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1
습작-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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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한 점 없는 이국의 하늘을 바라본다. 왜 구름 한 점 없을까. 구름 없는 배경은 좀 심심한 것 같다. 급하게 화구 상자를 털고 일어선다. 내 앞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방문한다는 미술관이 장엄하게 서 있다. 나는 마치 통과의례처럼 그곳을 향해 신중히 걸어간다. 나는 화가다. 그래서 이곳에 왔다. 물론 화가라면 한 번쯤 방문해야 할 것 같은 미술관이서만은 아니다. 그저 잠시 한국을 떠나고 싶었고, 자연스럽게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어릴 적부터 가보고 싶었던 루브르 박물관이다. 파리에 도착한 지 나흘이 되어서야 나는 이곳에 찾아온다. 사실 다른 관광지는 가볼 생각도 없었을 뿐더러, 아직 여행 기간이 며칠 더 남아 있어 첫날부터 목적지에 다다르고 싶은 생각이 없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작품들에게 시선을 거둔다. 그리고 어두운 요새를 찾아 걸어간다. 중세 유럽, 루브르 궁전이었던 그곳에서 사람들이 가장 숨기 편했던 요새. 예를 들면 자신의 신분을 한탄하는 궁녀들이 숨어서 이야기하거나 내연녀를 그리워하며 다른 병사들과 줄레줄레 껄껄거리던 그 한적한 곳을 찾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의 모든 비밀을 털어놓을 생각이다. 숨길 필요가 없었던 과거의 다짐과 현재의 계획 모두 요새에서 털어버리고, 그 비밀대로 살아가고 싶다. 사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별 볼일 없는 비밀이다.
그 요새로 바삐 향하고 있는데, 한 아랍 여자가 보인다. 요새로 가는 작은 통로에는 여러 개의 데생 작품이 걸려 있는데, 그 여자가 한 작품을 드레지게 쳐다보고 있다. 한 눈에 봐도 아랍 여자가 맞다. 머리를 빙빙 두르고 있는 빨간 두건은 아랍인이 사용하는 히잡이 분명하니까. 나는 그 여자가 바라보고 있는 작품을 쳐다본다. 누드화다. 반쯤 벗은 아랍여자가 그려져 있다. 제목은「반쯤 벗은 아랍 여자 상체에 대한 두 습작」. 작가는 테오도르 샤세리오. 대학 시절 서양미술사를 수강할 때 들어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고대 유물 같은 흑갈색 보석 목걸이를 착용한 내 옆의 여자, 아랍 여자. 그녀가 내게 말을 걸어온다.
“왜 화가는 저 여자만 반쯤 벗은 모습으로 그렸을까요?”
같은 작가의 주위 작품들을 둘러본다. 그녀 말처럼 다른 누드화의 모델은 전라 상태인데, 이 작품의 모델만 반나체이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그녀의 눈을 바라본다. 보라색과 청록색이 겹친 아이섀도, 긴 속눈썹. 만화 여주인공 같다. 디즈니랜드 인어공주 같은 빼어난 미모다.
“글쎄요. 아무래도 저 여자가 아랍여자다 보니.”
취업 때문에 배워두었던 영어가 생각보다는 잘 터진다. 어법이 틀렸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녀도 알아들었는지 끄덕거리며 피식 웃는다.
"난 당신을 알아요."
나는 멋쩍게 웃었다. 그녀는 나에 대해 무엇을 안다는 것일까. 내가 별 볼일 없는 화가라는 것? 별 볼일 없는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것?
“난 당신이 굉장히 낯설어요.”
나는 화구 상자를 뒤로 숨기며 수줍게 대답한다. 그녀는 큰 눈으로 빤히 쳐다보더니 이내 미소를 머금으며 말한다.
“그래요? 그럼 나랑 한 잔 하지 않겠어요?”
