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다시, 한 공간에 서다

– 그 1년의 디딤돌 . (11장)

by 이도화
" 아이의 손을 잡고 남편을 만나러 떠나던 날."

1994년 봄이었다.
아이가 막 걷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남편은 북경에서 공부 중이었고,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그를 만나러 떠났다.
거의 1년 만의 만남이었다.
우리 가족의 첫 해외여행이기도 했다.


우리가 만나기로 한 곳은 홍콩이었다.


출발부터 순탄하지는 않았다.
폭풍우가 거세게 몰아쳐
비행기는 홍콩으로 곧장 가지 못했고,
'광조우' 공항에 잠시 머물러야 했다.


낯선 공항 의자에 아이를 꼭 안은 채
나는 한참을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다시 떠날 수 있을지 모르는 시간.
그날의 공기는 유난히 무겁고 길게 늘어져 있었다.


몇 시간 후, 탑승 안내 방송이 나왔다.
다시 비행기에 올라
홍콩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하루가 다 지난 늦은 밤이었다.


아이를 안은 채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도착장 유리 너머로
기다리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천장 조명이 유리 바닥에 희미하게 번져 있었고,
늦은 밤 특유의 눅눅한 공기와
어딘가에서 풍겨오던 커피 향이 뒤섞여 있었다.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남편이 보였다.


전보다 말라 있었고
낯선 옷차림이었지만,
서 있는 모습만큼은 여전히 그 사람이었다.


우리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달려오지도, 소리 내 부르지도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서서,
1년의 시간을 사이에 둔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품에서 몸을 조금 세우더니
낯선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남편은 천천히 다가와
아이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이렇게 컸어?”


그 말이 나오자
그제야 우리가 같은 공간에 서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아이를 남편 품으로 옮겨 주었다.
아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의 셔츠를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그 작은 손이, 그를 다시 아빠로 기억해내는 것처럼.


남편은 아이를 안은 채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았다.


“고생했지?”


그 짧은 한마디에
그동안의 시간이 조용히 스며 있었다.


낯선 도시의 공기를 함께 들이마시며
우리는 비로소 한 공간에 모였다.


우리는 홍콩에서 만나
계림을 거쳐, 서안으로 이어지는 여행길을 함께했다.


여행이라기보다
가족이 다시 하나가 되는 시간이었다.


계림에서는 강을 따라 한참을 배로 이동했다.
물 위로 펼쳐지던 풍경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흘러갔다.
그곳에서는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아이는 그때 막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조심스레 발을 옮기던 그 모습을 보며
남편이 웃듯이 말했다.


“언제 이렇게 컸지…”


그 말 한마디에
떨어져 있던 시간이 또 한 번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서안의 병마총에서 병사 하나하나를 오래 바라보던 아이."

서안에서는
땅속 깊이 묻혀 있다가 세상 밖으로 나온
흙으로 빚은 병사들을 보았다.


줄지어 선 얼굴들이
말없이 오랜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땅속에서 오래 버틴 병사들과,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시간을 견딘 우리의 모습이
문득 겹쳐졌다.


아직 어린아이였지만
아이는 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병사 하나하나를 오래 바라보던
그 또렷한 눈빛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그 시절,
남편은 공부에 몰두해 있었고
나는 아이를 키우며 일을 하고 있었다.


서로 다른 자리에서
각자의 몫을 다하며 시간을 건너고 있었다.


시간이 흐른 뒤 돌아보니
그 1년은 우리 가족이 더 멀리 성장할 수 있게 해 준
단단한 디딤돌이었다.


남편은 공부를 마치고 돌아왔다.
그가 중국에서 버틴 시간은 헛되지 않았다.
회사에서 그의 자리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시작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임신한 몸으로 쉬지 않고 일하던 시간,
엄마와 함께 지하 슈퍼마켓의 불을 켜고 끄던 날들,
아이를 맡기고 혼자 비행기에 오르던 순간들,
그리고 서로를 믿으며 떨어져 있던 시간.


우리는 그 시간들을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건너왔다.


그리고 그 시간 덕분에
우리는 이후의 삶을
조금 더 담담하게,
조금 더 단단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 작가 노트

이 글은 한 가족이 떨어져 있던 시간을 건너 다시 한자리에 서게 된 순간을 기록한 이야기입니다.

누군가의 도약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묵묵히 견딘 시간, 서로를 향한 신뢰, 그리고 말없이 건너온 날들이 모여 비로소 한 사람의 비상이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절의 공기와 숨결을 오래 붙들어 두고 싶어 이 글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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