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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일차] 시련의 십자가

Bohemian Rhapsody - 누나의 자유로운 환상 기악곡

by 여운설

2023년 6월 5 라바날 델 까미노 - 몰리나세카 24.7km


드디어 철의 십자가를 만나러 간다. 대단원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을 제외하면 프랑스 루트에서 가장 커다란 울림을 주는, 보기만 해도 감격스러울 걸로 기대되는 곳. 오매불망하던 철의 십자가를 접하러 간다.


천지를 창조한 신이 마스터 셰프로 변해 순례길을 재료삼아 정찬을 마련한다. 소담스러운 생장 피에드 포트를 한 입 거리의 아뮤즈 부쉬로 내어 입맛을 돋군다. 애피타이저는 나폴레옹 루트의 뢰페데르 언덕과 용서의 언덕이다. 풀 코스의 공식 전채치곤 꽤나 무거운 디쉬다. 탑 헤비 코스인 만큼 생선요리와 메인 디쉬는 가벼운 게 좋겠다. 화이트 와인 소스를 곁들인 흰 살 도미찜이 제격이다. 시루에냐 밀밭과 메세타 평원이 이에 해당할 텐데 어째 크리미한 대구 버터구이다. 입안이 묵직해지는 요리가 연달아 나왔다. 메인 디쉬 차례다. 당신이라면 철의 십자가를 어떻게 요리하겠는가? 육즙이 풍부한 이탈리아식 티본스테이크, 비스테카 알라 피오렌티나Bistecca Alla Fiorentina 보다 담백한 닭고기나 칠면조 가슴살 구이는 어떨런지.


새벽 일출 산행은 언제나 경건하다. 무언가를 갈구하며 진중히 정상을 향한다. 시커먼 산길을 헤드랜턴에 의지한 산꾼은 오체투지 하는 구도자다. 어두컴컴한 능선길을 한 걸음씩 오를 때마다 까미노에 나를 한 번씩 내던지는 심정이다. 내 몸을 더럽힌 세상의 오욕이 하나씩 털려 나간다. 동편에 떠오른 서광이 철의 십자가를 붉게 물들이는 순간 일생 동안 저지른 온갖 허물을 탈피한다. 갓 태어난 아기처럼 순결한 나 자신으로 돌아온다. 상상만으로도 가슴 벅차다. 엄숙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의 메인 요리로는 무거운 것 같다.


평소처럼 출발했다. 나를 비우러 가는 길에 일출 욕심까지 부리지 말자 했다. 철의 십자가 언덕은 프랑스 루트의 최고봉이라 천기에 가장 맞닿아 있다. 해 뜨는 장엄한 광경을 놓쳐도 영적으로 충만해질 거라 기대했다. 내가 가져온 돌 하나에 삶의 고통과 후회, 고뇌와 죄과를 모두 담아 내려놓을 수 있다면 말이다. 과한 희망이나 이 정도면 그간의 상처와 아픔을 정화해 줄 담백한 요리라 믿었다.


인생은 교도소와 같다. 인생을 살면서 원죄를 씻기는커녕 신구身口의 삼업을 일삼았다. 몸이 저지른 업이야 적다 해도 입과 마음으로 얼마나 많은 악업을 쌓았던가. 남을 속이거나 해하려는 거짓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나로 인해 사람들이 멀어지거나 화를 냈을 것이다. 그칠 줄 모르는 탐심과 노여움, 어리석음은 또 얼마나 많았을런고. Johnny Cash는 폴섬 교도소의 비참한 현실을 다룬 영화 테마로 ’Folsom prison blues(164위)’란 컨트리송을 작곡했다. 살인죄로 종신형에 처해진 죄수가 만일 석방되면 기차를 타고 폴섬 교도소에서 멀어지겠다는 희망을 노래한다. 나도 철의 십자가에서 그간의 삼업에서 헤어나 벗어나고 싶다. 죄를 씻은 새 인생을 꿈꾸고 싶다.


우리네 능선을 닮은 산길에서 Aerosmith의 ‘Dream on(172위)’를 들었다. 과거는 황혼과 새벽 사이에 짙게 깔린 어둠속으로 사라진다. 철의 십자가를 향하는 단 하루만이라도 내 속에 가득 찬 지난 세월의 희로애락과 영욕을 전부 게워내어 애절하게 희구하는 꿈으로 대체하고 싶다. 십자가에 선 나는 어떤 꿈을 갈망할까?


산중 마을 폰세바돈Foncebadón까지 가는 길이 적요하다. 앞선 순례자들이 거의 없다. 산 허리를 휘감은 한적한 숲길에서 모처럼 고즈넉한 절경을 즐긴다. 먼발치에 놓였던 풍력 발전기들이 지척에 다다랐다. 송전탑이 아름다운 산자락 곳곳에 늘어섰다. 친환경 청정에너지라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레온 산맥 주변의 미경을 해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재생 에너지가 보급될수록 전력 그리드를 많이 요구해 자연이 그만큼 더 훼손된다. 재생 에너지가 지닌 동전의 양면이다.


