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의 적
“원감님, 들어온 서류 분류하고, 또 학기 시작 전에 전화도 돌려야 하고, 가방장, 옷걸이 등 이름표도 붙여야 하는데, 회의 나중에 하면 안 될까요?”
“아참, 너네 유아학비카드 다음주에 유아수첩 앞에 테이핑해서 나가야한다!”
원감이 불현듯 생각난 유아학비카드에 대해 이야기하곤, 여은과 선화를 바라보며 특유의 익살스런 말투로 대답했다.
“이게 또 새학기의 묘미 아니냐, 이렇게 휘몰아치듯이 바쁘고 나면 또 한동안 잠잠하잖니”
서류 분류, 전화 돌리고, 이름표 붙이고... 당최 어떤 일인지, 노동의 강도는 어떤지 등 가늠이 안 오는 초임교사 주혜는 왜 대학교 때 그 누구도 새학기 준비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그놈의 피아제나 비고츠키말고 예쁜 이름표 도안 찾는 법이라든지, 학부모와의 첫 통화 팁이라든지... 이런 거나 알려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하는 강한 불만을 뒤로한 채, 옆에 앉아 다이어리에 오늘 해야 할 일을 체크리스트로 만들고 있는 현주에게 물었다.
“쌤은 환경 구성 다 했어요?”
현주가 전에 일하던 유치원에서도 수료 날짜가 늦어서, 으레 신입 교사들이 1,2월에 먼저 출근하여 유치원의 일손을 돕는, 무급 혹은 차비 정도만 챙겨주면서 ‘이게 다 경험’이라며 온갖 잡일을 다 시키는 동안 신입 교사들은 어색함 속에서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똘똘 뭉칠 수밖에 없는 날에 올 수 없었다. 그래도 사람을 무장해제 시키는 따뜻한 미소와 나긋나긋한 말투로 현주와 주혜는 어색한 기운을 금방 부수고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리고 교사실에 먼저 출근해 대기하고 있던 지연을 만났다. 주혜와 미래, 현주는 담임 교사, 지연과 유림은 부담임 겸 종일반 담임 교사로 입사한 첫날이었다. 현주는 아직 유치원에서 수료가 마무리되지 않아서 새학기 직전에 출근한다고 해서, 주혜는 2주간 미래, 유림, 지연과 함께 유치원 부지런한 일손이 되었다. 2주 동안 한 일은 새학기 준비의 연장선이었다. 복도에 있는 큰 환경판을 채울 새학기 느낌이 물씬 나는 도안을 찾고, 다양한 색깔의 색지를 오려 게시판에 붙이는 일이었다. 우리가 찾은 도안은 푸른 언덕 위에 큰 벚꽃나무가 있고, 토끼, 기린, 사자, 다람쥐가 기차에 타고 있었다. 그리고 하늘에는 귀여운 통통 글꼴체로 ‘환영합니다’라고 적혀있었다. 주혜와 지연은 같은 초임이지만, 지연은 대학을 갓 졸업한, 아직은 학생티가 역력한 초임이었고, 주혜는 카페, 학원 등 다년간 다져진 맷집같은 사회성으로 나름의 여유와 능글거림을 가진 초임이었다. 초임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서 그런지, 주혜와 지연은 분홍색 색지 위에 토끼를 그리고 오리며 빨리 가까워졌다. 4년차 교사였던 미래는 각 반의 신발장, 옷걸이에 붙일 이름표 작업을 했다. 주혜는 경력이 있어서 그런지 자신과 지연보다 비교적 쉽게 원감님, 원장님께 다가가 이것, 저것 물어보는 미래를 보며 생각했다.
‘저것이 바로 짬바의 바이브인가’
미래는 휴대폰 화면으로 이름표 도안 몇 가지를 보여주며 말했다.
“원감님, 이 도안으로 연령별 색깔을 나눠서 할까요? 작년엔 연령별로 색깔 어떻게 다르게 했어요?”
“이 도안은 3년 전에 신발장 이름표로 썼던 거니까, 밑에 있는 걸로 하자. 5세는 노랑, 6세는 분홍, 7세는 파랑으로.“
원감이 2021년 반배정 원아 명단을 미래에게 건네며 말했다. 미래는 컴퓨터 앞에 앉아 원아 명단을 도안 위에 빠르게 입력했다. 원감과 함께 에듀파인과 기타 행정 업무를 도맡아 하는 원장님의 조카이자 이 유치원 차기 원장 후보인 은욱이 말했다.
“쌤 타자 엄청 빠르네요.”
미래는 시선을 모니터에 고정한 채 대답했다.
“그런가요?”
은욱으로 말할 것 같으면 원장의 하나뿐인 조카로 전공인 경제·경역학과를 바탕으로 유치원 경영을 배울 차기 후계자같은 존재다. 하지만 본투비 왕자님으로 자존심은 물가처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대신 일머리는 월급처럼 늘지 않는다. 은욱은 유치원에 등장하기 전부터 시끌벅적 그 자체였다. 원장의 조카라는 자가 최저시급을 받으며 유치원에서 일손을 도우러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교사들은 술렁였다. 힘 쓸 일이 생길 때 필요하지 않겠냐는 찬성파와 원장의 가족과 일한다는 자체에 불만을 갖는 반대파가 분분했다. 특히 여은은 이제 교사실에서 원장님 욕 못한다는 사실에 크게 분개했다. 일개 사원이 분개해봤자 오너가 콧방귀나 뀔까? 은욱은 예정대로 월요일에 출근했고, 왕자님답게 행동했다. 왕자님답게 식후 몰려오는 졸음떼와 다투다 장렬히 전사하여 교사실에서 꾸벅꾸벌 졸기 일쑤였다. 그리고 왕자님답게 근무하다가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물어봐서 해결하기보다 직감적으로 해결해 원감이 뒷수습하기 바빴다.
눈치는 집에 두고 왔는지, 원감과 교사가 유아의 문제 행동을 어떻게 지도할 것인가에 대한 심도 깊은 대화에 ‘저 어릴 때도 그런 적 많아요.’라고 말하며 끼어들며 대화의 본질을 흐리는데 국가대표 선수였다. 보다 못한 여은이 놀리듯 말했다.
“은욱쌤 그런 사담은 집에 가서 하는 게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