박물관에서 나와 그녀의 뒤꽁무니를 따른다. 맑았던 하늘은 저녁 어스름과 함께 구름으로 뒤덮이고, 곧 소나기가 내릴 것만 같다. 나는 그 습한 이국의 냄새를 따라 두 블록을 더 걷는다. 그녀는 쿠라니라는 살롱에 한 발짝 들어가서 내게 들어오라 손짓을 한다. 나는 잠시 주춤한다.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 잘 모르겠다. 왜 이 아랍 여자를 따르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녀를 따라 살롱의 내부로 들어간다. 유럽풍의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온다. 여자는 이 살롱이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술집이라 소개한다. 맞닿은 모든 상황이 생경하다. 동아시아 남자와 아랍 여자의 만남도 어색한데, 유럽의 살롱에서 술 한 잔이라니. 마치 모든 것들이 오래된 필름 카메라의 영상처럼 보인다. 지지직거리는 장면과 툭툭 끊기듯 이어지는 음성들, 살롱의 클래식 배경 음악. 모든 것이 이상하다. 나는 간신히 자리에 앉아서 그녀에게 묻고 싶었던 것을 묻는다.
“당신이 나를 안다고요?”
그녀는 살롱의 늙은 마담에게 다가가 앉더니 아주 이상한 부탁을 한다. 자기를 보고 첫눈에 반한 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주면 술값을 두 배로 준다는 것이다. 마담은 그 말을 믿지 않는다. 그녀는 잠시 인상을 찌푸리다가 흰색 차도르에서 무언가를 꺼내 마담의 주머니에 넣는다. 그러고는 말을 해주면 그만큼을 더 주겠다고 한다. 마담은 눈을 반짝이며 나를 쳐다본다. 그리고 목청을 가다듬으며, 탁한 음성으로 말한다.
“자기 나라에서 숨기던 걸 왜 여기 와서 버리려 그래. 그대로 가져가. 그 낡은 상자에 있는 것들 말이야.”
나는 화구 상자를 의자 뒤로 숨긴다. 그때 여자가 서서히 다가와 앉는다. 그녀는 히잡을 벗어서 내려놓는다. 큰 눈과 오뚝한 콧날, 눈두덩 위부터 눈썹 바로 아래까지 화려한 원색으로 칠해진 아이섀도와 퍼플 컬러의 펄 터치가 눈에 들어온다. 그녀는 마치 무도회 가면을 쓴 듯한 얼굴에 새침하게 웃고 있는 터라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이 되지 않는다.
그녀는 나의 나이와 이름을 묻는다. 그리고 내가 그리는 그림과 한국에서 하는 일을 묻는다. 내가 왜 이 여자에게 나에 대해 말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술술 말해준다. 마치 이 여자와 알음이 있었던 것처럼. 그녀는 내 사적인 생활을 마땅히 알 권리가 있다는 표정으로 조금씩 가까이 다가온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입김은 살롱 내부에 친숙한 공기를 조성한다. 그녀는 그 어떤 저항감도 없게 자기 존재의 증명을 보인다. 나는 내 이야기만 늘어놓고 결국 그녀에게 아무것도 물어보지 못한다. 그리고 이제는 알 것 같다. 그녀는 날 알고 있던 것이 아니라 알 수 있었다는 것을.
그녀가 의자 뒤에 놓은 화구 상자를 배꼼 바라본다. 나는 아직 파리에서 한 장의 그림도 그리지 않았다. 아니, 아직 그리지 못했다. 화구 상자는 루브르 궁전의 요새에서 처음 열어봐야 한다. 그곳에서 뭐라 튀어나올지 나도 아직 예상하지 못한다.
“사람을 앞에 두고 그림을 그린 적이 있나요?”
그녀가 묻는다. 그럼요. 나는 께느른하게 대답한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자신을 잠깐 도와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녀의 눈빛에서 언젠가 나도 당신에게 똑같은 도움을 줄 테니 하는 무언의 약속이 느껴진다.
*
그녀가 사는 곳은 쿠라니 살롱과 루브르 박물관 사이이다. 중세 건축 양식으로 지어져 운치가 있지만 꽤나 낡은 집이다. 이미 밤은 이슥하고, 소나기가 잠시 왔었는지 습하다. 술기운이 조금씩 올라온다. 그녀의 뒷모습에서 잘 빠진 여인네 몸매의 선이 느껴진다. 나는 그녀가 이곳에 어떻게 왔는지, 무엇을 하는지, 심지어 이름이 무엇인지도 물어보지 못한다. 하지만 자책하지 않는다. 그녀는 왠지 그런 물음을 좋아할 것 같지 않다. 좋아하지 않을 걸 하지 않는 것은 나의 배려다. 이층에 올라서 나무문을 열자 그녀의 방이 드러난다. 그녀는 작은 옷장을 열고 착용하던 빨간 히잡을 벗어 넣는다. 옷장에는 수십 개의 알록달록한 히잡과 차도르가 보인다. 옷장을 닫자 옷장 문 주위로 작은 먼지들이 잠시 부유한다. 그녀는 조명을 조금 줄이고, 나를 바라본다.