적요한 산길이 교교히 아름답다. 폰세바돈까지 산허리를 휘감아 오르는 오르막길이 적당한 숨차 아침 산책하기에 적당했다.


이처럼 만물에는 명과 암이 공존한다. 밝음만 추구하여 이로부터 기인하는 어둠을 도외시해선 안된다. 선악도 마찬가지다. 선을 추구하되 파생될 악을 대비해야 한다. 반대로 악을 박멸하기 위해 그 안에 가려진 선까지 깡그리 제거해서도 안된다. 절대선은 종교와 이상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현실의 민주주의는 다수의 뜻을 존중하되 소수를 인정하고 배려하며 소수가 강짜 부리지 않는 성숙한 미덕이 요구된다. 우리 사회가 더 이상 상대 진영을 증오하지 말고 Joni Mitchell의 ‘Both sides now(170위)’처럼 감미롭게 안아줬으면 좋겠다.


걸출한 여성 싱어 송 라이터이자 포크가수 중 라이벌로 불리는 두 명의 여성 가수가 있다. 미국의 존 바에즈, 그리고 그녀와 쌍벽을 이루는 캐나다의 조니 미첼이다. 존 바에즈가 인종 차별과 반전, 혁명과 저항의 표상인 포크의 여제라면 조니 미첼은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내적 혁명을 추구한 포크의 음유시인이다. 존 바에즈처럼 선두에 서서 싸우지 못한 그녀는 평생 자신이 강한 척할 수 없는 고통을 아름다운 노래로 승화했다. 이 곡을 들으니 양희은이 번안해 부른 ‘구름, 사랑 그리고 인생(1971년)’이 듣고 싶다.


Joni Mitchell - Both Sides Now(1969년, 170위)


피레네 산맥의 절경과 아소프라, 시루에냐의 밀밭 초원에 못지않게 폰세바돈을 넘어가는 능선이 참 좋았다. 메인 디쉬 전에 나오는 가벼운 드레싱을 두른 그린 샐러드처럼 산뜻하다. 하이라이트는 언제쯤 나올까? 능선이 굽어질 때마다 가벼운 흥분이 반복되던 차에 철의 십자가가 눈에 들어왔다. 아~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드디어 내가 여기에 왔구나. 불현듯 나타난 철의 십자가가 가까워지니 되레 아쉬웠다. 속도를 줄였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천천히 걸어갔다.


철의 십자가 둔덕 앞에 섰다. 누나와 별내댁 더러 먼저 오르라 했다. 내 차례를 기다리며 가방에서 조약돌을 꺼내 마음을 다졌다. 둔덕 위 십자가에 서면 어떤 생각이 들까? 무얼 기원할까?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따르자고 다짐했다. 드디어 내 차례다. 미사를 봉헌하러 성당에 들어가듯 조심스레 차분히 십자가로 올랐다. 무릎 꿇어 준비한 조약돌 두 개가 행여 떨어질세라 십자가 밑에 단단히 박아뒀다. 돌 하나에 내 삶의 삼업을 아로새기고 다른 돌에 어머니와 가족, 지인들의 행복을 담았다. 일어나 십자가에 손을 대고 짧은 기도를 드렸다. 내가 아는 모든 분들의 건강을, 아픈 지인들에게 하느님의 손길이 미치십사 축원했다. 내 의식은 이걸로 족했다.


십자가 옆에서 여운을 좀 더 갖고 싶었으나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올라와 자리를 양보해야 했다. 우리도 그랬지만 동양인들은 순례자가 십자가를 배경으로 독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충분히 배려하며 기다린다. 그러나 서양인들은 대체로 누가 서 있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 내키는 대로 올라와 자기 볼 일을 다 본 후에 내려간다. 문화 차이라 여겼다. 그들은 십자가 앞에서 사진을 찍는 것보다 자신을 이곳으로 이끈 무엇을 기리는 걸 우선하는 것 같았다. 쿨한 벽안의 순례자들 덕분에 AI 지우개 기능을 써봤다. 주위에 번잡한 순례자들을 한 명씩 지웠다. 휴거 된 그들에게 미안함을 전한다. 그래도 익명이 보장되어 차라리 낫다고 여기면 좋겠다.


어느 순간 불쑥 엄숙한 자태를 드러낸 철의 십자가. 돌무덤 위에 올라 순례자들은 저마다 준비한 의식을 짧게 드린다.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의 행복과 건강을 기원했다.


