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트키
뉴스에서 가끔 만나는 사건 사고들이 있다.
'우발적인 범행'이라는 표현이 쓰이는 사건 사고들에서 범행 당사자의 말을 들어보면 '기분이 나빠서 그랬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기분이 왜 나빴을까. 사건의 앞뒤 스토리를 살펴보면, 꽤 많은 경우, 어떤 '말'이 있다. 기분 나쁜 말. 그 상황과 전혀 관계없는 내가 들어도 기분 나쁜 말.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발적인 범행'이 정당화될 수는 없지만, 한편으론, 그 사람은 꼭 그렇게 말을 했어야만 했나 하는 안타까움은 남는다. 일부러 듣는 사람 기분 나쁘라고 했는지, 그냥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 번만 더 생각하고 말해주지.
'침묵은 금'이라고 한다. 오죽했으면 이런 속담이 생겼을까 싶다. 이건 결국 '너 좀 입 다물고 조용히 있어라'는 말이 아닌가. 얼마나 기분 나쁘게 말하는 사람들만 있었길래 '침묵은 금'이라는 말이 생겼을까. 예쁜 말, 좋은 말만 하는 세상이라면 '수다는 금'이라는 말이 생기지 않았을까. '너의 말을 더 듣고 싶으니 계속 더 떠들어라'는 의미로 말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친절한 카페 사장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손님도 있고 당황스러운 일도 많이 일어나지만, 그래도 나는 끝끝내 친절하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카페일을 하다 보니, 그렇게 친절함을 노력하다 보니, 나름의 치트키가 생겼다. 바로 "편하게 하세요"라는 말이다.
책장에 꽂혀있는 책을 봐도 되냐는 손님에게 나는 "편하게 보세요^^"라고 한다. 처음에는 "네~ 보셔도 됩니다^^"라고 했는데, "편하게 보세요^^"라고 멘트를 바꾼 이후로 손님들이 싱글싱글 웃으며 책을 꺼내보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테라스에 앉아서 먹어도 되냐는 손님에게 나는 "네~ 그렇게 하세요~" 대신 "편하게 하세요^^"라고 한다. 그 말을 들은 손님들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테라스로 나간다.
놀라운 건, 나는 분명 편하게 하라고 말 한마디 했을 뿐인데, 손님들은 더 공손해진다는 것이다. 음료를 만들어 테라스로 가지고 가다 보면 테라스에 앉아있던 분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음료를 받아 든다. "감사합니다"를 몇 번이고 계속하신다. 다 드시고 나서 돌아갈 때는 빈 컵을 가져다주시면서 "감사합니다"를 하시는데 이때는 심지어 꾸벅 인사까지 해주신다. 그분들이 가신 후 테라스에 나가보면, 테이블과 의자는 말끔히 정리되어 있다. 내가 손댈 게 없다.
한가한 토요일 아침, 부부 손님이 카페에 오셨다. 오랜만에 분위기 내고 싶어 하는 기미가 역력했다. 남편분이 핸드드립 커피를 주문하셨는데, "핸드드립은 시간 조금 걸릴 텐데 괜찮으실까요?"라고 묻자 괜찮다고, 시간 많다고 하셨다.
천천히 커피를 내리고 있는데, 갑자기 그분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우왕좌왕한 분위기가 카페 안에 차올랐다. 나는 아직 커피를 내리고 있는데, 두 분은 짜증과 신경질이 뒤섞인 목소리로 서로의 잘잘못을 따져 묻고 있었다. 알고 보니 집에 가스불을 안 끄고 나왔단다. 집까지는 10분 정도 걸린다고 했다.
