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혜가 손뼉 치며 말하자 지연이 금새 시무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도 그러고 싶은데, 전 9시 30분에 출근하고 5시 30분에 퇴근해서 안될 거 같아요.”
처음 듣는 소리였다. 담임, 부담임 모두 8시 30분 출근, 6시 퇴근이라고 면접 때 들었는데, 이건 무슨 소리인가?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주혜에게 지연이 서둘러 덧붙였다.
“저는 시에서 주는 처우개선비를 못받아서 일찍 퇴근하래요.”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궁금증으로 물음표가 가득한 표정을 바라보던 지연이 한숨을 푹 쉬고 말했다.
“경기도는 부담임 겸 종일반 담임에게 주는 처우개선비가 줄 수 있는 인원 수가 2명이래요. 그래서 5,6세 부종 선생님이 경력이 많으시니까 두 분이 받기로 했대요. 그래서 전 7호봉만 받고 일하기로 했어요. 계산해봤는데 사학 연금 떼고 나면 거의 최저도 안 되는 금액이어서 정말 하기 싫은데, 다른 유치원도 비슷할 거 같아서 1년 경력 쌓는다고 생각하면서 다니려고요.”
랩처럼 쏟아내는 말에 휘청이길 여러 번이었다. 아니, 학급수가 많은 유치원에서 근무하는 부담임 겸 종일반 선생님이 여러 명일텐데, 그중에서 2명만 준다는 건 무슨 말인가? 담임은 인원 수에 상관없이 처우개선비가 지급되지만, 부담임 겸 종일반 담임 즉 부종은 학급 수에 상관없이 2명만 준다니. 복지의 사각지대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아... 몰랐어요”
주혜가 물어보지 못할 걸 물어봤다는 낭패감에 미안한 기색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더 웃긴 건, 작년까지는 1명이었대요. 그래서 주변 친구들한테 물어보니까 만약 부종이 3명이면 그 처우개선비를 1/3해서 나눠 갖는 곳도 있고, 저희 원처럼 경력 제일 많은 사람한테 주는 곳도 있다고 하더라구요.”
이미 처우개선비에 대해 알아볼 만큼 알아본 지연이 체념한 채 말을 이었다.
“솔직히 이 직업이 처우개선비 없으면 진짜 박봉인 직업이잖아요. 그래서 올해는 그냥 경력 쌓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서 1년 존버 해보려고요. 원장님도 처우개선비 못받으니까 다른 선생님들보다 늦게 출근하고 일찍 퇴근하라고 하시더라고요. 거의 파트타임처럼”
불만을 쏟아내며 계단을 내려오자 일찌감치 가방을 메며 퇴근 준비에 진심인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다. 미래도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처우개선비 못받으니까 다른 사람들보다 늦게 출근하고 일찍 퇴근하는 특혜 아닌 특혜를 특혜로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이게 과연 맞는 보수 급여 방식인가? 물음표 살인마처럼 궁금증이 차올랐지만, 분명 자기가 모르는 이 세계만의 암묵적인 관행과 규칙이 있을 수 있음에 주혜는 스스로를 달랬다. 미래는 주혜와 지연에게 실내화를 정리하고 신발을 미리 신발장에 놓고 인사드리는게 어떤지 물었다. 미리 신발장에 신발을 두면 원장실에 있는 원장님과 원감님께 인사드리고 퇴근하기에 딱 적절한 동선이었다. 역시 대선배의 짬바란 이런 걸까? 고개를 끄덕이며 신고 있던 손님용으로 예쁜 프릴 리본이 달린 실내화는 신발장에 넣어두고, 다 헤진 신발끈이 흐늘거려 마치 예쁜 프릴처럼 보이는, 유구한 역사로 원래 이 색인지, 때가 탄 건지 알 수 없는 주혜의 운동화를 물물교환하듯 꺼냈다. 바로 옆에 빤딱거리는 앞코를 자랑하는 구두를 놓는 미래를 보며 주혜는 문득 자신의 신발이 부끄러워서 당장 던져버리고 싶었다. 시큼한 냄새가 날 거 같은 위압감을 풍기는 운동화보다 반딱거리는 저 구두가 나타내는 선배와 어른 사이, 그 어중간함을 나타내고자 언젠가 자신도 저 빤딱 구두를 신겠노라 다짐했다.
