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인다는 것은 뭘까. 우리는 반사된 빛을 색으로 인지한다. 빨간색은 빨간빛을 반사한다. 우리가 보는 모양은 인간인 우리 눈에만 보이는 것들이다. 개나 고양이는 이 세상을 다르게 본다. 과연 나는 실체를 제대로 보고 있을까? 실체라는 것이 있기는 한 걸까?
내가 만지고 느끼고 보는 것은 내 눈에 담긴 세상이고 사람의 눈에 보이는 세상일 뿐이다.
만약 우리의 눈이 현미경 같다면 세상은 어떻게 보일까? 아마도 온갖 작은 세포들로 보일 거다. 내 얼굴도 손도 지금처럼 보이지 않겠지. 세포는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기구를 이용해야만 그 세계가 보인다. 그렇게 배웠고 그래서 알고 있는 것들이 많다.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우리가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배운 것을 벗어나지 못한다. 저 너머를 보는 일이 어려운 이유다. 이 세상은 홀로그램이란 말이 있다, 내가 본다는 건 인간의 시야란 한계에 갇혀있고 실체는 알 수 없으니 모든 건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떤 문제도 실체도 제대로 알고 있는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것에 대해 논한다는 것이 의미가 없구나 싶다. 너는 나는 각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고 그 마저도 실체가 아닐 수 있으니까. 물론 어느 정도의 기준은 있다 해도 우린 각자의 세상 속에서 산다. 함께 하지만 다르게 존재한다.
그렇다 해도 우리는 사회에서 함께 정해놓은 것을 학습하며 공통적인 요소들로 말하고 상상한다. 공통분모가 분명 있다. 그렇게 정해놓은 것을 기준으로 소통을 한다. 우리는 학교에서 사회에서그걸 배우고 그렇게 알고 평생을 산다.
그래서 그 너머를 본다는 게 쉽지 않다. 내가 보고 있다는 것에 그리고 알고 있다는 것에 의문을 갖기가 어렵다. 우리가 보는 세상이 우리끼리 너무도 당연하니까. 가끔 예술가의 시선을 통해 우리가 보는 세상의 너머를 보게 된다. 그들은 그 너머를 보는 사람이 아닐까.
보고 있지만 보지 못하는 것,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 우린 그렇게 살아간다. 결국 그저 그 차제로 보면 그뿐이다. 때때로 답답한 마음에 상대를 그리고 나를 분석하고 파헤칠 필요가 없다. 공통분모 외엔 결국 일부분을 볼 뿐이니까. 결국 알 수 없는 것들이니까. 그저 인정해야 할 이유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