“이제 그 상자를 열어야 하지 않나요?”
나는 망설인다. 이곳은 루브르의 요새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계획이 아니다.
“도와주세요. 도와주기로 했잖아요.”
그녀는 눈을 감는다. 나는 물끄러미 낡은 화구 상자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지퍼를 돌린다. 퍽퍽하고 아득하다. 그 안의 모든 것들이 숨죽여 있다. 그래봤자 몇 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 안의 것들은 미라처럼 숨죽은 채 그대로다. 마치 상자 안이 진공 상태였던 것처럼. 나는 창문 앞에 자리 잡는다. 그녀는 이미 침대 위에서 나체인 상태로 앉아 있다. 모로 앉아 나를 쳐다본다. 젖가슴은 보이지 않고, 잘록한 허리선이 도드라진다. 나는 당황스럽다. 하지만 그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 자연스럽게 물을 한 모금 넘긴다. 목젖이 떨리는 것을 그녀가 알아채지 못하게 고개를 숙이며. 이것이 그녀를 도우는 일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는다. 반쯤 열린 창문 사이로 습기가 차오르고, 방 안의 것들이, 화구 상자 안의 것들이 조금씩 젖어간다.
그녀는 나를 바라본다. 트레머리가 잘 정돈되어 있다. 큰 눈과 오뚝한 콧날, 진한 눈썹과 색조화장이 강렬하다. 침대에 가벼이 오른 그녀의 얇은 손가락에는 금장 꽃무늬 반지가 빛나고, 그녀의 등에 있는 날개 문신은 그녀의 작은 움직임에 따라 조금씩 흔들린다. 나는 물감을 섞고, 섞는다. 섞을수록 그녀의 색처럼 점점 진해진다.
“박물관의 그 아랍 여인처럼 흑백으로 해주세요.”
그녀가 넌지시 말한다.
“……당신은 채색화가 더 어울려요.”
나는 궁싯거리는 어눌한 말투로 말한다.
“아니요, 왠지 흑백의 그림이 더 오랜 세월을 견딜 것 같아요.”
나는 팔레트를 내려두고 연필로 바꿔든다. 그녀의 빛나는 모든 것들을 검은 음영에 맞춰 넣는다. 하지만 선은 선명하게, 진하게 꾹 눌러 그린다. 참으로 아름다운 몸이다.
“나는 어릴 적 아랍 이야기를 보고 자랐어요.”
술기운이 점점 더 차고 들어와서 정적을 깨고자 말을 건다. 일요일 아침이면 봤던 디즈니 만화동산을 떠올린다. 아라비안나이트에서 나온 많은 만화들. 신밧드, 알리 바바, 알라딘. 내가 보고 따라 그렸던 나의 첫 모델들.
“그 얘기를 왜 하는 거죠?”
그녀는 만난 후 처음으로 정색하며 묻는다. 순간 연필심이 부러진다. 조심스레 그녀를 바라본다. 큰 눈에 가려져 있던 물 망울들이 번져간다. 마치 조금씩 울어왔던 것처럼.
“당신을 보니, 생각이 나서요. 그 만화들에 나왔던 아름다운 여자들이…….”
나는 내가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여자는 다시 옷을 입는다. 다행히 뒷모습 크로키는 완성이 되었던 차이다. 하지만 그녀는 앞모습도 그려주길 원했다. 하지만 나는 다시 그녀에게 말을 걸지 못한다. 그녀는 이미 모든 몸을 다 가려버린 상태다.
“그 이야기들은 한 여자가 살기 위해서 만든 이야기들이에요.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만든 이야기.”