정상과 목적지의 표고차이는 900m, 몰리나세카까지 17km 내리막길이다. 우리는 거기서 멈추지만 별내댁은 8km를 더 가야 한다. 적당한 속도로 내려가는데 누나가 한가롭게 걷는다. 처진다 싶으면 뒤돌아서 누나를 다그쳤다. 별내댁 일정을 고려하면 속도를 내야 한다고. 그제서야 누나가 무릎이 말썽이라 실토했다. 어제 오후부터 이상을 느꼈는데 내가 걱정할까 봐 얘기하지 않은 것이다. 근육이완제를 복용해도 소용이 없었다. 철의 십자가까지 잘 오르시길래 통증이 도진 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자꾸 채근한 것이 미안했다. 별내댁 더러 먼저 가시라 했는데 괜찮다며 같이 내려가자고 했다. 누나를 앞세웠다. 시간은 충분하니 뒤는 신경 쓰지 말고 누나 컨디션에 맞춰 천천히 가시라 했다. 경치 유람하면서 음악에 빠져 유유자적하게 하산했다. 말에 올라타 철의 십자가로 거슬러 오르는 부부를 지나쳤다. 말 탄 모습은 글에서나 본 생경한 광경이다. 중세 때는 수종이 이끄는 말을 타고 순례하는 게 흔한 풍경이었을 텐데.


정오가 되기 전, 엘 아세보 데 산 미구엘El Acebo de San Miguel에 도착했다. 갈 길이 멀어 여기서 점심을 먹었다. 누나가 다리를 절뚝인 지 오래다. 이왕 쉬는 거 충분히 쉬기로 했다. 한갓진 이별의 오찬을 마쳤다. 중세풍 물씬한 고택 앞에서 기념사진으로 헤어짐을 증거했다. 처음 만날 때 별내댁 컨디션이 나아져 다행이다. 자신의 고절한 학문을 전수받은 제자를 하산시키는 스승의 심정이 이런 걸까? 혼자 사뿐히 내려가는 모습이 뿌듯했다. 끝까지 부엔 까미노 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별내댁을 먼저 보낸 다음 천천히 목적지를 향했다.


능선을 타다 엘 아세보와 몰리나세카를 향하는 내리막 길을 걸었다. 누나는 점점 걷는 게 힘들어 보였다. 아픈 내색을 하지 않은 채 속에서 얼마나 고통을 참았을런지.


뒤에서 봐도 누나는 하산길을 버거워했다. 왼 무릎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절뚝인다. 너덜길이라 아픈 다리를 딛기가 더 힘들다. 스틱이 있어서 그나마 천만다행이다. 귀국 후 한참 지나서 그날의 사정을 정리한 누나 블로그를 봤다. 누나는 무릎이 아프고 나서야 순례 중에 교만하던 자신을 반성했다고 한다. 그저 마을까지 무사히 내려갈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했다. 아픈 다리로 너덜길에 부대끼는 자갈과 돌을 짚을 때마다 핸디캡을 가진 장애인을 떠올렸다. 신체가 불편한 고통을 몸소 실감한 후에야 장애인의 아픈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다면서. 그렇게 누나는 오후 내내 눈물을 삼킨 채 스스로를 되돌아 보고 낮은 곳에 임하기를 다짐하며 걸었다.


누나가 더 이상 발걸음을 떼기 어려울 즈음에 몰리나세카에 도착했다. 이미 탈진한 누나에게 숙소로 가는 마지막 300m는 넘지 못할 절벽이었을 것이다. 크나 큰 절망과 극심한 고통 끝에 누나는 간신히 침대에 걸터앉았다. 빨리 샤워하고 누워 쉬라 했다. 나머지 정리야 내가 하면 되니까 걱정하지 말라며.


출발할 즈음에는 발걸음이 경쾌했던 걸로 기억된다. 폰세바돈에서 요거트를 먹으며 쉴 때도 그리 불편한 기색이 아니었다. 아마 정상을 향한 능선부터 증세가 나빠졌을 것이다. 철의 십자가를 지난 하산 길에 시시각각 악화일로 되는 무릎을 보며 누나 심정이 어떻게 변주되었을까 궁금하다. 초반의 경쾌한 발걸음이 빠르고 강렬한 알레그로의 교향곡 1 악장이라면 폰세바돈을 지난 능선길에서 엄습한 불안감은 느리고 서정적인 아다지오 리듬의 2악장에 비할 만하다. 철의 십자가 이후 내리막은 참기 힘든 고통의 클라이막스다. 하지만 이를 3박자 활기찬 리듬의 미뉴에트로 구성된 3악장 내지 에너지 넘치는 마무리 4악장에 견주기는 다소 무리해 보인다.


