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레터] 나의 색을 잃어간다는 두려움

어느 겨울날의 안부 - Ep.05

by 오로지오롯이



겨울의 색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더 짙어질 자리를 비워두는 중이다




겨울이 오면 나무는 가장 먼저 색을 내려놓는다. 초록을 떨구고, 붉음을 접고, 마지막 남은 갈빛마저 바람에 내준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 장면이 두려웠다. 나도 저렇게 색을 잃어가는 중인 것 같아서. 잘하던 것들이 무뎌지고, 즐겁던 것들이 덜 즐거워지고, 내 안의 어떤 표정들이 점점 옅어지는 기분. 바쁜 하루를 지나며 문득 거울을 볼 때, 내가 점점 덜 선명해지는 것 같은 날들이 있었다.


그날도 그런 마음으로 길을 걸었다. 공원 입구의 나무들은 모두 앙상했다. 가지는 비어 있었고, 하늘은 그 빈 곳을 더 크게 보이게 했다. 가까이 다가가면 사정은 조금 달랐다. 비어 있는 줄 알았던 가지 끝마다 작은 봉오리들이 단단히 매달려 있었다. 마치 잠들어 있는 게 아니라 숨을 죽이고 있는 것처럼. 겨울의 나무는 아무것도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자세히 보면 준비 중인 몸이었다. 색을 잃어가는 것 같아 두려웠다가도, 모두가 그런 시기를 겪으며 더욱 강렬한 색감을 만들어낸다는 걸 겨울 나무를 보며 느끼고, 위안 받는다. 나무는 한 철을 비워내고 나서야 다음 철의 색을 더 똑똑하게 꺼내 보이는 법이다.


나는 나무 아래에서 잠깐 멈춰 서서 숨을 고르고, 주머니 속 손을 풀었다. 바람이 가지 사이를 지나가며 소리를 만들었다. 잎이 없어서 더 잘 들리는 소리였다. 나무는 비었는데도, 겨울은 조용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 좋았다. 비어 있는 시간에도 뭔가는 흐르고 있다는 뜻이니까. 공기가 흐르는 것처럼 바람이 흐르는 것처럼 물이 흐르는 것처럼, 모든 건 모든 순간 자연스레 흐르고 있는데. 나는 그 흐름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자주 스스로에게 돌을 놓는다. 이쯤에서 멈춰야 한다는 판단, 아직은 부족하다는 기준, 지금은 즐기면 안 된다는 금지. 그런 돌들을 마음 한복판에 두고, 흐름이 답답하다고 투덜거린다. 스스로 길을 막아놓고는 왜 물이 흐르지 않느냐고 묻는 셈이다. 겨울 나무를 보며 그런 내 습관이 떠올랐다. 나무는 막지 않는다. 다만 내려놓고, 비워두고, 때를 기다린다. 잎을 붙잡지 않고, 색을 억지로 유지하지 않는다. 가지가 앙상해지는 건 패배가 아니라 더욱 새로워기지기 위한 효율적인 방식이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답을 내리기보다 돌 하나를 옮기는 일을 해보기로 했다. 무엇을 해야 한다는 다짐이 아니라, 무엇을 덜 하겠다는 선택. 급하게 선명해지려는 마음을 잠깐 놓아두기. 무언가를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허락하기. 그러면 흐름은 다시 흐름대로 돌아올지도 모른다. 나무가 봄을 앞당기지 않아도 봄이 오는 것처럼.


색이 옅어지는 시기가 있다. 그 시기를 지나야만 더 짙은 색이 나온다는 걸, 겨울 나무는 말없이 보여준다. 내가 잃어가는 줄 알았던 것은 어쩌면 사라짐이 아니라 준비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겨울의 앙상함도 덜 무섭다. 비어 있는 가지 끝에 봉오리가 붙어 있듯, 내 안의 어떤 것들도 아직 떨어지지 않은 채로 조용히 매달려 있을 테니까. 흐름은 이미 흘러가고 있다. 내가 그 사이에 돌을 두고 스스로 답답해하고 있었던 건 아닐지, 겨울 나무가 조용히 묻는 것 같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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