그녀가 계속 말을 잇는다. 마치 민담 같은 이야기인데, 그 또한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올 법한 것들이다. 과거 페르시아 왕은 자신의 왕비가 흑은 노예와 관계를 맺은 것에 격분한다. 그 후 새로운 법령을 내려 하룻밤에 하나씩 미인을 맞았으며, 그 다음 날 아침이면 사형에 처하기로 한다. 이 전대미문의 법률로 인해 딸을 가지고 있는 부모들은 공포에 떨고, 일부는 국외로 도망친다. 이때 한 여인이 스스로 왕의 침실로 들어가 왕에게 이야기를 해준다. 그것들이 아라비안나이트의 이야기들이다. 왕이 그 이야기를 듣다가 날은 밝아 온다. 왕은 계속 듣고 싶어 여인을 하룻밤 더 살려두고, 그 다음 하룻밤도 살려두다가 여인의 탁월한 말솜씨에 넘어간다. 결국 왕은 그 여인을 왕비로 맞아들이고 법률을 없애기로 한다.
“당신은 이 이야기가 한 여인의 성공담으로 들리나요?”
나는 고개를 끄덕거릴 듯 움찔대다가 그만둔다.
“그래서 달라진 것은 무엇이죠?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 것뿐이잖아요.”
나는 그녀의 옆에 앉는다. 그녀가 흐느끼며 툭툭 던지는 말을 듣고 최대한 덥절덥절하게 대답한다. 순간 나도 모르게 그녀의 흐벅진 손을 끌어 잡는다. 그러고는 내 쪽으로 거칠게 끌어당긴다. 나는 마치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듯한 두려움을 예상했으나 그녀의 살결은 생각보다 더 보드랍다. 그녀는 ‘노’라고 대답한다. 그럴수록 나는 그녀와 더욱 밀착된다. 노, 노. 그녀는 계속 ‘노’를 외치다가 결국 내 품 안으로 조용히 들어온다. 나는 그녀의 눈을 본다. 방의 조명이 새벽의 수증기를 통과하여 그녀의 눈빛을 감싼다. 그리고 그 빛은 겹쳐질수록 점점 옅어진다.
밖에서 빗소리가 조금씩 들려온다.
*
나는 결국 루브르 박물관에 다시 가지 않은 채 비행기에 오른다. 그녀의 방이 요새였고, 내 화구 상자는 이미 그곳에서 열렸다. 그뿐이다. 나는 아직도 그녀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녀가 모로코 여자라는 것과 어느 마을에서 산다는 것. 이름이 ‘라일라’라는 것. 그 다음 날, 또 다음 날 두 번째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찾아갔지만, 그녀는 살롱에서도 방 안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결국 예정대로 예정된 날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간다.
라. 일. 라. 그녀의 이름처럼 처음과 끝이 맞닿지 못한 채 나는 파리를 떠난다. 비행기가 이륙한다. 이제는 다시 한국이 목적지가 된다. 나는 구름 아래로 사라져가는 파리를 끝까지 지켜본다. 그리고 눈을 감는다. 돌아갈 그곳이 조금씩 떠오른다. 아주 어릴 적, 내 의식의 처음과 맞닿은 그때부터.
초등학교 시절, 나는 같은 학년의 친구들과 함께 국기 게양대 앞에 줄을 선다. 모든 학생들이 어디서 배웠는지도 모른 채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한다. 새 학기를 맞아 국기를 세탁했는지, 국기가 세재 냄새를 솔솔 풍기며 바람에 펄럭인다. 우리가 교실로 들어가자 텅 빈 운동장에 국기만 홀로 남는다. 아직 꽃샘추위가 위력을 다하던 때라 바람이 불면 국기는 천둥처럼 큰소리를 낸다. 나는 아근바근 벌어진 창문을 꽉 끼워 닫는다. 자리에 앉아 스케치북을 편다. 체육시간이지만, 체육을 하지 않는다. 줄넘기 경진 대회가 코앞이지만, 담임선생님은 임신 중이라 미술 공부를 시킨다. 물론 우리도 추운 날씨에 나가고 싶지 않다. 선생님은 항상 우리에게 요구한다. 뱃속의 아기에게 보여줄 예쁜 그림을 그려달라고.
