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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하면 나올 때도 되지 않았니?

내 파견 생활 고충의 8할은 물

by 다온

우리 엄마는 딸들이 모두 자발적으로 아프리카에서 1년 또는 2년을 살다 보니 티비에 나오는 아프리카 소식을 그냥 흘려듣지 않으신다. 어느 날은 아프리카 우물 파주기 운동을 보시고는 보츠와나 사람들도 흙탕물을 마시냐고 물어보셨다. 보츠와나는 아프리카 국가들 중 형편이 낫고 정비가 잘 된 편이라 그 정도는 아닌 걸로 알고 있다. 다만 물이 아예 안 나올 뿐이다.


우리 동네는 물이 안 나오는 지역이었다. 단수는 2018년 12월부터 시작되었다는데 내가 살던 2019년 내내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수도국(Water Utility)에 문의해도 그 이유와 종료 시기를 몰랐다. 아프리카니까 제반 여건을 어느 정도 감수한다 해도 물과 전기만큼은 제발 문제없길 바랐는데 물이 없는 곳으로 오게 됐다. 나의 발령지 생활은 이렇게 처음부터 가시밭길 같았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여기만 겪고 있는 문제라 보츠와나에 있는 어떤 한국인도 내 사정을 체감하지 못했다. 나와 같은 지역에 파견된 분은 교육청 관사에 사시는데 거기는 관공서라 물 공급이 원활해 역시 내 입장과 달랐다. 원래부터 집에 수도 시설이 없어 물을 밖에서 길어다 쓰는 주변 현지인들이 많은데, 상황이 이렇게 되니 사람들은 물을 구하기 위해 더 멀리 가야 하고 아예 물과 단절된 생활을 해야 했다. 수도국에서 물을 살 수는 있지만 물 가격 외에도 물을 담아갈 대용량 물통과 이를 운반할 트럭도 있어야 한다는 부담이 있기 때문에 일용직의 보통 사람들에게는 가능한 방법이 아니었다. 우리 학교 교사들 중에는 차나 리어카에 빈 통을 여러 개 싣고 와 학교 물탱크에서 물을 받아가기도 했다. 그나마 내가 사는 관사는 윗집, 아랫집이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2000L 물탱크가 있어서 물이 나오는 날이면 탱크에 물을 채워놓을 수 있다. 탱크에 물을 가득 채우면 보통 한 달 정도 사용할 양이 된다. 물탱크 내부를 청소했을 리도 없고 수질 자체도 안심할 수 없지만 보기에 투명한 물이라는 것에 만족해야 했고, 가끔씩 탱크 하부에 가라앉아있던 이물질이 물과 함께 섞여 나와도 애써 모른체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무뎌지지 않으면 살 수가 없 때문이다.


우리 집에 거주한 지 한 달만인 2월 5일에 처음으로 물이 나왔다. 이때의 감격을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런데 몇 시간 후에 물은 다시 끊겼다. 그 좌절감 또한 어찌 말로 표현하랴. 단수가 이제 끝난 줄 알고 얼마나 좋아했는데 물은 그렇게 맛보기로 잠깐 나왔다 끊겨버렸고, 이럴 거라 예상하지 못한 나는 물을 통에 받아놓지도 않았다. 당장은 내가 이사 오기 전에 윗집 사람이 탱크에 받아둔 물을 이용할 수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탱크 수위가 바닥에 가까워졌다. 사람들은 나보다 물 사용량도 적고 이런 상황에 익숙하지만, 나는 살면서 물이 부족해 본 적이 없고 물 없이는 생활이 불가능한 사람이라 멘붕에 빠졌다. 내가 현지 생활을 하며 도움을 구할 곳은 교육청과 학교뿐인데 이 일은 교장선생님의 역량 밖이라 나는 교육청에 도움을 요청했고, 다행히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교육청에는 급수차(Water Bowser)가 있어서 다른 지역에서 퍼온 물을 학교 등으로 공급하는데 우리 집 탱크도 채워준 것이다. 이건 외국인이라 받은 특혜이긴 했다. 앞집 사는 우리 학교 직원이 '왜 미스킴만 물을 주냐'며 불공평하다고 학교에서 말하는 걸 들었는데 나도 우선은 살아야겠으니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본인 집에 물이 없다며 나눠 달라기에 그러시라고 했다. 이웃의 불평을 듣고 나니 급수차를 또 부르기가 눈치 보였지만 정말 어쩔 수 없어서 그 후로 한 번 더 교육청의 도움을 받았다.


