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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워녕 Mar 16. 2021

만만한 게 카페니까요


  나는 늘 항상 뭔가 어려웠던 것 같다.


  유리하기 위해 그랬을 것이다. 아는데서 모르는 척하고, 모르는 데서 아는 척하고. 그러니까, 나는 '나'를 잘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다. 한편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눈치껏 잘 파악하는 편이어서, 나는 내가 원하는 걸 잘 얻어냈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상황을 이끄는 편이었다. 그래서 '똑똑하다' 혹은 '야무지다'는 말을 자주 들었는데, 따지고 보면 난 그냥 약았던 것 같다. 나에 대해서는 하나도 드러내지 않으면서, 상대방의 깊은 속내만 얻어냈으니. 그래서 그런지 정작 나와 관계가 어느 정도 깊어진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라는 말을 하곤 했다.   


  다른 약은 사람을 보면 한눈에 알아본다. 저 사람이 지금 여우짓을 하고 있구나. 그러다가 속이 그냥 다 드러나는 사람을 보면 좀 당황스럽다. 쉬운 사람이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자기를 쉽게 오픈한다. 아니, 무슨 사람이 이렇게...


  우리 가게에 로스터기를 설치하러 온 기사님에게 내가 "오전에는 어디 설치하고 오셨어요?"라고 묻자, 그분은 "강화도 다녀왔어요. 설치 끝나고 배가 너무 고파서 동태탕 먹고 왔어요."라고 하셨다. 아, 동태탕. 이 구체적인 문장에 나는 당황했지만 최대한 침착하게 "아, 동태탕 맛있죠. 오늘 같은 날은 동태탕이죠."라고 대응했다.


  동태탕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도 좀 쉽고 싶어서. 쉬운 사람이고 싶어서. 사람들이 나를 좀 쉽게 대했으면 해서.




  카페 사장이 되고 나니 드디어 사람들이 나를 쉽게 대해주고 있다. 나는 '카페 사장'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쉬운 사람이 되었다. 여기에 내가 가진 원래 성격이나 성향, 외모와 경력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사람들은 쉽게 카페에 들어와 카페 사장인 나에게 쉽게 말을 걸고, 쉽게 물어본다. 나는 매우 흐뭇하다. 카페 하길 잘했네. 


  카페는 만만한 곳이다. 사람들은 카페를 만만하게 생각한다. '만만하게'라는 표현은, 그러니까, '쉽게'라는 의미다.


  아침 8시~9시에 오갈 데 없어 방황하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이유는 다 제각각이다. 시계를 잘못 봐서, 병원에 가려고 나왔는데 아직 병원 문이 안 열려서, 다른 사람과 약속이 있었는데 상대방이 늦어서 등. 그럴 때 사람들은 카페에 온다. "좀 앉아있어도 되죠?"라며. 카페는 이토록 쉽다. 아침만 그런 게 아니다. 점심 때도, 저녁 때도 그렇다. 잠시 시간 때울 곳이 필요할 때, 밖이 너무 추워서 들어갈 곳이 필요할 때 사람들은 쉽게 카페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렇게 쉽게 들어온 카페에서 사람들은 쉽게 말을 건다. 보통은 "이번에 새로 오픈하셨죠? 지나다니면서 계속 봤어요." "아주 달달한 커피를 먹고 싶은데 어떤 걸 먹으면 되나요?"와 같은 식인데, 가끔씩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지기도 한다. "여기 동사무소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해요?" "QR체크인은 어떻게 하는 거예요? 좀 해주세요." "이 의자 어디서 사셨어요? 저도 이거 좀 사고 싶은데." "여기로 내일 택배 하나 보낼 테니까 좀 받아주실 수 있나요?"와 같은. 그러면 나는 동사무소까지 가는 길을 자세히 알려드리고, QR체크인을 위해 손님의 핸드폰을 받아 들고 카카오톡 계정 가입부터 도와드리기도 하고, 의자를 구매했던 구매처를 찾아 전화번호를 알려드리기도 하고, 택배를 받아서 보관했다가 손님의 퇴근길에 안겨드리기도 한다.


  그렇게 카페를 찾는 사람들 중에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말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많다. 내가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하셨네요!", "날씨가 많이 풀렸죠?"라고 내가 먼저 말을 건네면, 손님은 기다렸다는 듯 쉽게 자기 이야기를 시작한다. 지난주에 병원에서 무슨 검사를 받았는데, 오늘 결과를 들으러 나왔는데, 긴장되어 잠도 못 자고 너무 일찍 나와버렸다며, 갈 데가 없다며. 나는 그분이 어제 세탁기를 돌렸는지 안 돌렸는지까지 알게 된다. 외로운 사람들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친밀함을 원하는 건 분명한 것 같다.