그 후부터 교실 창문에는 울긋불긋한 그림들이 꽃처럼 만개한다. 나는 그리면 그릴수록 그림이 점점 좋아진다. 체육 시간이지만 밖에 펄럭이는 국기처럼 추위에 떨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나는 내 동생에게 보여줄 그림을 그릴 수 있다. 그것은 굉장히 신기하고도 설레는 일이다. 내 그림을 봐주는 첫 번째 사람이 태어나지도 않은 내 동생이다.
기내는 점점 조용해진다. 나는 동생에게 그렸던 첫 번째 그림을 떠올려본다. 떠오르지 않는다. 동생은 지금 그 어디에도 없다. 아니 이 비행기 어딘가에 앉아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있다. 나는 파리를 떠나기 전 아침 밥상에서 주고받은 부모님의 대화를 떠올린다. ‘힘 써야 하는데 빵 쪼가리 하나 차려놓고?’, ‘그게 쓰레기는 아니잖아요.’ 그 두 분은 지금도 그 빵 쪼가리 하나 때문에 다투고 있을까.
두 분의 화법은 항상 저렇다. 어머니는 그 시절에 나름 명문대를 졸업하고 임용고시에 합격한 인재였고, 아버지는 중학교만 간신히 졸업한 지방 시골의 농부였다. 어머니는 학교 동아리를 통해 아버지가 살았던 그곳으로 여행을 떠났고, 그 둘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할 끌림으로, 사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치기 어린 성욕으로 관계를 맺는다. 그래서 나를 낳고, 동생을 임신한다. 어머니는 그것이 자신 인생의 최고의 실수라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배우지 못했고, 자신과 같은 부류라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두 사람이 대화하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다. 대부분 냉장고에 포스트잇으로 의사소통을 한다. 그래서 사실 소리 내어 두 사람이 다투고 있는 게 오히려 낫다. 내가 냉장고를 열 때마다 유치하게 날이 서 있는 두 사람의 대화를 볼 필요는 없다.
아주 예전의 일이다. 동생을 유산한 후 어머니는 잠시 교직을 떠나고, 아버지는 공사판에 뛰어든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남들에게 아버지를 건설 컨설턴트라 소개하고, 아버지는 공사판에서 주워들은 잡 지식으로 자신의 직업을 그나마 잘 포장한다. 어머니 말로는 그렇다. 하지만 가족이란 공동체에서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다. 나는 학창 시절의 전부를 미술을 꿈꾸는 데에 소비하고, 대학에 진학했지만 그 누구에게도 환영 받지 못한다. 어머니가 체육 시간에 미술을 시키지만 않았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다고 우겨도 본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이미 곪아 있었다. 그리고 나는 항상 생각했다. 어차피 안 풀릴 끈은 삭아서 끊어지길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난 왜 이것을 하면 안 돼요?"
나는 주변에서 알아듣지 못할 크기로 읊조린다. 한국에 돌아가면 부모님께 처음으로 하고 싶었던 말. 하지만 나는 지금 그 말을 할 수가 없다. 아직도 그 말을 다시 할 수 있다는 자신이 없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몇 개의 공모전에서 수상한다. 하지만 그것이 내게 화가라는 직함을 만들어주진 않는다. 나는 몇 개의 수상경력으로 크지 않은 디자인 회사에 취업한다. 그 자리의 유지마저도 쉽지 않아 토익 공부를 일 년 넘게 두고 공부한다. 그때부터 나는 나름 만족하며 살고, 가끔씩은 부모님을 만나 위로해 줘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어느 날 회사에 어려움이 생기고, 다른 회사 면접을 봐도 좋다는 말을 듣는다. 나는 가장 먼저 어머니를 찾아간다. 나는 그것이 나름 내 길로 다시 선회할 수 있다는 기회라고 판단한다. 학창시절 이후 열어보지 않은 화구 상자를 들고 어머니를 찾아간다. 하지만 어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 후 나도 닫힌 엄마의 각방을 굳이 열지 않는다. 부정적인 생각들이 이미 얼굴의 근육으로 굳어진 사람. 그 사람이 공사장에 나가는 늙은 아버지에게 차린 빵 쪼가리를 보며 나는 파리로 출발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