“원장님께 인사드릴까요?”
대답할 틈도 없이 원장실로 가는 미래를 보며 다급하게 인사말을 생각했지만, 생각나는 건 ‘안녕히 계세요’밖에 없는 자신의 문장력을 탓하는 사이 미래가 원장실 문을 두 번 두드리고는 열었다.
“원장님, 저희 먼저 퇴근해보겠습니다. 비도 오는데, 오래 일하시지 말고 원장님도 얼른 퇴근하세요.”
흘러넘치는 여유가 흐르다 못해 바닥에 질척일정도로 흐른 이 대사에 주혜의 머릿속은 백지가 되었다. 원래도 하얀 백지에 먼지 한 톨 앉을 틈도 없이, 아까 그 빤딱 구두처럼.
“원장님, 먼저 가보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헉, 믿었던 지연마저 깔끔한 인사를 해버리자, 주혜는 급속도로 다가오는 긴장의 헤일에 빠져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워,원장님, 가,가보 아니 안녕히 계세요? 가,감사합니다”
원래 하려던 인사말은 믿기 힘들겠지만 ‘원장님,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일 뵙겠습니다!’였다. 대체 왜 안녕히 계세요에서 톤을 올렸으며, 무엇이 감사한가!
“그래요. 비 오는데 우산 없으면 유치원에 남는 우산 많으니까 쓰고 가고. 내일 봐요”
면접 때처럼 컴퓨터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이야기하는 원장님을 향해 미래와 지연, 주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원장실을 뒤로 하고 나왔다.
제발 아무도 인사말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통했는지, 아직 어색한 사이에 대한 배려인지 미래와 지연은 신발장을 향해 걸어가며 자연스럽게 우산이 있는지에 대해 물었다.
“저는 아빠가 퇴근하는 길에 데리러 오신다고 해서요. 바로 요 앞에 차 댈 거 같아서 우산 따로 안 챙겨도 될 거 같아요.”
지연은 손가락으로 유치원 앞 주차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행이다. 주혜쌤은요?”
미래가 알록달록 도트가 그려진 우산의 단추를 풀며 물었다. 난생 처음 생긴 선배란 사람이 갖고 있는 물건은 다 어쩜 저렇게 귀엽고 멋드러져 보이는 걸까? 기껏해야 땡땡이 주제에.
“아 전 유치원 우산 빌려가야할 거 같아요.”
“정류장까지 같이 가면 좋은데, 아쉽네요. 그럼 내일 봐요”
달칵 소리와 함께 미아 방지를 위해 설치한 열림 버튼을 누르며 미래가 말했다. 지연도 함께 문을 나서며 양손을 신나게 흔들며 인사했다. 선배인 미래에게 손을 흔들어도 될까 고민하면서 엉거주춤 고개도 숙이며 손도 흔드는 멍청한 자세로 뒷걸음질했다. 오늘의 멍청이 적립이 있다면 100만 포인트는 적립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뿔사! 유치원 남는다던 그 우산이 어디있는지 미래에게 물어봤어야 했는데! 주혜는 현관 바로 옆에 있는 교사실을 빼꼼 쳐다보며 안의 상황을 살폈다.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컴퓨터 모니터 화면을 보고 손은 바쁘게 마우스 커서를 달칵거리거나 키보드를 박살낼 듯이 두드리고 있었다. 여기 유치원 신조는 모니터를 잘보자인가, 원장부터 시작해서 모두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자 주혜는 미처 그 작고도 소중한 우산이 어디 있냐는 질문을 던지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그들이 전신으로 보여주고 있는 집중력을 흩트리거나 흐름을 깨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주혜에게는 우산이 너무나 절실했기에 개미 응가 구멍만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원감님... 혹시... 우산... 남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