아내는 남편에게 빨리 집에 뛰어가서 가스불을 끄고 돌아오라는 입장이었고, 남편은 갔다 오는데 아무리 빨라도 20분은 걸릴 텐데, 그동안 커피가 다 식을 거라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남편분은 커피를 테이크아웃 컵에 달라고 하셨는데, 그 옆에서 아내분은 귀한 핸드드립 커피를 어떻게 종이컵에 먹을 수 있냐며, 이럴 시간에 그냥 빨리 뛰어갔다 오라고 소리를 높였다. 남편의 짜증 난 표정이 얼굴에 그대로 다 드러났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가, 종이컵에 핸드드립 커피를 따르며 치트키를 사용했다. "편하게 하세요^^"
놀랍게도, 그 말 한마디에 두 분의 티격태격이 끝났다. 남편의 짜증 난 얼굴도 없어졌고, 아내의 신경질 난 목소리도 누그러졌다. 남편분은 핸드드립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두 손으로 받아 들고 "고맙습니다!"하고 말하신 후 밖으로 냅다 달려 나가셨다.
또 하나의 치트키는 "천천히 하세요^^"이다.
카페에 혼자 들어온 한 손님이 두리번두리번하다가 몇 번 고민하는 듯하다가 카운터에 오셔서 나에게 이렇게 말하셨다. "일행 오면 그때 주문해도 되죠?" 나는 "네~ 천천히 하세요^^"라고 했다. 손님은 고맙다면서 자리에 가서 앉아 있다가 일행이 도착하자 일행에게 "뭐 먹을 거야?"라고 소리치며 급히 카운터로 달려 나오셨다. 일행은 아직 자리에 앉지도 않았는데. 아니, 천천히 하시라니까.
주문하기 위해 카운터 앞에 선 손님들은 매우 바쁘다. 할 게 많다. 같이 온 일행들에게 뭐 먹을 거냐고 물어봐야지, 카드도 꺼내야지, 쿠폰도 꺼내야지, 영수증도 받아야지, QR체크인도 해야지, 일행들한테 QR체크인하라고 소리도 질러야지... 그 와중에 카드가 한도 초과로 나오거나, 핸드폰을 아무리 흔들어도 QR화면이 나오지 않거나, 인증을 다시 받아야 하거나, 분명 받아둔 쿠폰이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거나 하는 문제가 생기면 손님들은 당황하기 시작한다. 흔들리는 눈빛으로 나를 흘깃 보며 "잠시만요"라고 하는 손님에게 나는 말한다. "천천히 하세요^^"
카페 안에 있는데 갑자기 비가 오기 시작하면, 앉아있던 손님은 엉덩이를 들썩들썩하신다. 비 오는 걸 보다가 시계를 본 손님은 나에게 달려와 "죄송한데, 우산 잠깐만 빌릴 수 있을까요? 집이 바로 근처인데, 5분만 쓰고 바로 돌려드릴게요!"라고 하신다. 나는 "천천히 다녀오세요^^"라고 한다. 손님은 "정말 감사합니다!"하고 꾸벅 인사를 하시고 빗속을 달려 나가신다. 아니, 천천히 다녀오시라니까.
내가 친절하게 하면 할수록 손님들은 어쩔 줄 몰라하시며 나에게 더 친절하게 해 주신다. 친절하면 사람들이 만만하게 보고 함부로 대한다고들 하던데, 우리 손님들은 내가 베푼 친절보다 더 큼직한 친절로 나에게 돌려주신다.
손님들의 친절한 반응을 바라고 친절함에 집착하는 건 아니다. 물론 나에게 친절하게 해 주시는 손님들에겐 너무너무 감사하지만, 나는 그냥 내 마음 편하려고 친절함에 욕심을 낸다.
어차피 말하는 거라면 기분 좋게 말하고 싶다. 잠깐 짜증이 난다고 말을 대충 내뱉어 버리면 듣는 사람도 기분 나빴겠지만, 두고두고 내 마음이 무겁다. 나는 내 마음 편하려고 친절을 일삼고 기분 좋은 말들을 연구한다. 그렇게 나는 나의 치트키들을 하나씩 저장해둔다.
나는 치트키를 사용하며 기분이 좋다. "편하게 하세요^^", "천천히 하세요^^"라는 말을 하며,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카페 사장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심지어 들으시는 분들이 그 말들을 듣고 기분 좋아해 주시니, 더 바랄 나위가 없다.
기분 좋은 말만 해야지. '수다는 금'이 속담이 되는 그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