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고 생활(4)
"이제 곧 중간고사 기간이 돌아올 텐데, 지금부터 1학년 어머님들은 마음 단단히 먹으셔야 합니다. 아이들이 중학교 때까지 받았던 점수는 이제 잊으세요. 저희 학교 수학 평균이 30점이거든요."
학교운영위원회 회의에 처음 참석한 날, 회의 후 다과회에서 교감 선생님께서 중간고사 이야길 하셨을 때만 해도 좀 놀라긴 했어도 실감 나진 않았다. 그런데,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선배 엄마들의 증언이 이어지면서 조금씩 마음이 무거워졌다.
"작년 이맘때, 듣도 보도 못한 성적에 진짜 충격이었죠."
"맞아요. 애가 충격을 너무 받아서 뭐라 말은 못 했는데, 저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어요."
"중간고사 끝나고 난 뒤, 학교 분위기도 장난 아니었었죠."
"어땠는데요?"
"침통, 우울, 적막? 거의 기말고사 칠 때까지 학교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아서 선생님들이 힘들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정도라고???'
고등학교 1학년 1학기 중간고사는 과학고뿐만 아니라 모든 고등학교에서 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험이다. 왜냐하면 이 시험을 통해서, 현재 내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를 파악할 수 있고, 대학 입시의 기준을 삼을 테니까.
그래서, 학원에서도 "1학년 1학기 중간고사 시험 성적이 과학고 / 고등학교 3년을 좌우한다."는 말(제20화 참조)을 공포 마케팅 단골 소재로 삼는 듯했다.
3월 한 달, 아이들이 학교에 적응하느라 어수선했던 분위기가 중간고사가 가까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차분해졌고 아이들은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선생님들께서는 아이들의 멘탈 관리를 위해서인지 "작년 기수들 첫 중간고사 수학 평균이 30점이었다."라는 이야기를 심심찮게 하시는 듯했다. 그리고 학부모들에게도 틈만 나면 가정통신문이나 학부모 교육 등을 통해 중간고사 이후의 상황을 신신당부하셨다.
"어머님들. 아이들이 중간고사 성적을 받고 나면, 아이들도 충격을 받지만, 어머님들도 생전 처음 받아보는 성적에 멘붕들이 오실 겁니다. 그리고 정말 진지하게, 어렵게 들어온 과학고를 포기하고 일반고로 전학을 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고민들을 많이 하십니다. 일단, 가장 큰 충격을 받는 건 아무래도 아이들일 테니, 학부모님들께서는 아이들부터 먼저 보듬어 주시고, 향후 문제들은 담임 선생님과의 면담을 통해 신중히 결정하시길 바랍니다."
중간고사 시험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어찌나 주변에서 중간고사 이후의 상황에 대해 경고들을 하는지, 저절로 아이의 중간고사가 신경 쓰이고 걱정되었다.
울 아들도 슬슬 중간고사 준비를 시작하는 것 같았다. 약 3주 전부터 공부 계획을 짜더니 2주 전부터는 본격적으로 시험공부에 올인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 같았다. 다른 친구들은 학원에서 준비해 준 대구일과학고등학교 중간고사 기출문제들을 풀면서 시험 준비를 했지만, 울 아들은 선생님들께서 나눠주신 학습지와 가지고 있던 문제집들을 풀면서 혼자 공부를 해 나갔다.
그런데, 아이의 계획과는 달리 시험공부에 올인해도 모자랄 그 2주 동안, 시험공부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 같다. 중간고사 범위를 넘어서까지 진도가 나가는 과목들은 중간고사 시험과 별도로 복습을 해놔야 했고, 각 과목별로 내주시는 과제며 팀 프로젝트 등은 시험과 별개로 해 내야 하는 것들이었다. 온전히 시험공부만 할 수 없게, 해야 할 일들이 계속 쏟아져 나오자, 아이가 진짜 시간을 쪼개고 쪼개고 또 쪼개는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울 아들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는지, 급기야 기숙사 완전 소등시간(제21화 참조) 이후에도 공부를 하기 위해 무선 스탠드, 간이 책상, 에그 무선 공유기 등을 몰래 설치해 밤늦게 까지 공부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울 아들도 친구들처럼 늦게까지 공부하고 싶다며 무선 스탠드와 간이 책상 등을 원했지만, 우리는 사주지 않았다.
