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누나 컨디션이 회복되지 않았다. 도저히 걸을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차를 타야 한다는 내 제안에 누나는 어떻게든 걸어 보겠다며 한사코 버텼다. 무리하면 상태만 더 악화될 거라는 반협박 끝에 간신히 설득됐다. 택시를 불렀다. 누나와 떨어진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던 터라 누나만 보내는 게 걱정됐다. 산티아고까지 걸어서 완주하려 했으나 불가항력이라 여겼다. 오늘만이라도 같이 택시로 이동하자 했더니 혼자 갈 수 있으며 나더러 계속 걸어라 권유한다. 나까지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내키지 않으셨을 게다. 걱정 말라는 누나 말을 믿기로 했다. 한 발 양보한 대신 누나가 먼저 출발한 다음 떠나기로 했다. 기사님께 카카벨로스에 묵을 숙소를 알려줬어도 안심이 안돼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누나 무릎이 몹시 아프니 체크인 장소까지 짐을 옮겨달라는 부탁과 함께.
미처 예상치 못한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레온에서 미리 충전했던 내 유심이 어제 기간이 종료된 직후에 바로 끊겼다. 누나 유심은 이상 없이 제대로 연장되었다. 마을에 있는 충전소에 문의했다. 자신들은 알 수 없다면서 폰페라다 모비스타 대리점에서 확인을 하란다. 대리점이 오픈할 시각에 맞출 겸 누나를 먼저 보낸 다음 8시 40분 즈음에 길을 나섰다. 인터넷이 먹통이라 한국에서 미리 다운로드해 둔 구글지도를 이용했다. 오프라인에서는 내 현 위치와 목적지간의 대략적인 진행방향을 파악하는 정도만 가능하다. 폰페라다까지는 차도 옆을 따라가는 외길이라 수월했다. 도심에 진입한 다음부터 고생이 시작됐다.
눈치껏 어렵사리 모비스타 대리점을 찾아갔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내 고객 정보가 누락되어 잘못된 원인을 찾지 못했다. 할 수 없이 새로 충전을 부탁했지만 여기서는 불가하다며 다른 영업소를 안내해 줬다. 일러준 충전소를 찾지 못해 주변을 헤매다가 포기했다. ATM에서도 충전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라 근처 기기를 찾아다녔다. 겨우 한 곳을 발견해 카드를 꺼내려는 순간 깨달았다. 지금 내게 잔고가 제로인 선불카드만 있다는 사실을. 누나에게 비상용으로 트래블로그 카드를 드렸던 것이다. 핸드폰이 먹통이라 충전이 불가능했다. 카페에서 와이파이로 접속하려다가 이미 시간이 꽤 흘러 패스했다. 결국 폰페라다에서 하나도 해결하지 못한 채 아까운 시간만 허비했다. 가뜩이나 늦은 출발에 유심 문제로 한 시간가량 더 지체했다. 누나가 도착하고 남을 시간인데 연락할 방도가 없다. 나도 모르게 마음이 조급해졌다.
도심에서 카카벨로스로 향하는 길을 찾았다. 다행히 어렵지 않게 방향을 짐작할 수 있었다. 대리점을 향해 폰페라다 성 앞에서 오른쪽으로 이어진 까미노를 벗어나 다리 건너 직진했었다. 강둑 방향을 어림잡아 걷다가 노란색 화살표를 발견했다. 길을 찾은 만큼 이왕 늦은 거 요기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아점 하기 적당한 벤치에서 걸음을 멈췄다. 고생해도 나 혼자 감당하면 그만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이미 시간은 열한 시를 넘어섰다. 오늘은 짜인 일정이 아닌 상황에 따라, 마음 가는 대로 순례를 해보자 다짐했다.
