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윰 Nov 19. 2021

Ep.6 안과 바깥: 우리 안의 깐부

<오징어 게임>에 관한 촌평: ep6. 깐부

작품 내용이 많이 담겨 있으니, 스포주의를 고지합니다..!


Ep6.

깐부



어느덧 죽음이 일상화된 게임장에 여지없이 아침이 밝아온다. 아니, 어쩌며 오후일지도, 혹은 저녁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하루는 자연과 동떨어진 인공의 조명 아래 숨을 틔우기 때문이다. 이로써 감독은 또 한 번 우리의 모습을 고발한다. 우리의 하루는 그들의 하루와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자연의 먼발치에서 오로지 생존에 내몰린 그들의 모습은 과연 그들만의 모습인가. 우리 역시 마찬가지로 하늘을 바라볼 여유도, 길가에 피어난 꽃을 향해 건넬 시선도 갖지 못하지는 않던가. 수많은 인공과 인위가 가득한 세계 속에서 우리의 생존이 갖는 의미가 되물어진다.


참가자들은 네 번째 게임을 앞두고 있다. 그런데 게임장으로 가는 길, 프론트맨은 참가자들에게 <심판의 결과>를 선보인다. 종전에 처단한 '부패 일꾼'과 병기(유성주 분)의 사체를 내보이는 것이다. 그는 또 한 번 <평등>을 외친다. 평등의 훼손을 시도했던 이들을 예방하지 못한 데 대한 사과와 더불어 평등의 수호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노라는 각오가 더해진다. 이때 참가자들은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저 사체가 나의 것이 아니라는 안심? 아니면 자신은 결코 평등의 가치를 위반하지 않겠다는 공포 어린 각오? 무엇이 됐든 참가자들은 프론트맨이 설계한 평등의 불평등을 더이상 인식하지 못하는 듯 하다. 평등이 오로지 참가자들에게만 강요된다는 불평등을 말이다. 정해진 게임 규칙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참가자들은 더이상 게임 자체의 불평등함을 문제 삼지 않는 것이다. 이로써 그들은 <바깥>을 헤아릴 수 있는 사유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여기서 잠시 푸코의 철학을 경유해보도록 하자. 푸코의 지적처럼 <광기>는 <이성>이라는 권력 속에서 규정되어지곤 한다. 예컨대 혹자를 <정신 병자>로 규정할 수 있는 권력은 의사의 <이성>으로부터 비롯된다. 다만 중요한 대목은 <이성>의 지위가 결코 선제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의사의 <이성>은 혹자를 <광인>으로 규정함으로써 더욱 <이성적>일 수 있다. 이성은 이성이기 때문에 광기를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광기가 아니기 때문에 이성인 것이다. 요컨대 광기를 규정하는 것이 먼저이고, 이를 통해 이성은 광기의 바깥에 설 기회를 확보하는 식이다. 참가자들은 게임장의 <바깥>을 사유하지 못한다. 왜 이러한 게임이 설계되었고, 왜 프론트맨이 멋대로 평등의 개념을 정의내리며, 이 게임을 통해 이득을 누리는 바깥의 세력은 누구인지와 같은 질문을 제기하지 못한다. 오로지 게임은 시작되었을 뿐이고, 목표는 승리 뿐이다. 마땅히 물어야 할 질문들이 제거된 세상에서 이제 그들에게 남은 건 욕구와, 그것의 만족을 위한 무조건적인 경쟁 뿐이다. 또 하나 남은 게 있다면 평등, 바로 <그들만의 평등> 뿐이다.