"기숙사에서는 잠만 자면 좋겠어. 중3 때처럼(제17화 참조) 무리하다가 큰일 날까 봐 그래. 너도 이해하지?"
아이도 우리가 반대하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했는지, 그 이후부터는 자신의 체력 안배를 위해 최대한 일과시간을 쪼개서 공부를 했고, 기숙사에서는 친구들이 공부를 하든 말든 잠을 자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가 2학년이 된 후에는, 다른 아이들처럼 기숙사 도둑 공부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생겨버렸다(해당 이야기는 곧 발행 예정).
어찌 되었든, 아이의 첫 중간고사 준비는 정말 힘들었던 것 같다.
금요일 집으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주중에 어떤 공부를 했는지, 중간고사를 위해 어떻게 공부했는 지를 이야기해 주곤 했는데, 실제로 그게 가능한가 싶을 정도로 정말 빡빡한 생활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주말에 집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 주중에 어찌했을지 상상이 될 정도로 의자와 한 몸이 되어 시험공부를 해나갔다.
'진짜, 대단하다. 울 아들.'
그런데, 나중에 들어보니, 아이가 이 시기에 견뎌낸 부담감은 내가 상상하는 그 이상이었던 것 같다.
공부도 공부지만, 해야 하는 공부량과 어려운 내용을 시간 내 해결해야 하는 압박감에 가슴이 꽉 막힌 것 같았고, 심장이 두근거리는 불안 증세가 나타났던 것 같다. 그리고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과 잘 해내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갈등을 겪으며, 의자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몸을 의자에 묶어두고 공부한 적도 있다고 했다. 중학교 때는 시험공부를 하면서도 휴대폰과의 전쟁(제14화 에필로그 참조)을 치렀던 것과는 달리, 과학고에 들어오고 난 후부터는 휴대폰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시험공부, 특히 수학공부를 하면서, 중학교 때 느꼈던 똑같은 문제, "스킬이냐, 개념 이해냐"에 부딪혀 딜레마에 빠지기도 했다. 다른 아이들은 학원에서 배운 방법, 즉 문제 푸는 스킬을 익혀 빠르게 문제들을 풀어나가는데, 울 아들은 중학교때와 똑같이 개념을 이해하고 문제를 풀어나가는 방식이다 보니, 문제 이해력은 좋을지 모르겠지만, 속도면에서는 다른 친구들을 따라갈 수 없어, "다 못 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온갖 부담감을 이겨내는 힘든 시간을 거쳐, 드디어 과학고에서의 첫 중간고사를 치는 날이 되었다.
그 당시 아이의 첫 중간고사 시험은 월, 화, 수 3일간으로 잡혀 있었기 때문에 그전 주였던 금요일부터 주말 내내 집이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우리는 아이 공부에 행여 방해가 될까 싶어 TV도 켜지 못했고, 나는 때때마다 소화 잘되고 입맛이 돌만한 음식들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고3 입시생을 둔 집이 이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층간 소음도 신경 쓰이는 그런 주말이었다.
중간고사 시험이 끝나고 난 후, 학교에서는 "그냥 하루"라는 행사를 했다.
디지털 기계로부터 벗어나 아날로그식 휴식을 취하는 것이 이 행사의 취지였는데, 그날만큼은 공부만 빼고 뭐든지 할 수 있는 그런 날이었던 것 같다. 시험 뒤끝에 맞이한 여유로운 시간을, 아이들은 마음껏 만끽했던 것 같다. 앞으로 닥칠 중간고사 결과는 일단 접어두고 친구들과 보드게임을 하거나 운동을 하거나 취향이 맞는 친구들과 어울려 그냥 놀거나, 기숙사에서 잠을 자는 등 다양한 활동들을 했고, 모두들 만족스러워했다.
