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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Nov 19. 2021

Ep.9 일남은 왜 게임장에 갔을까?

<오징어 게임>에 관한 촌평: ep9. 운수 좋은 날

작품 내용이 많이 담겨 있으니, 스포주의를 고지합니다..!


Ep9.

운수 좋은 날



드디어 마지막 게임, 오징어 게임이 시작된다. 게임의 규칙은 간단하다. 공수를 나눠, 한쪽은 진영을 차지하려 시도하고, 다른 한쪽은 이를 저지하는 것이다. 물론 발생하는 모든 폭력은 게임이라는 명분 아래 허용된다. 이제 그들은 말 그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겨야 하는 것이다. 이윽고 기훈과 상우는 처절하게 게임에 임한다. 날선 칼이 서로의 살을 깊숙이 베고, 서로의 피부가 거칠게 찢긴다. 종전의 만찬에서 그들이 썰어 먹은 짐승의 살점처럼, 지금 그들은 서로에 대하여 야수인 것이다. 한바탕 피먼지가 부유하고 가라앉는다. 승자는 기훈(이정재 분)이다. 과연 기훈은 종전의 비루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승리자로서의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까. 그러나 현실로 돌아온 기훈을 맞이하는 건 깜깜한 집과, 그곳에서 홀로 외롭게 삶을 마감한 어머니의 주검이다. 이는 기훈이 게임에 나선 동기가 어머니의 질병 때문이었다는 점에서 대단히 비극적이다. 수많은 죽음을 밟고 올라선 기훈의 승리는 <원인 없는 결과>로 전락한 것이다. 어쩌면 이는 우리의 <뒤틀린 목표의식>을 고발하는 대목으로 기능할지도 모른다. 예컨대 우리는 무언가를 쟁취하기 위한 간절함에 경쟁에 뛰어들었다가도, 이따금 경쟁의 동기를 상실하곤 한다. 게임장에 들어선 순간 우리의 동기가 생존 그 자체로 개편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수험생들의 경쟁이 그러하다. 본래 공부의 수행 동기는 지적 세계의 확장과 사유 능력의 향상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대한민국 사회의 수험 전장이 어디 그러한가. 숙명여고 시험지 유출 사건을 비롯하여, 대치동 학부모들의 SAT 비리 청탁 등을 떠올려보자. 이는 우리 사회의 학구열이 진정한 의미의 학구열일 수 없음을 폭로한다. 말하자면 우리 사회의 학구열은 지적 세계의 확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출세가도의 확장을 위한 것이다. 애석하게도 이러한 <뒤틀린 목표의식>은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만연하다. 일부 운동 선수들은 불법 도핑을 통해 신체 능력을 향상시키려 하고, 소수의 공무원들은 그들이 접근가능한 국가 정보를 통해 사익을 불리는 데 혈안이다. 뒤틀린 목표의식 속에서 그들은 단지 승리를 거머쥐는 것 외에 다른 목표를 상실한 것이다. 물론 그 끝의 최종적 목표는 결국 돈이다. 우리 삶의 모든 동기들은 돈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로 환원되어진다. 참가자들이 공중의 돈꾸러미라는 단일한 목표점을 올려다본 것처럼 오늘날 인간은 단일한 목표를 공유하는 단순한 존재로 전락했다. 이제 우리는 하늘을 바라보는 이유를 망각한 것이다. 이같은 <뒤틀린 목표의식>에 대한 예고는 이미 1화에서 잠시 스쳐 지나간 바 있다. 1화에서 기훈이 지하철에서 오징어게임의 모집책과 딱지치기를 벌인 장면이 그러하다. 본래 게임에서 지는 사람은 상대에게 돈을 주는 것이 규칙이지만, 돈이 없는 기훈은 공연히 뺨만 내어줄 뿐이다. 그렇게 하염없이 뺨을 맞던 끝에 드디어 기훈이 모집책의 딱지를 넘기는 데 성공한다. 잠시후 기훈의 손이 재빨리 모집책의 뺨으로 향한다. 그는 뒤틀린 동기를 깨닫고 멈칫한다. 그는 딱지치기에 임한 최초의 동기를 망각했던 것이다.



오징어 게임의 가장 큰 반전이 있다면 바로 일남(오영수 분)의 정체일 것이다. 그는 게임의 참가자인 동시에 주최자였다. 그는 왜 그런 끔찍한 짓을 벌인 것일까. 일남의 대답은 간단하다. 그는 단지 재미가 필요했다.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막대한 자본을 가졌지만, 그중 그 무엇도 삶에 대한 그의 권태를 달래주지 못했던 것이다. 여기서 잠시 우리는 참가자들이 치른 게임들이 왜 어릴 적 동심의 놀이를 모티브로 삼았는지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동심의 아이들에게 놀이는 연대와 유희를 위한 것이다. 그들은 혼자 놀이하기보다 같이 놀이하기를 원하며, 홀로 즐겁기보다 함께 즐겁기를 바란다. 이따금 뜨거운 승부욕을 가진 아이들로 놀이가 과열되기도 하지만 그것의 해소까지가 놀이의 연장이다. 그들의 다툼 뒤엔 화해가 뒤따르고, 약자는 깍두기로 초대되며, 놀이의 보상은 유희의 성취다. 그들은 놀이를 통해 이기는 법 뿐만 아니라 지는 법도 깨닫는 것이다. 하지만 어들들의 게임은 유희가 아닌 쾌락을 겨냥한다. 아이들은 내기를 걸지만 어른들은 목숨을 건다. 아이들은 기껏해야 엉덩이로 이름을 쓸 뿐이지만, 어른들은 생의 종료를 담보로 게임에 임한다. 따라서 어른들의 게임엔 패배의 선택지가 없다. 이는 매우 유의미한 분기점이다. 패배가 곧 죽음인 세계에서 어른은 결코 게임을 즐길 수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어른은 게임에 여유롭게 임할 수 없다. 항상 절박하고, 매분매초 상대의 실수를 기도한다. 져서는 안 된다는 승리 강박이 게임의 유희를 봉쇄하는 것이다. 일남이 그리워한 순간은 바로 그 강박으로부터 자유한 어린 시절의 놀이, 즉 이겨도 좋고 져도 좋은 그 때가 아니었을까.



*사족: 1화에서 기훈은 자신이 판돈을 건 말을 응원하며 경기를 관람한다. 이는 상우와 기훈의 게임을 관람하는 VIP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다만 그 주체의 성질로 인해 전자는 도박으로, 후자는 투자로 분류되는 것이 일견 자연스러워보인다. 도박과 투자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이다. 한국의 한 철학자는 그런 말을 하더라. 도박은 불법적 투자이고, 투자는 합법적 도박이라고. 이에 대해 벤야민도 한마디 보탠다. "자본의 핵심은 도박의 논리, 혹은 심리에 있다." 어쩌면 일남이라는 자본이 쾌락을 얻기 위해 게임장이라는 도박에 참가한 것이야말로 자본과 도박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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