  아침 8시 반에 한 손님이 들어오셔서 따뜻한 라떼를 주문하시면서 앉아서 먹고 가겠다고 하셨다. 우유는 아주 뜨겁게 해달라고 하셨다. 후루룩후루룩 들이키지 못할 정도로 뜨겁게. 내가 라떼를 가져다 드리자, 그분은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출근해야 하는데 출근하기 싫어서 회사 들어가기 전에 카페 와서 라떼 한 잔 하는 거라고. 어쩜 이렇게 출근하기 싫을 수가 있냐면서. 그런데 늘 30분 일찍 출근하던 게 버릇이 되어서 집에서 준비하고 나와보니 30분 이른 시간이었다면서. 이 시간에 문 열어줘서 고맙다면서. "그건 그렇고 저기 저 달력이 참 예쁘네요. 저거 어디서 사셨어요? 저 저런 디자인 참 좋아하거든요." 이렇게 한참을 이야기하던 그분은 뜨거운 라떼를 후후 불며 천천히 다 드시고는 "저 이제 출근할게요. 고마웠습니다."하고 8시 55분에 홀연히 떠나셨다.


  샐러드를 포장해달라고 한 손님은 내가 샐러드를 포장하는 동안 새로 산 휴대폰을 개봉해서 백업 파일을 설치하셨는데, 그러는 동안 나는 그 휴대폰 구매와 개봉에 관한 전체 스토리를 들어야 했다. 자기가 아마 전국에서 1등으로 샀을 거라면서, 이 영롱한 자태를 보라면서.


  사람들이 카페를 만만하게 생각해줘서 나는 기분이 좋다. 아무 거리낌 없이 카페에 들어오고, 고민 고민해가며 먹고 싶은 걸 주문하고, 하고 싶은 말을 맘껏 하는 그 모습들을 보면 나는 아주 흡족하다.


  "커피 잘 마시고 갑니다", "잘 쉬다 갑니다", "편안히 있다 갑니다", "덕분에 좋은 시간 보냈습니다"라는 말로 끝인사를 해주시면 나는 정말이지 더 바랄 게 없다. 딱 내가 듣고 싶었던 말들이다.





  한가한 오전, 한 아주머니가 다급히 뛰어들어오셨다.


  핸드폰을 잃어버려서 그런데, 미안한데, 전화 한 통만 쓰게 해 달라고 하셨다. 손이 벌벌 떨려 자기 핸드폰 번호도 제대로 누르지 못하던 아주머니는, 어떡하냐며, 전화를 안 받는다며, 그 안에는 신분증이랑 온갖 카드가 다 들어있다며, 누군가 집어 들고 그냥 가버린 게 분명하다며 쩔쩔매셨다. 안 되겠다며, 핸드폰을 떨어뜨렸을만한 곳에 다시 가봐야겠다며 왔다 갔다 하시기를 서너 번쯤 하시고 땀범벅이 된 아주머니는 일단 은행에 가서 분실신고부터 하기로 했다. 그분이 은행에 가신 사이 핸드폰을 주운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고, 카페로 돌아온 아주머니에게 그 소식을 알렸다.


  아주머니는 너무너무 고맙다면서, 그리고 정말 미안했다면서, 당장 급한데 누굴 붙잡고 도움을 청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어딜 들어가야 할지도 모르겠을 때 그냥 눈 앞에 카페가 보였다면서, 만만한 게 카페이지 않냐면서(이 말을 하시고는 또 거듭 미안하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고마워서 어떡하냐면서, 내가 준 얼그레이 티와 귤 2개를 들고 나가셨다.


  그분은 '만만한 게 카페'라는 말을 하고는 당황하셔서 얼굴이 빨개지셔서는 "아니, 그게 아니고"라고 하셨지만, 나는 그 말에 왠지 찡했다. 만만했구나. 다행이다. 만만해서 다행이다.


  다음날 저녁, 그분이 다시 카페로 찾아오셨다. 정말 너무너무 고마웠다면서. 핸드폰은 없어졌고 당장 누구한테 도와달라고 해야 하는데 생각난 게 카페였다고 했다. 우리 가게 바로 옆에 식당도 있고 약국도 있고 핸드폰 가게도 있지만, 왜인지 모르게 '카페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리고 하필 우리 카페에 들어오신 게 너무 다행이라고 했다. 집에 돌아가서 밤에 천천히 생각해보니, 아무리 '만만한 카페'라고 해도, 어떻게 이렇게 자기를 적극적으로 도와줄 수가 있나 싶더라면서.






카페는 만만한 곳이라,

아무 때나 그냥 괜히 들어오셔도 됩니다.

그냥 괜히 들어와 앉아서 시간 보내셔도 좋습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최선을 다해 도움을 드리고,

잠깐 어디 다녀오는 사이 짐을 맡겨놓을 곳이 필요하면 짐도 맡아드립니다.


카페 사장은 만만한 사람이라,

수다가 떨고 싶을 때 오셔서 수다 떠셔도 됩니다.

들어드릴게요.

저 그런 거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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