그로부터 1주일 후, 드디어 시험 결과가 나왔다.
시험결과가 나온 날은 마침 금요일이라, 아이를 데리러 학교에 갔는데, 아이들이 각자 캐리어와 흰색 봉투를 하나씩 들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아니, 그 봉투가 뭐라고 아이가 밖으로 나왔는데, 내 눈에 흰색 봉투만 보이더니 가슴이 두근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미 중간고사 치기 전에, '그 어떠한 경우라도 놀라지 말자.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 아이가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지 알면서, 결과에 실망하는 건 아이에 대한 배반이다.'라고 다짐했건만, 실제로 결과지를 받고 보니 평정심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집으로 출발하기 전에, 성적표를 확인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이미 결과를 알고 있을 아이의 표정을 살피면서 일단 집으로 출발했다. 아이도 평소와 다르게 성적표가 들어 있는 흰색 봉투를 손에 든 채 얌전히 창밖을 보고 있더니, 차분하게 이야길 하기 시작했다.
"엄마, 저는요. 중간고사 치기 전까지 과학고 공부에 적응하기 위해 엄청 노력했어요. 근데 과학고에서는 학원 도움 없이 혼자 공부한다는 것이 중학교 때보다 훨씬 힘들었던 것 같아요. 수업 진도를 나가기 시작하면서 해야 할 공부도 많아지고, 점점 어려워졌고요, 주변에 보니까 수학이나 과학 분야에서 넘사벽인 애들도 진짜 많더라고요. 그래서, 최선은 다해되, 시험 등수와 성적에는 연연하지 말자고 다짐했었어요."
"그랬구나."
"중간고사 시험을 다 치고 나서는, 수업은 이해하기 쉬웠는데, 시험은 진짜 어렵구나 하고 느꼈고요, 친구들도 다들 시험이 어려웠다고 말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중간고사를 망쳤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80명 중에 60등만 해도 나름 선방한 거다 하고 생각했어요."
"60?"
아이가 "예상 등수"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60"이라는 숫자를 듣는 순간, 절대 당황하지 말아야지 했던 내 결심은 사라지고, 심장이 쿵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60"이라는 숫자는 생전 처음이라 점수로도 와닿지 않는데, 이 60이 등수라니...
나도 이런데, 울 아들은 지금 어떤 기분일까 도대체가 가늠이 되질 않았다.
운전하는 틈틈이 곁눈질로 아이의 표정을 살폈는데, 얼굴로만 봐서는 어떤 생각인지, 어떤 기분인지, 어떤 마음인 건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넌 어때?"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오만가지 생각 끝에, 아이에게 물었다.
마음이 어떻냐고 물은 건지, 그 성적을 받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물은 건지, 사실 나도 정확하게 모르겠다. 그냥 그렇게 물었는데, 아이가 의외의 답을 했다.
"이 성적이면 80명 중 60등쯤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성적이 생각보다 잘 친 거더라고요."
"엥?"
"성적표에는 전체 등수가 안 나와 있는데, 선생님께 개인적으로 찾아가면 대략적인 등수(몇 등부터 몇 등 사이 정도의 정보)를 알려주신다고 해서 갔다 왔어요. 사실은 선생님께 등수 여쭤보는 거 너무 부끄러웠는데, 그래도 현실을 빨리 아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여쭤봤는데, 지금 이 성적이 20등대 후반이래요. 조기진학이 가능한 성적이요."
"진짜?"
아이가 전체 등수가 알고 싶었던 이유는, 과학고의 경우 1학년 1, 2학기 성적만으로 조기졸업과 조기진학 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이었다(해당 이야기는 곧 발행 예정). 조기졸업과 조기진학 대상자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 조건들이 필요하긴 한데, 다른 조건을 다 만족한다고 하더라도 해당 등수 안에 들어야만 하기 때문에, 아이들 입장에서는 지금 이 처참한(?) 성적이 어느 정도의 수준에 해당되는지 알고 싶은 거였다.
