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감님... 혹시... 우산... 남는...”
잠시 모니터에서 눈을 뗀 원감은 마치 문 앞에 결계라도 있는 듯 선뜻 들어오지 않고 기둥에서 고개만 빼꼼 내민 주혜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우산? 어머 밖에 비 오니? 우리 애는 우산 챙겨갔나 모르겠네. 남의 자식 챙기느라 내 자식은 이렇게 뒷전이다. 저기 신발장 옆에 쪽문 하나 있거든? 거기 열면 우산 많이 있을 거야”
방금까지 모니터를 노려보며 프로의 포스를 뽐내던 원감의 모습은 사라지고, 자식 잘 키워보겠다며 밖에서 열심히 일하는 워킹맘의 모습으로 변했다. 원감의 수다스러운 모습으로 잠시나마 숨 막힐 듯한 교사실의 공기가 탁 트인 듯 맑아졌다. 다들 모니터에서 잠시 눈을 떼고, 원감님의 말에 살짝 웃고, 텀블러에 든 음료로 목을 축이고, 휴대폰에 밀린 알람들을 확인하는 등 개인적인 시간을 소비하기 시작했다. 주혜가 깨트린 건 집중력의 흐름 따위가 아니라 숨 막히는 정적을 깬 거였다. 묘한 희열감이 느껴지는 동시에 미래에 자신도 숨조차 사치인 분위기 속에서 일해야 한다는 사실에 강한 압박감을 느꼈다.
“아 신발장 옆 쪽문이요? 감사합니다!”
아까의 멍청스러운 모습이 아닌 야무진 모습으로 대답한 후 쪽문을 향해 걸었다. 고작 저 대답 하나로 야무지다고 생각할 리 만무하지만, 아까와 비교하면 야무질 뿐만 아니라 빈틈 없는 차가운 유치운 여자로 보였을 확률이 높다. 혼자 실실 웃으며 주혜는 쪽문을 열어 편의점에서 5000원에 판매하는 투명 우산 여러 개가 즐비한 우산 통을 어렵지 않게 발견했다. 필수 살 때는 주인이 명확했지만, 가져갈 때는 어느 것이 자기 우산인지 명확하지 않은, 주인 잃은 무늬 없는 우산들 잔치였다. 간혹 캐릭터가 잔뜩 그려진 어린이용 우산도 보였는데, 아마 우산을 깜박하고 챙기지 못한 원생들의 것이지 않을까 추측하던 중 우산 하나를 골라 멀쩡한지 살폈다. 깜박깜박하는 건 애나 어른이나 똑같다고 느끼며 우산을 요리조리 살폈다. 부러지진 않았는지, 캡은 잘 씌워져 있는지 등을 살핀 후 쪽문을 닫는 순간, 그 뒤에 있는 온갖 비품들이 눈에 띄었다. 세제부터 체중계, 수동 신장계 등 어떠한 기준이나 분류 따윈 없는 무질서와 무법 천지인 이곳을 자주 드나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우산을 야무지게 챙겨들고 교사실을 향해 다시 고개만 뺴꼼 내밀어 상황을 살폈다.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모니터로 향하던 12개의 눈이 한 곳에 쏠리니 새삼 모니터의 기분이 어떤지 알 수 있었다. 주혜는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하나 눈을 굴리는 순간, 원감님 위에 달린 시계를 발견하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6시가 조금 넘었는데, 왜 아직도 다들 퇴근할 준비는커녕 도비 모드를 계속 유지 중인거지?’
사회초년생이 이해하기 힘든, 아마 원감님이 들으면 MZ라 다르다라고 말씀하실 이 생각은 마음속 심해 저 깊은 곳에 넣어두고, 애써 만면에 미소를 그린 채 인사했다. 일찍 퇴근하는 자신을 향한 시선이 부러움의 시선인지, 그 시선 속에 날이 서있는지 가늠이 안 가게끔 힐긋 쳐다본 12개의 눈은 다시 모니터로 향했고, 제 목소리만 허공에 퍼진 채 무안해진 주혜는 꾸벅 인사하고 신발장으로 향했다. 누리끼리한, 그러니까 구매할 땐 어떤 코디든 무난하게 받쳐주는 눈부신 하얀색이었던 그 신발이 지금은 아이보리... 정확히는 아이보다는 보리에 가까운 신발이 이상하게 낯설게 느껴졌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신었던 신발임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신어서 곧장 밖으로 나가면 안될 거 같은 서늘한 느낌이 뒷목을 훑고 지나갔다. 그때 그 느낌이다. 대한민국에서 대학을 가기 위한 등용문인 수능을 치르고 얼마 안 되었을 때, 머리의 피와 맞먹는 급으로 주민등록증의 잉크도 채 다 마르기 전인 마지막 10대를 화끈하게 보내자는 영서의 말에 못이기는 척 따라 나섰던 호프집 냄새가 나는 듯 하다. 내 몸에 흐르는 게 피인지 술인지 모를 정도로 퍼부어마셨던 그날, 우리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재연하듯 ‘날 버리고 먼저 가!’, ‘아니, 죽더라도 같이 죽자!’ 연신 외치며 의지할 수밖에 없는 눈물겨운 동지애를 발휘하여 귀소본능에 따라 집에 가던 길목이었다. 골목을 돌 때부터 급격하게 말수가 줄어든 영서는 갑자기 입을 틀어막더니 ‘웁,우웁’을 반복하다가 몸을 크게 반동했다. 다수의 드라마와 영화에서 보았듯이 이건 필시 영서가 먹은 것들의 조화롭지 못한 조화를 보여주는 신호다! 첩보영화의 주인공처럼 아주 날렵하고 기민하게 피했다. 빛보다 빠르게! 하지만 알코올은 정신을 지배할 뿐만 아니라 신체의 각종 신경을 꽉 틀어잡고 있어서 평소보다 더딘 운동신경을 보여줬다. 분명히 재빠르게 몸을 돌려 영서를 전봇대 쪽으로 밀었던 거 같은데, 발에 있는 신경줄이 굵고 무거웠나보다. 미처 피하지 못한 주혜의 오른발은 우리가 안주로 신나게 먹은 벌건 닭발에 붙은 고춧가루와 야무지게 뜯어 먹은 튀김의 노란물의 콜라보로 덮였다. 영서가 새로 산 하얀색 운동화를 보고 ‘신고식!’하며 발을 밟으려고 했을 땐 민첩한 움직임으로 사수했던 운동화였는데, 결국 영서에 의해 이렇게 알록달록 예쁜 작품이 되었다. 지나가는 개미만 봐도, 굴러가는 낙엽만 봐도 웃음이 날 나이는 아닌 거 같은데 웃음이 났다. 술 때문인가, 아무튼 깔깔대느라 바쁜 주혜를 보고 영서는 나지막히 말했다.
“주혜야... 임주혜에에... 너 챙겨, 그거 꼭 챙겨”
이와중에도 버려질 자신부터 챙기는 모습을 보자니, 주혜는 이제 웃음이 헛웃음으로 바뀌었다. 영서는 입 주변을 대충 손으로 슥슥 닦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너한테 세탁값 받으려면 너 얼어죽지 않게 꼭 챙겨야지”
멕아리 없이 전봇대 옆에 쓰러진 영서의 겨드랑이를 받쳐 들어서 부축 자세를 취하자 영서의 콧김이 귓가에 닿아 소름이 돋는 동시에 간지러워 다시 웃음이 터질랑말랑 할 찰나에 영서가 다시 중얼거렸다.
“아니, 나 말고 눈치, 눈치 챙기라구, 너 대학가서 그러면 큰~일나 아주...아주... 아주 나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