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2
습작-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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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시대를 견딘 듯한 오래된 사원의 흙벽이 아무도 모르게 깎인다. 운동화를 신었지만 발을 꼼지락거릴 때마다 흙먼지가 발가락 사이로 파고든다. 나는 지금 아랍의 땅에 서 있다. 메모할 것도 없는 그녀에 대한 적은 정보만을 가지고 이곳에 왔다. 사하라의 건조함이 영향을 끼치고 있는 모로코, 마라카쉬. 다시 파리로 갈 생각으로 푼푼이 모아온 돈을 이곳 오는 데 썼다. 파리를 다녀온 후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것, 무엇보다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 때문에 나는 이곳에 서 있다. 라일라를 만나야 한다. 그녀에게 완성하지 못한 두 번째 데생을 전해야 한다. 화구 상자에서 흙먼지를 툴툴 털어내고 앞으로 나아간다.
모로코는 현재 라마단 기간이다. 내가 알기로 그들은 한 달간 해가 떠있는 동안에 물도 마시지 않으며 금식을 한다. 사람들의 눈빛이 자못 날카로우면서 드레지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눈치껏 몸짓, 발짓을 하며 라일라가 말한 마을에 도착한다. 어떠한 남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맘껏 얼굴을 감싼 여자들만 보인다. 나는 라일라를 찾는다. 모든 여인들이 히잡과 발목까지 내려오는 차도르를 입고 있다. 이 건기의 날씨에 장갑과 스카프까지 착용한 사람들도 있다. 아지랑이 같은 흙먼지들이 발목을 잡는다. 나는 한 발짝 두 발짝 늪 같은 그 공기를 헤쳐 나간다. 그때 한 차례의 낯선 바람이 스쳐지나가고, 어떤 남자가 나에게 다가온다. 그는 어눌한 영어로 크게 소리치며 나에게 말을 건다.
“좋은 약이 있습니다.”
“미안해요. 바쁩니다. 사람을 찾아야 해요. 급하거든요.”
나는 잽싸게 모로 시선을 돌린다. 그는 이악하게 들러붙어 따따부따 내 귓속에 알 수 없는 아랍어를 소리친다. 나는 그 사이에서 몇 개의 영어 단어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그것을 조합해본다. 나는 다시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본다.
“찾는 걸 도와준다고요?”
그는 굉장히 흥분한 상태로 말을 잇는다. 마치 누가 보면 싸움을 거는 것처럼 착각할 정도다. 그는 안주머니에서 하얀 알약들이 담긴 봉지를 보인다. 그게 무슨 약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얼마냐고 묻고, 그는 의뭉한 표정으로 말한다.
“선물이니 그냥 가져가십시오.”
나는 그가 말한 것을 다시 해석하느라 주춤댄다. 그는 호탕하게 웃는다. 나는 그에게 얻을 것이 더 많다는 생각에 돈을 주겠다고 말한다. 그가 얼마를 줄 수 있는지 묻는다. 나는 바지 주머니에서 손어림을 해본다. 나는 그중 절반도 안 되는 금액을 꺼내며 갖고 있는 전부라고 말한다.
“그거에 두 배는 줘야 합니다. 적어도 당신이 다 꺼내지 않은 돈을 더 꺼내십시오.”
머리가 띵하다. 그에게 지독한 냄새가 나는 듯하다. 어리친 기분에 정신이 몽롱해진다. 나는 그에게 주머니에 있는 모든 돈을 건넨다. 그가 따라오라며 나선다. 빠른 발걸음의 그를 놓치지 않으려 수많은 남자의 어깨를 뚫고 뛰다시피 그를 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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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남자가 알려준 집이 보인다. 마치 사원처럼 멀리서도 식별할 수 있다. 남자는 바쁜 일이 있다며 뒤돌아선다. 나는 그가 왠지 의심스러웠지만, 그를 따라가지 못한다. 체력이 달린 상태이고, 괜히 놓쳤다가는 다시 이곳에 찾아오지 못할 것만 같다. 라일라. 크게 불러 보려다 만다. 어스름도 짙어진 상태고, 내가 먼저 그녀의 모습을 보고 싶다. 사원 같은 으리으리한 집은 꽤나 분위기가 있다. 대문으로 올라다는 길은 좁은 듯한 언덕인데, 나무가 양쪽으로 우거져 주변보다 더욱 어둡다. 대문에 점점 다가서자 사막 쪽에서 불어온 건조한 바람이 인다. 대문이 개방되어 있어 들어서자 그 안에는 하얀 대리석으로 계단을 만들어져 있다. 굉장히 깔끔하다. 현대식으로 리모델링으로 한 것 같지만 그래도 고풍적인 분위기가 든다. 대문에 들어서면 보이는 고목들에는 군데군데 벗겨진 나무껍질 옷을 입고 있다. 나무 밑동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앉았는지 움푹 팬 커다란 흔적이 있고, 텃밭으로 보이는 여러 채소들이 알록달록하게 색감을 맞춰주고 있다. 인기척을 따라 조금씩 내부로 들어가 본다. 문은 모두 개방되어 있다.