집에 와서 아이가 내민 성적표를 봤는데... 정말 놀라웠다.
"이야... 점수가... 이야... 근데, 이게 20등대 후반이라고? 이야..."
아이는 자신의 예상 등수보다 훨씬 잘한, 그것도 조기진학 가능성이 있는 성적을 받았음에도 얼굴에 큰 변화가 없었다. 다만 집으로 돌아오는 차속에서부터 집에 와서까지 이야길 조곤조곤하는 걸 보니, 나름 흥분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제 공부가 틀린 건 아니었나 봐요. 이제 기말고사 준비도 자신 있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이왕이면, 조기진학이라도 안정권에 들고 싶어요."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든 생각은 리스펙!
1학기 중간고사가 끝난 후, 울 아들은 다시 평소처럼 수업을 열심히 집중해서 듣고, 복습을 하고, 과제를 하고, 수행평가를 준비하는 일상으로 돌아갔다.
반면 친구들은 성적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기 시작했다.
일단, 한 학원에 다니는 학생 두 명이 1, 2등을 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아이들이 우르르 그 학원으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과외 자리라도 알아보기 위해 평소 친분이 없던 사람들도 돼지엄마(?) 주변으로 모였다. 과학고다 보니 국어와 영어에서 점수를 다 깎아먹는 아이들도 생겼는데, 그런 아이들은 학원을 더 다닌다거나 과외를 받는다거나 했고, 아예 전 과목 과외를 시키는 등 중간고사 이후 학부모님들이 많이 술렁였던 것 같다.
다만, 대구일과학고등학교 1학년 교실에는 역대 처음으로 중간고사 이후에 나타난다는 침통, 우울, 적막함이 없었다. 아이들은 중간고사를 끝낸 그날도, 성적표가 배포된 날도, 어김없이 나가서 축구를 했다고 한다. 이 학교에 오래 근무하셨던 선생님들은 1학년들의 이런 반응에 매우 놀라워하는 분위기였고, 결국 2, 3학년 학생들이 선생님들께 민원까지 넣었다고 한다.
"선생님, 1학년들 미쳤나 봐요. 너무 떠들어서 공부가 안 돼요."
"OO아, 이 문제, 어떻게 푼 거야?"
중간고사 수학 시험 후, 수학 선생님께서 울 아들과 친구 1명을 교무실로 불렀다고 한다.
아이도 마침 배점이 꽤 높은 서술형 문제의 풀이과정이 본인이 쓴 것과 달라 선생님께 여쭤보려던 참이어서 서둘러 교무실에 가봤더니, 선생님께서 전교생 중에 울 아들과 함께 온 친구, 2명만 이 문제를 다르게 풀었다고 하셨단다.
"이 풀이과정은 생각하지 못했던 방법인데, OO이(울 아들)와 OO이(친구)가 풀어놓은 걸 살펴봤더니 충분히 가능한 풀이과정이라 맞는 답으로 처리했다. 단, OO이(울 아들)는 전제나 조건까지 완벽하게 정리된 풀이과정이라 점수를 다 줬고, OO이(친구)는 전제나 조건이 빠져 있어서 일부 감점했다. 둘 다 너무 잘했다."
알고 봤더니, 다른 친구들은 모두 학원에서 배운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 모두 같은 풀이과정과 답을 써냈지만, 울 아들과 친구 한 명은 수학 학원을 다니고 있지 않아서,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해 문제를 풀었던 것 같다.
만약, 다른 학교였다면, 이 문제 정답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을까?
물론, 받았을 수도 있겠지만, 과학고처럼은 아니었을 것 같다. 선생님께서 일반적이지 않은 아이들의 문제 풀이를 허투루 보지 않고 직접 검토하셔서, 그 풀이 방식에 오류가 없음을 인정하시고, 창의적인 접근과 풀이를 칭찬해 주신건 과학고였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아이의 성향이 울 아들과 비슷하다면 과학고에 보내는 것도 아이의 미래를 위해 좋은 선택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물론, 아이는 많이 힘든 학교 생활을 하게 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