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메론 Aug 09. 2020

3. “(도시락을 던지며) 도대체 나다운 게 뭔데?”

- □□■ 저는 아직 충전 중입니다 -



도대체 나다운 게 뭔데?



  옛날 드라마를 돌려보다가, 구닥다리 같은 대사가 나왔다. 대사를 듣는 순간,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불과 몇 년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런 드라마 대사를 들으면, 바로 눈물콧물을 짜냈다.

  하지만 유구한 드라마 역사 속에서 이렇게 주구장창 쓰여진 대사란 걸 생각해보면, ‘나다움’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듯 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장르를 불문하고 쓰이겠느냔 말이다.

  하기야, 그런 드라마 대사를 들으면 몸서리치는 나도, ‘나다움’에 대해 자세히 모른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대학 수업 종강 후, 나는 방송작가가 되고 싶어 열심히 자기소개서를 썼다. 그 중 일부를 옮겨본다.


오랫동안 키워온 방송작가의 꿈 / 어린 시절 저는 책 읽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습니다 (중략)
성실함과 사교성은 나의 무기 / 지금 있는 자리에서 안주하지 않고 경험을 차근차근 쌓아 더 많은 장점을 만들고 싶습니다 (중략)...


  방송작가로서 일한지 십여년이 된 지금, 다시 살펴보니 자소에 가깝다. 자기소개설을 다시 한번 되짚어보자면, 방송작가라는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은 대략 1~2년 정도 밖에 안 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책을 읽는 걸 좋아하는 건 맞지만, 읽은 것을 또 읽는 걸 좋아했다. 허준 일대기를 서른 번을 읽고, <명탐정 코난>을 한 권당 마흔 번 넘게는 읽었으니 책 읽기를 좋아하는 건 맞긴 하다. 성실하기보다는 내가 어떤 일을 해내지 못할까봐 애진작부터 매달리는 성격이다. 사교성은 눈꼽만큼도 없다. 아마도 나 자신을 지나치게 모르거나, 어떻게 해서든 빨리 취업하고 싶었나보다.


  그리고 오랜 시간 프리랜서로 일하며,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수많은 프로그램을 했고 또 수많은 시간을 쉬어본 뒤 도출한 ‘나다움’이란 이렇다.


  체력이 매우 약함. 꾹 참음.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함. 극도로 조용함. 행동이 매우 느림.


  과거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나는 막내 작가 시절, 한 주에 사흘씩 밤을 샜다. 요즘 주부들이 좋아하는 패션 트렌드도 조사해야했고, 이를 뒷받침할 스타일리스트를 찾아 인터뷰도 요청해야 했다. 프리뷰, 보도자료 작성, 아이템 서치, 촬영구성안 작성, 저녁식사 주문 등. 이 모든 일을 해내려면, 내가 잠을 줄이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고도 방송이 끝난 날, 다섯 시간 즈음 자고 일어나서 다시 아이템을 찾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밥을 잘 안 먹거나, 거르는 일도 많아졌다.

  그 시절의 나는 이러한 상황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좋다, 싫다라고 표현하지도 않았다. 입봉을 못 하는 그 때에도, 서운하다거나 하고 싶다는 티를 못 냈다. 원래도 소심하고 말이 없었던 편이었는데, 더 말이 없어졌다. 자기소개서에서 ‘사교성은 나의 무기’라고 했던 사람은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래서 더 많은 사람을 현장에서 만나고,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하는 프로그램으로 넘어올 땐, 모두가 나를 걱정했다. 제풀에 지쳐 떨어져 나갈 거라고 했다.  

    

  처음으로 야외 촬영을 나간 날, 나는 이미 머릿 속이 빙빙 돌고 있었다. 그날 촬영을 준비하면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실수를 했고 된통 깨졌다. 그 상태로 꼬박 이틀을 밤샌 채 촬영을 준비했기 때문이었다. 하필 그날 날씨는 찜통을 방불케 했다. 간단한 프롤로그 촬영을 마친 뒤, 점심시간이 주어졌다. 점심 메뉴는 도시락, 먹는 장소는 길바닥이었다. 당연히 출연자에게 도시락 선택권과 먼저 먹을 시간이 주어졌다. 나는 출연자들이 도시락을 먹는 동안, 다음 촬영이 잘 진행될지 준비가 잘 됐는지를 체크했다. 그때 옆에서 솔솔 냄새가 풍겨왔다.