현관에 들어서자 응접실로 보이는 공간이 드러난다. 카펫이 깔려져 있고, 그것과 어울리지 않는 고급 가죽 소파와 최신 노트북, 카페 의자들이 보인다. 한 늙은 여자가 보인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다. 그녀는 내가 이국인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조금은 당황하다가 이내 다시 안으로 들어간다. 그곳에는 히잡을 쓴 여러 여인들이 나온다. 나는 라일라를 찾는다. 그 눈빛을 찾는다. 하지만 그곳에는 라일라가 없다. 그 중 한 명이 나에게 영어를 할 줄 아느냐고 묻는다. 나는 그렇다고 답한다.
“인샬라, 기도 중이어서 손님을 맞지 못했어요. 죄송합니다. 어떻게 오셨죠?”
“라, 라일라를 찾습니다.”
그녀는 조금 경계하더니,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한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악수를 청한다.
“인샬라, 이슬람 여자는 함부로 남자와 악수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라마단 기간이고요.”
멋쩍게 손들 내린다. 다른 여자들은 나를 소파에 앉힌다. 그녀들은 대화 중에도 기도를 한다. 알라, 스브한 알라…….
나는 여인들의 안내에 따라 집안 둘러본다. 부엌과 같은 사생활 구역에도 가보고, 심지어 침실도 둘러본다. 나는 왜 이곳을 둘러보는지 알 수 없다. 그저 파리에서 라일라 살롱으로 안내했던 것처럼 생경하게 느껴진다. 나는 그저 집을 소개하는 것이 이 나라의 전통인 듯한 눈치로 움직인다. 굳이 눈에 들어온 것들은 벽에 걸린 미술 작품들뿐이지만, 나는 그 액자에 담길 라일라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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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령의 여인이 내 앞에 선다.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히잡과 차도르로 감춰진 그 여인을 바라본다. 나는 이 여인이 라일라라는 것을 안다. 그녀가 나를 쳐다본다. 나는 열이 난 것처럼 몸이 부다듯해진다. 라일라는 순간 내 눈빛을 다시 피한다. 우리는 한 마디도 서로 나누지 못한다. 그녀는 조용히 다시 밖으로 나간다. 많은 여인들이 라일라를 향해 알라를 외치고, 나는 가년스럽게 그녀의 뒤를 따른다.
나는 그녀를 따르며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러본다. “라일라!”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숙인 채 언덕 아래로 내려간다. 그녀의 검은 의상 때문에 실루엣조차 희미해질 무렵 그녀가 갑자기 걸음을 멈춘다.
“도대체 이곳에 왜 온 거죠?”
“당신과 약속한 걸 다 지키지 못해서…….”
나는 말끝을 흐린다.
“그러면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죠?”
라일라의 목소리도 조금씩 떨리고 있다.
“당신과 함께 한 그날 밤, 당신은 취한 채로 나에게 말했어요. 모로코로 돌아갈 거라고.”
라일라는 다시 앞을 보더니 계속 해서 내려간다. 조그만 마을이 나오고 그녀는 낡은 판자와 함석으로 엮어진 작은 문을 통해 허름한 집으로 들어간다. 그녀는 탁자 앞에 나를 인도하고 부엌으로 들어간다. 몇 분인지도 모를 정적이 지나고 그녀는 음식을 차려 탁자 위에 놓는다. 이 허름한 집에 어울리지 않게 꽤 성대한 음식들이다. 마치 마지막 남은 가축 한 마리를 잡은 것처럼. 나는 그녀가 날 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긴장이 풀리고, 처음으로 그녀를 향해 웃음을 지어 보인다. 허기진 참이라 고기 한 점을 들고 씹는다. 달큼한 향내가 입안을 파고든다. 그녀가 자리에 조용히 앉더니 말을 건다.
“식사가 끝나면 서둘러 당신 나라로 떠나요.”
나는 벌떡 일어나 그녀의 손을 잡는다. “노!” 그녀가 외친다. 그녀가 순간 신음을 내며 뒤로 내뺀다. 나는 파리에서처럼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그녀의 손을 잡는다. “노! 노!” 그녀가 괴력의 힘으로 나에게서 몇 발자국 멀어진다. 라일라는 나에게 살기 어린 눈빛으로 말한다.
