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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방인 Apr 20. 2020

왜 해야 하는지 몰라서 화가 나는 거거든요

 상명하복. 상사는 명령하고 아랫사람은 따른다. 따르는 이유? 상사가 명령했기 때문에. 상사가 명령하지 않았다면 따르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상사가 명령했다. 그러면 따라야 한다. 이유가 중요한 게 아니다. 따르는 게 중요한 것이다. 남자들이라면 대부분 군대에서 배웠을 법한 문화이다. 전쟁상황에서 자기 생각대로 행동할 수가 없다.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상관의 지시에 맞춰서 행동해야 전쟁에서 이길 가능성이 크다. 혹 전쟁에서 패했다고 하더라도, 오합지졸이라는 오명은 피할 수 있고 지휘체계가 제대로 작동했음에도 불구하고 패한 것이기에 아랫사람의 책임은 크지 않다. 잘못된 지시를 내린 상사의 책임이 클 뿐이다.


그런데 말이다. 누가 봐도 잘못된 명령일 수가 있고, 패할 것이 눈에 뻔히 보이는 상황으로 이끄는 잘못된 명령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나. 상사의 지시에 맞춰서 그대로 따라야 하는 것인가. 각자가 이성이 있고 생각이 있는 사람들인데, 생각이 조금씩 다를 수 있고 미래를 예측하는 일에 있어 이견이 있을 수 있을 터인데 그대로 따르는 게 무리가 가는 경우가 발생하지 않을까. 다행히 조금 다른 의견을 개진해보고, 상사와 조율과 토론을 통해 조금 더 나은 방향이 무엇인지 함께 공감하고 행동방향을 결정한다면 최상의 결과를 도출할 수 있겠으나, 그렇다면 이미 상명하복이 아니다. 명령하는 사람도 없고 따르는 사람도 없다. 모두가 평등한 관계일 뿐이고 상명하복이라는 말도 쓰이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조직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어디 그렇던가. 윗사람이 까라면 까야하는 게 맞다고 우리는 배워왔고, 그게 2000년이 훌쩍 넘은 지금에도 여전히 우리네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는 방식이다. 좀 더 많은 경험과 좀 더 다양한 정보를 가진 윗사람이 정확한 판단을 내릴 가능성이 조금은 더 높다라는 건 사실 부인하기 어렵다. 좋다. 그렇다면 백번 양보해서 윗사람의 말이 맞을 가능성이 많은 것 같으니 지시에 그대로 따라서 일을 하리라 굳게 마음을 먹어보자. 어차피 내가 반론을 제기하고 다른 방향을 제시해봤자 먹힐 가능성이 많지 않다. 괜한 힘만 빼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 포기하면 편하다. 시키는 대로 해보자.


그런데, 까라는 대로 까긴 하겠는데, 진짜 그런데, 죽어도 이 한 가지 하나만은 도저히 포기가 안된다. “왜 까야 되는 것인가?”. 체계가 있고 위계질서가 있기 때문에 하라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최소한 왜 하는지는 알아야 되지 않겠는가? 왜 해야 되는지도 모르고 무조건 하라고만 하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 화가 난다. 급한 일이니 당장 내일까지 하라는데, 왜 급한지 왜 당장 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내 감정의 변화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왜 해야 되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전후 사정을 알고 최종 목표와 미션이 무엇인지 알아야 일의 능률도 생긴다. 일을 하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변화에도 대응할 수 있다. 밑도 끝도 없이 무조건 하기만 하는 게 능사가 아니다.


통상 하라는 대로 해야 하기 때문에 화가 난다고 생각할 수가 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하라는 대로 한다라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해야 하는 것이다.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공감할 수 있다면, 지시의 방법(하라는 대로 해라)에만 불만을 가지면 된다. 그러나 왜 해야 하는지 설명도 없이 지시만 한다면 지시의 방법뿐만 아니라 지시의 이유까지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일을 해라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일을 해라가 중요하다. 좀 더 많은 실적이 필요하기 때문에, 경쟁사가 생겼기 때문에, 지난달에 있었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 등등 이유는 많다. 아니 애초에 이유 없는 일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말이 안 된다. 크든 작든, 중요하든 중요하지 않든 지시를 하는 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유는 상사의 마음에 고이 간직한 채, 본인만 아는 소중한 비밀로 간직하기 위해서 얘기하지 않은 채로 “해라”에만 힘을 쏟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간혹 상사로부터 나도 윗사람이 지시한 일이다, 나도 어쩔 수가 없다라는 이유를 들을 때도 있다. 심호흡 한번 하고 이백 번 양보해서 이해는 안 되고 하고 싶지도 않지만 어쨌거나 “윗사람의 지시”라는 것에 내 행동의 동기를 부여해 볼 수는 있다. 그런데 그런 이해하고 싶지 않은 이유조차 듣지 못한 채 무조건 하라고 하는 지시에 대해서는 반발하지 않기가 어렵다.


지시의 내용보다는 지시의 이유에 조금만 시간과 정성을 할애해보면 참 좋을 텐데 말이다. 어차피 상사도 일이 잘못되길 바라지 않을 것이다. 잘 되기 위해서 지시를 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좋은 결과를 원한다면, 일을 하는 과정을 원활하게 만들어 더욱더 좋은 결과를 바란다면, “이유”에 대해 설명 좀 해 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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