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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방인 May 04. 2020

저, 퇴근했거든요

1. 회사를 내 집 같이 여기는 분들이 계신다. 회사에서 개인적인 일에 열심이다. 집에 휴지가 떨어져서 인터넷으로 주문도 해야 되고, 주말에 동창들을 만나기로 했기 때문에 최근에 뜨고 있는 맛집도 검색해봐야 한다. 근무시간인 건 알지만 개인적인 일이 눈에 밟혀 회사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2. 자신의 집을 회사같이 여기는 분들도 계신다. 근로계약서에 근무시간을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로 규정했기 때문에 6시까지 일을 해야 하지만, 일을 미처 마무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집에 가서까지 일을 해야 하는 분들이다. 혹은 일을 마무리했다라고 생각하고 집에 왔는데 저녁을 먹는 도중 해야 할 일이 생각나버렸다. 그래서 집에서 일을 하기 위한 준비태세를 갖추고 본격적으로 피씨 앞에 앉아서 일을 하기 시작한다. 집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부하직원이 곁에 없다. 그런데 부하직원에게 확인할 것이 있다. 핸드폰을 든다. 부하직원에게 카톡을 보낸다. “어제 맡겼던 그 일 지금 마무리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진행하고 있는가?”라고.


회사는 집이 아니고 집은 회사가 아니다. 회사는 일하는 곳이고 집은 쉬는 곳, 개인적인 공간이다. 회사에서 쉬는 것은 맞지 않고, 집에서 회사일을 하는 것도 자연스럽지 않다. 뭐 굳이 집에서 일을 해야 한다면 일에 빵꾸가 나지 않을 정도로 최소한으로 하는 게 자연스럽다. 모든 자료들과 소스들이 어차피 회사에 있다. 일이 제대로 되려면 어차피 회사를 가야 한다. 심각한 문제는 급하지도 않고 중요하지도 않고, 오늘 안 해도 될 듯한 일인데 오늘 기필코 마무리를 짓고야 말겠다는 불타오르는 사명감 때문에 생겨버린다. 핸드폰을 드는 순간 이미 갈등은 예고되었다. 카톡을 실행하는 순간 갈등은 이미 시작되었다. 부하직원에게 카톡을 보내는 순간 갈등은 폭발했다.


퇴근 후 혼자 집에서 일을 하는 것 자체에 대해 불만을 제기할 수는 없겠다. 적극적이고 책임감이 강한 성격이라면 그래야 하는 게 당연할 수도 있다. 다만 퇴근 후 업무를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일은 경계해야 하는 일이다. 다른 사람은 퇴근 후에 개인적인 일이 있을 수 있다. 아니, 이러한 사유를 설명해야 하는 것도 웃긴 일이다. 퇴근 후에는 일을 하지 않는 게 당연하고, 업무지시를 받지 않는 것도 당연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당일 밤에 해야 하는 일이 아닌 일을 퇴근 후에 지시하는 경우도 있다. 밤 9시에 부하직원에게 카톡으로 “내일 출근하면 경쟁사의 동향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라”라는 업무지시를 하는 경우 말이다. 내일 출근할 텐데, 내일 할 일인데, 내일 지시하면 안 되는 것인가? 우리에겐 내일이 있는데, 마치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꼭 살아야 하는 것일까. 퇴근 후의 업무연락이 편한 사람은 없다라는 건 너무 단정적인 말일까. 보통의 회사원이라면 퇴근 후의 업무지시에 거부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는 건 너무 속좁은 생각일까.


퇴근 후 내일 해야 할 일의 업무지시에 대한 상사의 변명을 들어본다. 내일 지시를 해야 하는데 내일 혹시 다른 급한 일이 생겨 지시하는 것을 잊어버릴까 봐 생각난 김에 오늘 밤에 지시를 해놓는다고 한다. 퇴근 후 밤늦게 미리 지시를 해 놓을 정도로 중요한 일이라면서 내일 잊어버릴 수 있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인지, 그렇게 긴박하고 중차대한 일을 잊어버리면서 회사일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중요하고 급한 일이면, 내일 절대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거 아닐까? 물론 퇴근 후 연락 한 번 했다고 해서 상사를 무조건적으로 비난하거나, 도덕적으로 흠이 있는 사람이라고까지 매도할 수는 없다. 그러나 상대방의 입장과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배려가 없고 매너가 없는 사람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기는 어렵겠다.


상사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을 경우에는 심지어 퇴근 후에 생일 축하한다라는 연락조차도 싫을 경우가 있다. 퇴근 후 상사와의 연락 자체가 부담이 될 수 있다. 밴댕이 속알머리라고 비난받을 수도 있으나, 그만큼 상사라고 하는 존재는 회사와 떼어놓을래야 떼어놓을 수 없고, 상사는 곧 회사 업무와 연관지어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물론 모두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적인 유대가 깊고, 존경받는 상사 밑에서 일하고 있는 직원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좋은 관계에서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그렇지 못한 관계에서 문제가 발생하게 되고, 좋지 않은 관계라면 문제 발생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다.


퇴근 후의 삶은 개인이 먹고 놀기 위한 것일 수도 있겠으나, 휴식과 취미생활 등 재충전의 시간을 보냄으로써 내일의 업무를 준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카톡의 부정적인 효과는 스마트폰 메신저의 업무화일 것이다. 퇴근 후 업무지시에 대한 문자를 보내는 것은 부담스럽게 느끼지만 카톡 하나 보내는 정도는 자연스럽게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카톡 읽음 확인 가능 여부로 인해 사실 과거보다 더욱 부담이 늘었다. 업무지시에 대한 카톡을 확인했는데 반응을 보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너무나 고민이 되는 게 사실이다. 조금 더 활기찬 내일을 위해, 조금 더 열심히 일하는 내일을 만들어가기 위해 퇴근 후 업무지시는 12시간만, 내일로 조금만 미뤄보면 어떨까. 세상에는 미뤄서 좋은 일도 있다. 퇴근 후 업무지시도 그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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