 집에 와서 방황하고 있는 아이를 보는 게 너무 힘이 들었다. 그때 내가 힘들었던 이유는 아이가 공부에 집중하지 않는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결과로 받게 될 성적이 아이에게 상실과 좌절을 줄까 봐였던 것 같다. 회복탄력성이 좋은 아이지만, 그 과정이 쉬운 과정은 아니니, 되도록이면 그런 괴로움은 겪지 않았음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이런 방황과 시련이 있었기에 아이가 한 뼘 더 성장했던 게 아닐까 한다. 


1학년 2학기 최종 성적이 나온 날, 1학년 담임 선생님께서는 희망자에 한해 학부모 상담 창구를 열어주셨다. 

당연히, 나도 희망했지만, 조기졸업과 조기진학 여부 같은 민감한 질문에 대해서는 두리뭉실하게만 대답해 주셔서 아이의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다만, 1학년 2학기 중간고사에 비해 기말고사 성적이 꽤 많이 올랐다는 말씀을 해주셔서 일단은 아이가 정상 궤도에 진입했다는 사실에 안심했다. 


아이의 1학년 2학기 성적을 정확하게 알게 된 건, 2학년 때 수시원서를 넣기 위해 2학년 담임 선생님과 입시 상담을 하면서였다. 그때 본 아이의 1학년 2학기 종합 성적은 중간고사 성적만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뜬히 조기졸업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을 것 같은 성적이었다. 그만큼 기말고사를 위해 아이가 얼마나 열심히, 이를 악물고 공부했을지를 보여주는 결과인 것 같아서 그 성적을 보면서 울컥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에필로그]


과학고 아이들 중에서는 "세계 우수 교육, 연구기관 탐방 학습" 때문에 입학했다는 아이가 있을 정도로 이 행사는 과학고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2~3년간 이 행사가 잠시 멈추었었다.). 

매년 학부모 설문을 통해 미국 서부를 갈 건지, 동부를 갈 건지, 일본을 갈 건지 등을 정했는데, 울 아들 기수에서는 "미국 서부"가 압도적 1위를 차지해 CALTECH 대학 캠퍼스 투어, 그리피스 천문대 방문, 로스앤젤레스 고등학교와 교류행사, UCLA 대학 투어 및 데니스 홍 교수 특강, 스탠퍼드 대학 캠퍼스 투어 및 토마스 리 교수 특강, 인텔 박물관, 애플 스토어 & 구글 스토어 방문, UC 버클리 대학 캠퍼스 투어, 그랜드 캐년, 데스벨리 국립공원, 요세미티 국립공원, EXPLORATORIUM 과학관 방문 등을 하고 왔다. 


약 7박 10일간의 기간 동안 아이들을 인솔해 간 선생님들께서 아이들 사진을 계속 업로드해 주셔서 아이들 상황을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알 수 있었는데, 자세한 상황은 한 반에 2~3명씩 있던 여학생들 엄마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 

다들 아시겠지만, 대부분의 남자아이들은 엄마들에게 연락도 잘 안 하고 사진도 보내주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을 멀리 보내고 나니 좀 답답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울아들은 그나마 남자아이치고는 연락을 하는 편이었지만, 사진은 도통 보내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연락이라도 주니, 얼마나 다행이야.'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스리고 있는데, 여학생 엄마들이 딸들이 보내준 사진들을 공유해 주신 거였다. 그 사진에는 자신뿐만 아니라 친구들을 찍은 사진도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남학생 엄마들은 그 사진 속에서 각자 자신의 아들들 행방을 찾고, 귀퉁이에라도 아이가 나와 있으면 사진들을 줍줍 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나도 마찬가지였고.

에효, 남자들이란...


1학년때 하는 가장 큰 행사이자, 마지막 행사였던 "세계 우수 교육, 연구기관 탐방 학습" 이후, 아이들은 추억에 젖을 새도 없이 금방 일상으로 돌아와 다시금 공부와 사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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