“넌 그저 파리에서 실수로 튀겨버린 길가의 구정물이야.”
“라일라…….”
“구정물에는 보이지 않는 찌꺼기들이 있어. 넌 그 작은 찌꺼기들 중 하나라고.”
나는 화구 상자를 그녀 앞에 둔다.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치우라고 소리친다. 그녀는 단호하게 쳐다보며 말한다.
“돈은 얼마나 있지? 너도 아랍 여자를 사러 온 거 아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최대한 동정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가 다시 한번 소리친다.
“아무런 얘기하지 마. 파리에서도, 지금도 내 대화 상대는 네가 아니라 내가 만든 너일 뿐이야. 너는 나에 대해 누구에게도 말할 권리가 없어.”
라일라. 나는 조용히 그녀의 이름을 내뱉는다. 그러곤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다시 말한다.
“너에 대해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아. 나는 당신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왔을 뿐이야.”
라일라는 주저앉는다. 눈물을 훔친다. 나는 그 눈물을 닦아줄 용기를 낼 수 없다. 그녀가 더 흥분하는 걸 원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말한다.
“라일라, 당신이 원한다면 파리에서 함께 살고 싶어. 나는 그림을 그리고, 당신은 당신이 좋아하는 목걸이와 반지를 만들고. 그렇게 작은 화방 하나 만들어서 살고 싶어. 내가 어떻게든 준비할게.”
라일라는 흐느끼다가 말다가를 반복한다. 그리고 마음을 다잡았는지 침을 한번 삼키고는 천천히 말한다.
“나는 어릴 적부터 정혼자가 있어. 아까 그 집의 주인이야. 곧 있으면 찾아올 거고, 그는 이 마을에서 가장 큰 힘을 가지고 있어. 그와 만나면 편하게 돌아갈 수 없어. 얼른 떠나줘.”
나는 순간 그녀가 처한 위기를 생각한다. 사실 위험한 건 내가 아니라 그녀라는 것을.
밖에서 한 남자의 고함이 들려왔을 때, 나는 라일라의 안내에 따라 작은 골방으로 들어간다. 그것이 그녀를 도우는 일이라 생각한다. 나는 그곳에서 남자의 우렁차고 날선 소리를 듣는다. 분명 그것들은 욕설이고, 질책이고, 협박이다. 알아듣지 못해도 분명하다. 라일라가 잠시 신음을 내다가 멈춘다. 나가봐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남자는 자신이 가진 역량을 모두 과시하며 조소, 멸시, 상소리를 있는 대로 내뱉는다. 나는 골방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응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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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좋은 일은 흔히 상황이 어려울 때 생긴다. 사실 상황은 항상 어렵다. 나는 한국의 친구들이 징그러운 생쥐의 이빨에 갉아 먹히거나 아름다운 새장으로 사라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상황은 결국 그렇게 악화된다. 한국에서 보는 하늘은 항상 짙은 보라색이다. 모두가 잠든 밤, 작은 하늘 아래서 나는 남몰래 기지개를 편다. 그런 하늘에게 나는 내 모든 것을 맡긴다. 그러면서 서서히 성장한다. 하지만 곧 하늘은 말라간다. 갈라지고 나를 파괴한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완성이다. 완전히 하늘이 부서지는 날, 나는 나의 존재를 완성한다.
아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잠들어버린 어린 아이처럼, 아무런 힘도 가지지 못한 채 공간과 사람들로부터 끌려 다니거나, 공간과 사람들이 나로부터 도망칠 때, 나는 그것들을 잡지 않는다. 나는 그저 사람들이 들고 있는 사물들과 공간 안에 숨죽인 공기들을 직시할 수 있는 기회를 찾는다. 나의 모든 것이 파괴된 그 순간부터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다. 나는 파리에서 그 순간을 경험한다. 창문 사이로 옅게 번지던 그 공간의 공기들, 라일라가 들고 있던 목걸이와 반지들. 그것들은 마치 송곳 같은 추위 같기도 하고, 따뜻한 모유 같기도 하다. 나는 그것들을 데생하며 내가 성숙해짐을 확인한다.