상반기에는 물이 한 달에 한 번 정도 나오다가 하반기에는 횟수가 약간 늘었다. 물이 나오는 날은 축제였다. 관사 사람들은 가느다란 호스를 마당의 수도꼭지에 연결해 밤새도록 물탱크를 채웠다. 탱크는 윗집과 아랫집이 번갈아가며 채운다. 연탄 들이고 쌀 들이면 마음이 든든하다던 얘기를 나는 보츠와나에서 우리 집 물탱크를 채우며 실감했다. 반대로 물이 줄어들수록 나는 불안해졌다. 나는 다른 집들이 얼마나 물을 쓰는지 모르지만, 생활 방식을 보면 식구가 많은 이웃들보다 1인 가정인 내가 쓰는 물의 양이 훨씬 많을 수밖에 없었다. 빨래나 설거지도 더 자주 하고 요리를 하거나 세제 거품을 헹굴 때도 몇 배를 더 쓰고, 사람들은 머리를 감지 않지만 나는 머리 감는 데만 물통 하나를 다 비웠다. 물을 아껴보려고 일회용품도 쓰고 빨래나 청소 횟수도 줄이고 긴 머리도 자르고 매일 감던 머리를 이틀, 삼일까지도 견뎌보는 등 나름의 노력을 했. 하지만 생활 패턴이 통째로 현지화되지 않는 이상 소비하는 물의 양을 더 줄일 수도 없었다.


버티다 도저히 안 되면 나는 금요일에 퇴근을 하자마자 수도로 피난을 갔다. 물 때문에 전전긍긍하며 살다가 수도에서 펑펑 나오는 물을 보면 원시에서 현대로 넘어간 기분이었다. 샤워기에서 뜨거운 물이 나오는 것은 천국의 경지다. 물로 인한 험한 한 해를 보내고 나니 '나를 물로 보니?'처럼 물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막 표현되는 게 이상하게 들린다. 이제 나는 '가족은 나의 물이야'처럼 정말 귀한 걸 표현할 때 물을 언급할 것이다.

2019.2.5. 처음으로 집에 물이 나온 날. 이 감격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2019.2.28. 교육청에서 보내준 급수차가 탱크를 채워주고 있어요.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나는 입으로 직접 들어가는 모든 물은 생수로 했다. 식수, 요리, 양치 후 마지막 헹굼물 등에 사용되는 생수의 양은 적지 않았다. 생수는 마트에서 5L짜리로 샀는데 만약 내 차가 없었다면 물을 사다 나르는 게 얼마나 고통이었을까. 보츠와나의 물은 석회가 많은데 우리 지역은 수도꼭지에서 물과 함께 흰 고체가 섞여 나올 정도로 특히 더 심했다. 유럽의 수돗물에 석회질이 많다 보니 정수기 산업이 발달하게 되었고, 식기에 흰 석회 자국을 안 남기려고 설거지 후 마른 천으로 물기를 닦아내는 문화도 생겼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내가 날마다 석회를 의식하며 살게 될 줄은 몰랐다. 수돗물을 끓이면 하얗고 납작한 고체가 생기고, 전기 포트 내부의 코일은 석회로 뒤덮이는데 그냥 긁어내서는 떨어지지도 않았다. 그래서 전기 포트도 2개를 사서 하나는 식수용으로 생수만 붓고 다른 하나는 샤워용으로 여기에는 수돗물만 부어 사용했다.


머릿결과 피부가 거칠어지고 물이 닿는 모든 것에 하얗게 자국이 남는 걸 보니 내가 석회의 영향을 직접 받고 산다는 걸 늘 체감하며 살게 됐다. 하지만 보츠와나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외국인들은 무조건 생수 아니면 정수기로 거른 물을 마시지만 현지인들은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 물탱크에 가둬진 물, 끓인 후 하얗게 석회가 떠올라 있는 물을 그대로 마셨다. 내가 여러 사람들에게 석회 이야기를 꺼내봐도 사람들은 '끓여마시면 괜찮다, 항상 이렇게 물을 마셔왔다, 석회는 건강과 관련 없다'고 말했다. 외국인과 현지인의 물을 대하는 모습이 이렇게 다른 배경에는 인식의 차이도 있겠고, 이를 감당하고 대처할만한 경제적 여건의 문제도 있는 것 같다. 내가 쓰던 브리타 정수기 2개를 귀국할 때 현지인에게 주려고 했는데 필요하다고 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생각해보니 만약 그 용도를 안다고 했어도 필터의 가격이 비싸고 수도의 쇼핑몰에서만 살 수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5L짜리 생수는 미리미리 사다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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