하산하는 동안 누나는 감정 기복이 무척 심했을 것 같다. 혹시 낙오될까 봐 불안했을 것이고 컨디션이 회복되지 않으면 산티아고까지 완주할 수 있을지 염려되었을 것이다. 조금만 참으면 된다는 희망을 품다가도 가도가도 나타나지 않는 목적지에 그 희망이 고문당했을 게다. 순간의 기분에 몰입했다면 감정선이 교향곡처럼 정형적인 흐름으로 전개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통증을 느낄 때마다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감정들이 누나의 온화한 성품을 거칠게 흔들어대지는 않았을까? 때로는 우아하게, 때로는 서정적으로, 고통과 불안이 커질수록 점점 고조되다가 격정의 끝에서 나락으로 떨어지듯.


겨우 겨우 몰리나세카에 도착했다. 마을이 보이자 사력을 다해 남은 기력을 쥐어짰을 게다. 누나는 낮잠을 즐기는 반려견처럼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세상 모르게 골아떨어졌다.


평소 누나 성정을 벗어났다면 즉흥적인 환상곡풍의 자유로운 기악곡, 랩소디에 가까울 것 같다. Queen의 ‘Bohemian rhapsody(163위)’도 누나 기분처럼 자유분방한 흐름을 띤다. 5분 55초 분량의 이 노래는 다채로운 형식을 띤다. 도입부는 감미롭고 몽환적인 아카펠라로 시작한다. 인트로가 끝나면 피아노 반주와 함께 프레디 머큐리의 발라드가 바통을 잇는다. 짧은 기타 솔로 리프를 브라이언 메이가 멋들어지게 소화한 다음 중반부를 화려한 오페라가 장식한다. 후반부는 스래시 메탈의 효시답게 하드락에서 헤비메탈로 절정을 이룬 다음 아우트로는 록 발라드와 피아노, 기타 솔로로 대미를 마무리한다. 이 곡의 스토리에 대해 평론가들은 살인을 저지른 죄책감과 불안감 때문에 내면의 갈등을 겪는 화자가 자유를 갈망한다는 서사 구조로 해석한다. 프레디 머큐리는 청자들이 사회나 관습이 정한 틀에 박힌 인식과 사고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해석하기를 원했다. 이 노래를 언제 처음 들었는지 가물가물하다. 학창 시절로만 기억되는데 처음에는 뭐 이런 노래가 있나 싶었다. 퀸의 노래 중에서 ‘We will rock you(1977년)’나 ‘I want to break free(1984년)’ 정도가 듣기 편했다. 2010년 이후부터 이 곡을 종종 들었다. 어느 날 갑자기 괜찮게 들렸기 때문이다. 아마 정신 산란하다며 질색하던 재즈에 귀가 트일 즈음이었던 것 같다. 나이 들수록 음악 취향도 자유로워지는가 보다.


Queen - Bohemian Rhapsody(1975년, 163위)


곤히 잠든 누나를 깨워 알베르게에서 만찬을 했다. 앞에 마주 앉은 독일에서 온 어린 여학생도 누나처럼 꽤나 고생했나 보다. 식사하는 내내 안색이 어둡다. 혼자 왔는데 지금 컨디션으로는 얼마 못 갈 것 같다고 우울해 한다. 이겨낼 테니 힘내라 격려했지만 듣는 이도 나도 확신하기 어렵다. 하늘을 향해 이 젊은 친구에게 힘과 축복을 주실 것을 기도했다. 저녁을 마치고 나서 주인장에게 아이싱할 얼음을 부탁했더니 아이싱 팩을 빌려준다. 안주인은 심하게 절뚝이는 누나에게 소염제를 발라주었다. 한국인 일행 중 아주머니 한 분이 자기도 며칠 무릎이 아파 고생했다며 사흘 치 분량의 약을 건네었다. 같이 식사한 외국인들도 저마다 걱정과 위로의 말을 전했다. 누나가 무척 고마워했다. 지치고 아픈 심신에 위로가 되었을 게다. 내일은 걷기 힘들어 보이지만 미리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테니. 주님께서 누나와 함께 하길 빌었다.


3주 전에 ‘Suno’에서 AI 플랫폼을 이용해 작곡을 해 봤다. 치기 가득한 젊은 시절 겁쟁이 사자였던 나를 돌아보며 만들었다. 영어로 쓴 가사를 Chat GPT에서 노래말에 적합하도록 다듬은 다음 내가 원하는 스타일을 설정해 완성했다. 요즘 유행에 뒤떨어지지 않는 신나는 리듬이 제법 들어줄 만하다. 진즉 만들었으면 노래말을 조약돌에 적어 철의 십자가 아래에 묻었을 것인데. 그날 몹시 지치고 아팠던 누나에게 힘내라 들려주었을테고. 고음질이 아닌 MP4 형식이지만 킬링타임용으로 들어 보시라 올려본다.


A Cowardly Lion(2024년)


오늘은 냥이들이 지치고 힘들었을 누나를 많이 위로해주었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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