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젓갈 할머니가 오시는 날은 대문 앞에서부터 바다였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비릿하면서도 향긋한 냄새가 나는 젓갈 할머니의 목 짧은 장화신이 나를 반긴다. 장화신을 넘어 마루에 들어가면 큰 대야 가득 봉지마다 조개들이 손짓한다. 싱싱한 조개젓에 할머니가 직접 짠 참기름을 톡톡, 청양고추를 송송 썰어 넣고 간장을 쓰윽 두르면 식후에도 고봉밥을 비워낼 수 있는 찬이 된다. 젓갈 할머니는 오실 때마다 할머니가 내어 오는 한과며 과일들을 드시며 어둑해질 때까지 망중한을 즐기시다 조개젓이 담겼던 대야 가득 할머니가 챙겨 주는 밑반찬을 이고 돌아가시곤 했다.
젓갈 할머니가 다녀가신다는 것은 수일 안으로 할머니가 김치를 담그신다는 것이다. 우리 집엔 김장철이 따로 없을 정도로 김장이 잦았다. 김장 날에는 동네 할머니들 서넛이 오전부터 모여 김장 반, 잡담 반으로 종일을 보내곤 하셨다. 늘 못 보던 이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어른이 되면 으레 아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겠거니 생각했다. 나의 임무는 크게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할머니가 양동이채로 타 놓으신 얼음이 동동 뜬 다방커피를 퍼다 배달하며 한 모금씩 몰래 마시는 것이요, 둘째로는 할머니 옆에 앉아 몸을 배배 꼬며 기미상궁을 자원하는 것이었다. 시골에서 공수해 온 배추와 고춧가루에 햇사과, 햇배, 시원한 굴과 조개젓을 넣어 만든 할머니의 김치는 늘 꿀맛이었다.
"음, 간이 아주 딱 맞아!"
이번 김장도 성공적이었음을 발표한 후에는 식은 밥 한 공기를 떠서 막 담근 김치를 곁들여 쓱싹 비워낸다. 김장을 마치고 동네 할머니들의 몫이 담긴 통에서 굴이나 조개를 하나씩 주워 먹다가 등짝을 몇 번 맞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른이 되고 나서야 그 많던 할머니들 중 한두 분만이 진짜 할머니의 친구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연히 엄마가 젓갈 할머니는 친구인 할머니를 보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서울에 와서 젓갈을 파시다가 지치면 우리 집에 오셔서 남은 젓갈도 모두 팔고 맛있는 간식도 드시며 쉬시다가, 양동이 가득 반찬을 들고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내가 할머니의 죽마고우 비슷한 이들로 생각하고 있던 수많은 할머니들은 대부분 사정이 어렵고, 어쩌다가 할머니를 만났다가 그 수많은 주전부리들과 선물들과 할머니의 정에 이끌려 계속 우리 집으로 돌아오시는 분들이었다.
나의 첫 김장은 태국에서 반 강제적으로 진행되었다. 봉사자로 몸담고 있는 보육원의 형편이 어려워져 내다 팔 것이 더 필요해진 것이다.
"태국 사람들은 김치를 좋아해. 너는 진짜 한국인이니까, 정통 김치를 만들어 팔아 보자!"
스태프들의 희망찬 눈빛을 보고 있자니 차마 한 번도 직접 김치를 해 본 적이 없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할머니 옆에서 보고 먹은 것을 믿고 도전하기로 했다.
동네 할머니들 대신 보육원 아이들이 동원되어 당근이니 부추니 무를 채 써는 데 동원되었다. 배추가 잘 절여졌는지 휘어 보이자 막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달려와 배추를 헤집어 놓는다.
"이건 아직 안 된 거죠?" "이건 됐다!"
당근과 부추를 썰어 넣은 김칫소가 완성되자 여기저기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초롱초롱한 눈을 하고 옆에 꼭 붙어 있는 녀석의 입에 어린잎을 찢어 소를 발라 넣어준다. 내가 어릴 적 할머니가 그러셨던 것처럼.
"음, 간이 아주 딱 맞아!"