  

   하얀 쌀밥은 도시락의 가장 넓직한 칸을 차지하고 있었다. 뚜껑에 눌렸지만 물기 때문에 밥알 하나하나가 반들반들했다. 도톰한 달걀말이, 무더운 날씨 때문에 살짝 시든 김치와 나물 같은 반찬들, 그리고 가장 바삭바삭했을 때 식칼로 턱턱 썰어냈을 두툼한 돈가스까지. 도시락은 빈 틈이 없었다.


   사실 나는 그때까지도 도시락을 내 돈 주고 사먹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출연자들에게 주어진 그 도시락이 어찌나 맛있어 보이던지. 거기다 촬영 전날까지 터트려버린 실수 때문에, 나는 윗분들 눈치만 보고 있었다. 순간, 도시락을 먹으면 안될 것 같았다. 제대로 일도 못하는 애가, 입에 밥이나 밀어넣고 있으면 얼마나 식충이처럼 보일까 싶었던 거다.

  잠시 후, 출연자들이 식사를 마쳤고, 제작진들에게 식사시간이 주어졌다. 시간은 단 십분. 먹는 게 느린 내겐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밥을 거를까 잠시 고민했지만, 연이은 피로와 허기가 고민을 꺾었다. 나는 억지로 밥을 크게 퍼서 한입에 넣었다. 돈가스도 자르지 않고 한입에 넣었다. 살면서 그렇게 급하게, 큰 한 입을 먹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대충 씹어서, 대충 넘겼다. 몇 숟가락 먹지도 못했는데, 순식간에 십 분이 지나갔다. 돈가스 한 조각을 미처 먹지 못한 게 너무나 아쉬웠다. 조금만 더 대충 씹고 빨리 넘길걸. 도시락 상자와 남은 음식물은 모두 한군데 모아졌다. 나는 배가 헛불러서, 한참동안 스스로 윗배를 꾹꾹 눌러줘야만 했다.




  곧 촬영이 시작됐다. 내 담당 출연자는 이리저리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담당 작가인 나도 덩달아 뛰어다녔다. 나는 이틀간 밤을 샜고,
밥을 마시듯 먹은 사람이었는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모르겠다.


  출연자가 돌발 행동을 하면, 순간적으로 더 재미있는 상황을 고민해 던져줘야 했다. PD님과 이런 상황은 어떨지, 저런 상황은 어떨지를 그 자리에서 급하게 아이디어를 냈다. 그리고 카메라에 걸리지 않으려 요리조리 피해다니느라 진땀을 뺐다. 프로그램의 기본 토대가 되는 내용은 꼭 촬영해야 했기에, 촬영을 못한 것이 있는지를 체크해야 했다. 촬영구성안을 들여다보려고 하니, 이미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촬영은 새벽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두세 시간을 쫓겨 잠이 들었다가,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야 촬영이 마무리가 됐다. 촬영이 종료되자 나라는 사람의 스위치를 누가 끈 듯,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이었다. 나는 제대로 씻지도, 먹지도 못해 만신창이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나는 어제보다 0.1cm 성장해있었다.

  나는 이 프로그램을 위해 수많은 인원이, 수많은 시간을 공들여 준비해왔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나 또한 수없이 고민하고, 뛰어다닌다. 조용하고 체력이 약한 나는 잠시 내려놓고, 새로운 나를 꺼낸다.


  책임감이 강함.


  많은 사람들이 내 등위로 책임감을 잔뜩 쌓아올려준다. 너무 많이 쌓아올린 탓에 나는 하루에 0.1cm씩 클 때도 있었고, 정체될 때도 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성장하려 아등바등 애를 쓰는 중이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안도감이 들자 허기가 몰려왔다. 나라는 사람의 스위치를 켜기 위해 필요한 것은 꼴랑 맛있는 도시락이라니, 나라는 인간 참 별거 없다.


이전 04화 6. 전전전 남친에게 연락이 왔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