그리고 첫 번째 습작이 끝나는 순간, 내 주위에는 거친 바다가, 그 안의 참을 수 없는 용암이 끊고 있음을 느낀다. 나는 그곳을 헤엄쳐 온 대지의 문을 두드린다. 어느 알지 못하는 섬에 다다랐을 때 나는 그곳의 수호신을 만난다. 그들은 나를 환영하고,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화구 상자를 열어 붓과 물감을 나눠준다. 그들은 섬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고 내 옷을 벗겨 내 몸에도 색을 칠한다. 나는 굴속에 들어가 몸을 뉘인 채, 그들이 가져간 내 옷을 기다린다.
그들은 나에게 라일라처럼 눈에 색조화장을 하고, 조개 목걸이를 목에 걸어준다. 그들은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나에게 다시 옷을 돌려준다. 광해의 습기가 옷에 스며들어 있고, 내가 준 모든 물감들이 사용되어 화려하며, 그것을 입었을 땐 마치 새로운 피부가 된 듯하다. 나는 모든 것에 해방되었음을 느끼고 다시 바다를 헤엄쳐 그녀의 방에 들어선다. 항상 반쯤밖에 벗지 못한 내가 완전한 나체의 그녀를 바라볼 땐 뜻 모를 생경함과 압도하는 경외심에 사로잡힌다.
그녀는 이미 나와 관계를 한 후이고, 나는 조용히 잠든 라일라의 옆에서 완전히 옷을 벗어던져버린 내 육체를 확인한다. 이대로 살 수 있을 것 같다. 이대로 내 의지대로 그녀의 나체처럼 모든 것을 벗고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스케치북에 그려진 라일라와 그 옆의 널려진 물감들을 잠시 바라본다. 화구박스를 버리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난 지그시 웃은 뒤 그녀 옆에 누워 따라 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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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의 소음이 잠잠해지고, 라일라는 나를 부른다. 나는 바깥에 그녀의 남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그녀의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본다. 탁자 위에 올려진 라디오를 켠다. 라디오에서는 알아듣지 못하는 아랍의 언어들이 흘러나온다. 라일라는 그 소리를 들으며 기도를 한다. 인샬라, 인샬라. 나는 라디오의 음성이 코란의 낭송이라는 것을 직감한다. 나는 라일라의 손을 잡는다. 조심스레 손을 빼다가 멈춘다. 그녀는 내게 할 말이 있는 표정이다. 나는 조용히 그녀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고,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연다.
“어릴 적부터 부모님이 없었어요. 그런 나에게 공부도 시키고, 여행도 보내주었던 사람이에요. 나이도 차이가 많이 나고, 세 번째 부인이 되는 것이지만 그래도 저는 그 사람에게 보답해야 해요.”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그녀는 비어 있던 내 한쪽 손마저 꽉 쥐어보고는 말을 잇는다.
“나는 이곳에서 이렇게 살아야만 해요.”
“알아요. 하지만 당신은 당신의 공간을 부술 수 있는 사람이에요.”
“여기는 파리가 아니라……, 아랍이에요.”
밖에는 예상대로 남자가 서 있다. 나는 남자의 눈에서 지렁이처럼 꿈틀대는 실핏줄을 본다. 남자의 살갗은 늪의 개구리처럼 얼룩덜룩하다. 마치 개구리 한 마리가, 아니 한 떼의 개구리가 폭발하여 그의 얼굴을 뒤덮고 있는 것 같다. 그가 다가와 나에게 권총을 겨눈다.
“당신을 죽여야 하오. 그리고 당신은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소. 어디에 묻히길 원하오?”
나는 화구 상자 옆 주머니에서 라일라를 그리기 위해 가져온 캔버스를 꺼낸다. 그리고 그것을 남자에게 건네주면서
“당신 총에 맞아 죽게 되면 이 빈 그림으로 날 덮어주세요. 모로코의 기온이 곧 떨어질 테니까요.”
남자는 물끄러미 날 쳐다본다.
“당신은 지금 내 아내와 둘이 저 집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죽임을 당해도 할 말이 없소.”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당신은 이방인이고, 내가 아내에게 보내는 마지막 휴가 때 만난 은인이라 들었소.”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다.
“나는 한국인을 좋아하오. 내 아들들도 태권도를 배우고 있소. 이봐, 젊은 친구. 이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는 약속만을 해준다면 놓아주겠소. 나도 살인은 하기 싫소.”