네 번째 게임이 시작된다. 안내멘트는 게임을 위해 둘씩 짝을 이룰 것을 지시한다. 이윽고 상우(박해수 분)는 알리(아누팜 분)와, 기훈(이정재 분)은 일남(오영수 분)과, 새벽(정호연 분)은 지영(이유미 분)과, 둘씩 짝을 이룬다. 잠시후 게임 설명이 장내에 울려퍼진다. 게임 규칙은 각자 10개의 구슬을 나눠 갖고 둘이 상의하여 정한 방법에 따라 상대방의 구슬 10개를 모두 뺏으면 승리하는 식이다. 이제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짝을 죽여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과연 동료와 죽음을 겨뤄야 하는 그들의 감정은 어떠했을까. 여기서 그들의 관계 설정이 자못 흥미롭다. 종전에 상우는 알리에 대하여, 기훈은 일남에 대하여, 새벽은 지영에 대하여 일말의 <연민>을 느낀 인물이다. 상우는 맨몸으로 먼 길을 가려하는 알리에게 기꺼이 택시비를 내놓았고, 기훈은 노약자로서 온갖 소외와 무시를 받아마지 않는 일남과 짝을 이루었고, 새벽은 홀로 마음을 닫고 세상을 등진 지영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알리와 일남, 그리고 지영은 각각 <감사함>으로 화답했다. 그들 관계의 본질적 속성 중 깊은 곳에 감사와 연민의 결속이 자리하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들의 결속은 결국 죽음 앞에서 조각나고 만다. 상우가 적극적인 거짓말을 통해, 기훈이 소극적인 거짓말을 통해 각각 상대의 구슬 10개를 모두 빼앗은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연민의 기만성을 목격하게 된다. 두 인물은 연민을 통해 각각 알리와 일남을 포용하는 듯 했으나, 사실 이는 자기만족적 연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한 야수성을 외면하기 위한, 혹은 포장하기 위한 껍데기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들의 연민은 오직 그들 자신의 안위가 보장되었을 때만 작동한다. 타인이 내 생존에 방해가 된다면 그즉시 연민은 철회된다. 연민에 관한 훌륭한 통찰을 남긴 슈테판 츠바이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연민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인 나약하고 감상적인 연민은 그저 남의 불행에서 느끼는 충격과 부끄러움으로부터 가능한 한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하는 초조한 마음에 불과합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는 것이 아닌 남의 고통으로부터 본능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방어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연민이란 감상적이지 않은 창조적인 연민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원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힘이 닿는 한 그리고 그 이상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함께 견디며 모든 것을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갖는 연민을 말합니다. 마지막까지 함께 갈 수 있는 사람만이, 비참한 최후까지 함께 갈 수 있는 끈기 있는 사람만이 남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초조한 마음』, 슈테판 츠바이크



츠바이크의 말 대로 상우와 기훈의 연민은 결국 그들 자신을 위한 감상적이고 유약한 연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나아가 그들이 알리와 일남으로부터 구슬을 빼앗기 위해 벌인 거짓말은 종전의 연민마저도 허구에 지나지 않았음을 은밀하게 폭로하는 것이리라.




*사족1: 기훈에게 구슬을 모두 빼앗기기 전 일남은 자꾸만 옛 이야기를 하며 골목 이곳저곳을 기웃댄다. 본래 죽음 앞에 삶을 내어준 많은 이들은 현실의 비참함으로부터 달아나 늘 과거를 살아가는 법이다. 만물이 본질을 잃지 않았던 한때의 영광스럽고 따뜻했던 순간을 말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고향>을 그리워한다. 하이데거의 말 대로 그들은 현대 사회를 <고향 상실의 시대>로 느끼는 것이다.


*사족2: 그들은 왜 구슬을 빼앗아야 했을까. 이유는 하나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렇다면 구슬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 건 없다. 가치도 없고, 내용도 없다. 다만 빼앗지 않으면, 죽는다. 이는 처절한 제로섬 게임이다. 내 구슬주머니에 5개가 추가로 들어오면, 상대방의 구슬주머니는 5개가 빈다. 그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주머니를 불리지만 새로 창출된 가치가 아니다. 오직 옆사람의 주머니를 쥐어짠 결과다. 한정된 자원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로의 것을 뺏고 빼앗기는 그들의 혈투는 결코 자원의 총량을 늘려주지 못한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




이전 05화 Ep.5 프론트맨의 뒤틀린 평등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