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겨울날의 안부 - Ep.08
우리가 어떤 사건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손에 잡히는 단서가 있다면, 대개는 온도다. 사람의 얼굴이나 말보다 먼저, 공기의 결이 떠오른다. 그날 바람이 얼마나 날카로웠는지, 햇빛이 어떤 각도로 떨어졌는지, 숨을 들이마실 때 목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감정은 사건 위에만 얹히지 않는다. 사건이 놓였던 배경 위에 먼저 번진다. 차갑지만 따뜻한 날, 덥지만 차가운 날 같은 말들이 그래서 생긴다. 같은 장면도 날씨가 바뀌면 다른 의미를 얻는다. 기억은 늘 계절의 옷을 입고 돌아온다.
이번 겨울을 되돌아보면, 나는 이런 문장을 남기게 된다. 차갑지만 차가웠다. 따뜻함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 따뜻함을 만들어낼 여력이 부족했던 겨울이었다. 몸은 안팎으로 자주 가라앉았고, 어깨는 쉽게 움츠러들었다. 밖으로 나가는 일이 짧아졌고, 밤은 유난히 길었다. 어느 날은 계단 몇 칸만 올라가도 숨이 먼저 차가워졌고, 손끝은 장갑 속에서도 오래 굳어 있었다. 그 계절은 누군가에게는 반짝이는 설렘이었겠지만, 내게는 먼저 균형을 되찾는 시간이었고, 무너지지 않기 위해 생활의 작은 질서를 다시 세우는 시간이었다.
나는 겨울 내내 내 몸을 먼저 추슬렀다. 뜨거운 의욕을 끌어올리기보다, 얼어붙지 않게 관리하는 쪽을 택했다. 따뜻한 물로 손을 녹이고, 집 안의 공기를 환기시키고, 잠드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일정하게 맞추려 애썼다. 그리고 내 주위를 먼저 챙겼다. 가까운 사람들의 안부를 더 자주 떠올리고, 말의 온도를 조심하고, 무심코 흘려보낼 수 있는 마음들을 한 번 더 붙잡았다.
그러다 어느 날, 유난히 찬바람이 이곳저곳으로 몰아치던 오후가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바람이 옷깃 안으로 파고들었고, 골목 모서리마다 먼지가 얇게 굴러다녔다. 바람은 마치 다가올 새 계절을 시샘하듯 성질을 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날 나는 겨울이 끝나가고 있다는 걸 더 분명히 느꼈다. 겨울은 늘 마지막에 더 차갑다. 끝을 앞두고 있는 계절은 자기 존재를 한 번 더 강조한다. 하지만 그 강조는 오래가지 못한다. 바람이 아무리 날카로워도, 햇빛은 조금씩 각도를 바꾸고, 낮은 조금씩 길어진다. 그렇게 봄이 코앞에 온다.
나는 다시 돌아올 겨울을 생각한다. 다음 겨울은 차갑지만 따뜻했던 날들로 남았으면 한다. 겨울을 떠올릴 때 미소 지을 수 있는 감정으로. 그 감정이란 대단한 사건의 감동이 아니라, 추웠지만 누군가의 손이 따뜻했던 기억, 가라앉았지만 결국 하루를 잘 마무리했던 기억, 움츠러들었지만 나를 잘 돌봤다는 기억 같은 것일 것이다. 날씨는 변하지 않는다. 겨울은 겨울대로 차갑다. 다만 그 차가움 위에 어떤 배경을 덧입힐지는, 내가 만드는 쪽에 더 가깝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바람을 맞으며 생각한다. 계절은 기억의 첫 단서가 아니라, 감정의 배경을 입히는 조명이다. 같은 겨울도 어떤 해에는 차갑지만 따뜻하고, 어떤 해에는 차갑지만 차갑다. 이번 겨울이 내게 그랬다면, 다음 겨울은 또 다르게 남을 수 있다. 끝을 시샘하듯 불어대는 찬바람 속에서도, 나는 그 가능성을 본다. 겨울이 끝나는 길목에서, 봄의 기척이 아주 얇게 스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