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윰 Nov 19. 2021

Ep.8 기훈은 악인인가?

<오징어 게임>에 관한 촌평: ep8. 프론트맨

작품 내용이 많이 담겨 있으니, 스포주의를 고지합니다..!


Ep8.

프론트맨



다섯번째 게임이 끝났다. 살아남은 세 명은 상우(박해수 분)와 기훈(이정재 분), 새벽(정호연 분)이다. 그들의 몸도 성해보이지 않는다. 피 흘리지 않고 이길 수 있는 경쟁은 없는 것이다. 이윽고 숙소로 돌아온 상우와 기훈이 언쟁을 벌인다. 갈등의 원인은 다섯번째 게임에서 보인 상우의 행동이다. 상우는 게임의 종료 시간이 임박한 시점, 자기 앞에 있던 참가자 13번을 밀어 떨어트린다. 13번이 결정을 지체하는 틈에 게임 종료 시간이 가까워오자 상우의 목숨이 위험에 빠졌던 것이다. 하지만 기실 위험한 건 상우 뿐이 아니었다. 상우가 시간 안에 다리를 건너지 못한다는 것은 곧 새벽과 기훈의 죽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기훈과 새벽은 상우가 저지른 살해의 직접적 수혜자들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훈은 지금 화를 내고 있다. 왜 죽여야 했느냐고, 꼭 그래야 했느냐고 따져 묻고 있다. 그러나 그의 질문은 다시 자기 자신에게 메아리가 되어 돌아온다. 그는 왜 일남(오영수 분)을 죽였는가.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상우도 마찬가지다.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생과 생이 공존할 수 없는 극한의 제로섬 게임에서 우리는 자신의 생을 보장받기 위해 타인의 생을 기꺼이 도려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견 정의를 외치는 듯한 기훈의 분노는 자신의 부정의를 자백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상우의 살해가 가져온 결과적 효익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기훈은 타인의 악덕과 부정의에 그의 생을 빚진 자다. 그래놓고 이제와서 그의 죄의식을 그저 <낭만적인 분노>로 간단히 회피하려 시도할 뿐은 아닌가. 그는 부정의한 시스템을 방관했고, 순응했으며, 게임을 끝낼 수 있는 투표는 진작에 제쳐두지 않았던다.


물론 기훈에 대한 이 야박한 평가는 작품의 주제의식 측면과 잠시 대치될지도 모른다. 작품의 말미에서 감독은 타인을 향한 기훈의 연민, 기대, 혹은 신뢰를 삶의 희망으로 은근하게 제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과 악을 바라보는 기존의 절대주의적인 이분법에서 벗어난다면 기훈의 <소극적 부정의>는 그가 종전에 보인 연민, 기대, 혹은 신뢰와 모순되지 않을 수 있다. 요컨대 악인이 오직 악을 궁구하는 것이 아니며, 선인이 오직 선을 좇는 것만도 아니다. 악인의 맘 속에도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하는 희미한 양심이 있으며, 선인의 내면에도 악에 대한 충동질이 있다. 마지막화에서 상우가 스스로에게 내리는 심판이 전자를 방증한다면, 이제껏 우리가 목격한 기훈의 <소극적 부정의>는 후자를 지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은 일남 역을 맡은 배우 오영수 씨의 발언과 은미하게 공명한다. 그는 한 예능 프로에서 말했다. "가장 인간적인 사람에게도 사(邪)가 있고, 다 있는 거죠. 차이가 얼마나 있느냐 그 차이 뿐이죠." 그의 말은 기훈의 입장을 소명한다. 요컨대 인간은 결코 '시종일관 선할 수는' 없는 존재이다. 괴테의 말처럼 인간은, 다만 노력하고 방황할 뿐이다.


참가자들이 최후의 만찬을 누린다. 그간 그들이 치른 노고를 치하함과 동시에 다가올 경쟁을 독려하기 위한 프론트맨의 선물이다. 그들은 나이프를 손에 쥐어 스테이크를 썰고, 붉은 포도주로 목을 축인다. 이는 살을 베고 찢어, 마침내 피를 보아야 끝나는 오징어게임의 예고이자, 이에 응하는 참가자들의 혈서이다. 그러니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한 새벽이 죽임을 당하는 장면은 이미 예고된 죽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새벽은 죽기 전 기훈에게 말한다. "아저씨 그런 사람 아니잖아." 잠에 든 상우를 몰래 죽이려던 기훈에게 한 말이다. 새벽의 말에 기훈은 행동을 중지한다. '나'라는 사람이 어떠한 사람일 거라는 타인의 <기대>와, 그것에 부응하고자 하는 '나'의 <의지>가 만나는 순간이다. 삶의 인간적 가치들이 모두 말살된 전장터에서 기대가 최후의 희망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어쩌면 참가자들 대부분은 타인에 대한 기대는 커녕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도 내버린 이들은 아니었을까.



*사족: 만찬씬에서 유독 도드라졌던 연출이 있다. 상우의 컷과 기훈의 컷을 번갈아 교차하며 드러내는 연출이 그러하다. 상훈이 고기를 썰면 바로 뒤이어 기훈이 고기를 써는 컷이 뒤따르고, 또 상훈이 와인잔을 손에 쥐면 기훈이 와인잔을 손에 쥐는 컷이 뒤따른다. 상우의 부정의를 비난하면서도 한편으론 이를 모방할 수밖에 없는 기훈의 연약함이 경쟁사회의 애잔한 비정함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





이전 07화 Ep.7 유리 다리 : 삶과 죽음의 이분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