나는 남자의 눈빛에서 자신의 외부적인 위신이 어떻게 되는가에 끊임없이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나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러고 나서 라일라에게 안부를 전해달라는 말을 건넨다. 그새 번진 화구 상자의 흙먼지를 털고, 마을 입구를 향해 걷는다. 남자는 끝내 방아쇠를 당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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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간다. 모로코에서 샀던 물을 한 모금 넘기다 사레가 들린다. 기내는 숙면 중인 사람들이 많고 나도 소리 내어 기침을 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목구멍이 간지러운 채로 한 모금 더 마시지만 목은 여전히 가렵다. 결국 나는 작은 소리로 기침을 하려 했지만 큰 소리가 나고 만다. 주변 사람들은 잠에서 깨 나를 쳐다본다. 나는 괜히 감기에 걸린 것처럼 주머니에서 모로코에서 샀던 하얀 알약 봉지를 꺼낸다. 그러고는 뭔지 모를 알약 두어 개를 입안으로 집어넣는다. 약의 효과가 있는지 몸이 나른해지고, 편안해진다. 보고 있던 휴대전화 속 사진은 파리의 풍경을 잡고 있다. 그리고 라일라와 처음 만났던 루브르의 그 그림, 테오도르의 작품이 보인다. 라일라는 이 그림을 기억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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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주일 전 알제리에 도착했다. 나는 오랜 지병이 있었고, 그랬기에 이번 여행을 서둘렀다. 동행한 친구는 멀리서 나를 부른다.
“테오도르! 테오도르!”
나는 그의 음성을 따라 바삐 걸었다. 그곳에는 새침한 표정의 한 아랍 여자가 서 있었다. 어제 미술에 대해 하루 종일 내게 물었던 파티마라는 미술학도였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파티마, 내 모델을 해주기로 결심한 거야?”
그녀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날 밤 그녀를 우리의 숙소에 초대했고, 정성껏 음식을 대접했다. 그녀는 내 방으로 숫접게 들어섰다. 파티마는 알제리의 산뜻한 풍속과 닮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히잡를 벗었다. 진한 눈썹과 반듯한 머릿결이 아름다운 굴곡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차도르를 벗어내자 군살 없는 깨끗한 몸매와 덥수룩한 음모가 드러났다. 그녀는 펜을 든 이방인인 나의 눈동자를 쳐다봤다. 나는 그녀의 몸에 집중한 채 서서히 선을 그려냈다.
“당신의 나라는 우리를 식민지로 만들었어요.”
나는 순간 데생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몇 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어떤 결심이 든 순간 그녀에게 다가가 옷을 입혔다. 그리고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녀가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주고 제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렇게 그리다 말았던 첫 번째 습작을 놔둔 채, 두 번째 습작으로 반쯤 벗은 아랍여자를 그리기 시작했다. 아랍여자는 완전히 벗으면 안 된다고, 아니 완전히 벗을 수 없다고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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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롱한 기분으로 꿈에서 깬다. 꿈인지 아닌지도 잘 모른다. 잔 것인지, 안 잔 것인지도 잘 판단이 서지 않는다. 나는 알제리의 그 여인을 생각한다. 그러곤 바로 파리의 라일라를 떠올린다. 결국 라일라도 반쯤밖에 벗을 수밖에 없는 여자였다. 머리가 너무 어지럽다. 환각제를 먹은 것인지 구역질이 난다. 비행기는 한국 상공에서 착륙 준비를 하고 있다. 화장실에 가고 싶지만 일어설 수가 없다.
나는 생각한다. 반쯤이라는 것에 대해서. 나는 결국 반쯤 벗은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새로운 디자인 회사에 다니며 적금을 하고,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할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어머니의 각방에는 들어가지 않을 생각이다. 사실 세상을 사는 일은 반쯤 벗은 채로, 반쯤 벗겨진 채로 하는 것이 맞다. 파리에서 만난 그 아랍 여자가 처음부터 반쯤만 벗었던 여자였어야 맞고, 아니 내가 반쯤만 벗겼어야 맞다.
비행기가 인천 공항으로 착륙을 한다. 비행기의 진동이 내 균형감각을 더욱 흩트려 놓는다. 나는 결국 있는 힘껏 일어서 짐칸에 있는 화구 상자를 내려 지퍼를 연다. 그 안에 구토를 한다. 아랍의 음식, 그것들의 색깔들이 물감과 뒤섞일 것을 생각한다. 나는 지퍼를 다시 끝까지 잠근다. 구토 소리에 사람들은 역겹게 쳐다본다.
진동음이 울린다. 면접을 보러 오라는 어느 디자인 회사다. 그렇다. 나는 경력직으로 어딘가에 다시 들어갈 수 있다. 다시 여러 겹의 양복을 껴입은 뒤 서류 가방을 들고 지하철을 뚫어 출근할 수 있다. 비행기가 서서히 멈춰 선다. 착륙이 끝나자 스튜어디스가 멀리서 빠르게 다가온다.
나는 화구박스를 짐칸에 다시 넣어둔 채 비행기에서 바삐 빠져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