그렇게 나의 첫 김장이 성공적이었음을, 녀석은 만천하에 알렸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나의 첫 김치 10킬로는 몽땅 아이들 뱃속으로 사라졌다. 반나절의 수고가 겨우 한 끼에 사라지다니 조금 씁쓸한 마음도 있었지만, 김치가 가득 담겨 있었다 비워진 대야를 보자 괜히 뿌듯했다.
놀랍게도 내 얼굴이 큼지막히 찍힌 김치는 조금씩 팔리기 시작했다. 기미상궁 십 년이면 주방상궁 자리를 넘볼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코로나로 인해 공황이 오자, 옆 동네 이장님께 연락이 왔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부업으로 할 수 있게 김치 담그는 법을 좀 가르쳐 주시오."
이장님이 직접 수첩을 들고 찾아오셔서 장은 직접 보실 테니 재료를 알려달라고 하시니 쑥스러움을 핑계로 더 손사래를 치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 그렇게 나의 눈칫밥 김치 수업이 성사되었다.
수업 당일에 아침 일찍부터 시장에 나가 장을 보았다. 이제는 시장 아주머니들과도 구면이라 배추 집에서 운 좋게 오이를 얻었다. 돌아가는 길에는 우리 보육원에 세 자매를 맡기고 홀로 어린 아들을 키우는 어머니가 아이들 가져다 주라며 고추를 봉지봉지 쥐어주셨다.
그렇게 바리바리 싸 온 것들을 씻고 아주머니들을 기다리자니 기분이 묘했다. 정오가 지나니 처음 보는 오토바이 다섯 대가 흙먼지를 몰고 나타났다. 오신 아주머니 중 한 분은 보육원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서 노점상을 하시는 모양이었다. 방학 중인 아이들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가져온 배추가 생각보다 드세서 늦게 절여지는 바람에 냉수 한 잔씩 하며 이야기를 들어 보니 모두 아이가 둘씩은 있는 어머니였고 개중에는 남편과 헤어져 혼자 아이들을 키우는 이도 둘이나 있었다. 한 명 한 명의 손에 패인 잔주름은 나무의 옹이처럼 그들이 열심을 낸 만큼을 재어낸 것 같았다.
각자 칼 하나씩 들고 열심히 야채를 썰던 아주머니들은 생각보다 김칫소에 많은 양념이 들어가는 것에 놀라 하셨다. 예를 들면 고춧가루를 좀 덜 넣으면 안 되냐던가, 액젓을 조금 덜 넣어도 돼냐는 질문이 많았다. 할머니는 여기에 각종 과일에 굴까지 넣으셨지... 뭐든지 재료를 아끼지 않아야 더 맛있지 않냐고 되묻자 다들 까르르 웃었다. 해가 뉘엿뉘엿 질 때가 돼서야 숨이 죽은 배춧잎에 소를 싸서 아주머니들 입에 넣어드리니 모두 맛있다며 난리였다. 그리고 약속이나 한 듯이 모두 집에 있는 아이들 생각을 했다. 케이팝을 좋아하는 큰딸, 숙제는 잘하고 있을지 걱정되는 막내아들까지. 주섬주섬 재료비를 모아 주시며 오늘 담근 김치는 보육원에서 그냥 파시라고 하는 아주머니들을 뒤로하고 나는 의무적인 기분으로 지퍼백에 김치를 꽉꽉 퍼담았다. 예전에 할머니가 그러셨듯, 왠지 김치는 마음을 다해 꽉꽉 눌러 나누어 먹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아주머니들은 오토바이 바구니에 김치를 한 봉씩 넣고 돌아가셨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어제 만난 아주머님들께 문자가 와 있었다. 막내아들이 김치를 먹는 사진, 벌써부터 배추 두 포기를 절이는 사진. 목욕을 하며 왠지 콧노래가 나왔다. 날이 더우니 오늘은 어제 얻은 오이로 소박이를 좀 담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마 할머니도 그래서 그리 많은 김장을 하셨을 게다. 김치통 가득 정을 나누어 주는 것과, 두런두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 것과, 함께 배가 터지도록 막 담근 김치를 먹는 것. 그것이 바로 김치의 맛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