누나가 먼저 떠난 나를 치즈냥이가 배웅해주었다. 혼자 걷는 길은 무료했으나 자유로웠다. 오프라인이 던진 외로움과 불안감을 오롯이 혼자서 감당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닥쳐오는 매 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길 수 있도록 긴장을 풀어야 한다. 시간에 구애받거나 쫓겨서는 안 된다. 시간이 내 이성을 재촉해 흔들어도 흔들리는 대로 놔둬야 한다. 경직된 정신과 감정을 스트레칭으로 이완시켜야 매 순간이 즐겁다. 그러기엔 컨트리와 스윙 풍의 록이 제격이다. 거짓말을 좀 보태, 칠십 년 전 미국의 십 대 청춘들은 24 시간 내내 록앤롤 리듬에 맞춰 흔들어 댔다. 나도 모르게 두둠칫 몸을 흔들게 만드는 록음악이 청소년들의 문화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젊은이들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스스럼없이 자신들의 역동적인 에너지를 과시했다.
Bill Haley and His Comets의 ‘(We’re gonna) Rock around the clock(158위)는 록앤롤을 전 세계에 알리는 최초의 곡으로 칭송받는다. 기존 흑인음악이 주는 무거운 주제에서 벗어나 백인들이 듣기 부담되지 않아 록의 대중화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21세기 전 세계를 열광시킨 힙합의 대중화를 이끈 더 슈거힐 갱의 ‘Rapper’s Delight(248위, 1979년)에 비유된다. 십 대들의 폭발적 인기에 힘입어 대중화에 성공한 록앤롤은 훗날 비틀스나 롤링 스톤스 등의 전설적인 밴드를 자양분 삼아 음악을 통한 문화 통합의 상징으로 거듭났다. 팝 음악의 주류로 부상한 록앤롤은 ‘Rock around the clock’라는 작은 씨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곡이 단순한 히트곡이 아닌, 현대 대중음악의 시작점이자 문화적 변혁의 상징으로 평가받는 이유다.
잠깐의 휴식과 귀에 익은 명곡이 힘을 돋웠지만 네트워크와 단절되었다는 상실감은 쉬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사오 킬로미터에 걸쳐 방사형으로 퍼진 폰페라다 교외에서 초원 흙길의 정취를 느낄 수 없었다. 시내보다야 한갓지나 뜨문뜨문 서있는 공장과 물류창고, 줄지은 주택가의 좁은 아스팔트 도로가 자아내는 인공적인 체취가 너무 물씬했다. 제 스케줄대로 바삐 돌아가는 세상에서 나 혼자만 덩그러니 유리되었다는 착각에 빠졌다. 내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완벽한 오프라인 상태가 온라인 네트워크에서 튕겨나간 방랑자의 심정을 한 꺼풀씩 벗겨냈다. 동떨어졌다는 감정이 한 겹 씩 박피되자 외로움은 불안감의 다른 얼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알프레드 아들러는 인간의 모든 문제는 대인관계 문제라고 역설했다. 그는 고립과 단절이 심리적 고통의 원인이라면서 모든 인간의 고통은 그가 자신의 동료 인간과의 연결에서 멀어질 때 시작된다고 보았다. 인간의 사회적 존재성과 공동체 속에서의 유대감을 강조한 것이다. 개인의 행복과 성장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가능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능력을 의심치 말고 사람들이 내 친구라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처를 받거나, 받을 거란 의심과 불안으로 고민에 빠져 불행해진다 여겼다. 아들러 견해에 따르면 내가 느낀 불안감과 외로움은 초연결 사회에서 오프라인 된 고립과 단절 때문일 것이다.
아들러와 비슷한 의견을 피력한 사회심리학자로는 에리히 프롬이 있다. 그는 현대인의 가장 큰 고통이 소외에서 연유한다고 보았다. 이를 벗어나기 위해 점점 더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지만, 진정한 연결이 이루어지지 않아 무기력해진다고 강조했다. 무력감을 느끼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고 타인이 바라는 대로의 삶을 살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 자신만의 생각, 자신의 감정과 의지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데 자존감을 잃었거나 미처 자각하지 못한 채 시장, 여론, 인간의 합리성과 이성 같은 익명의 권위와 외부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자아를 받아들여 결국 자신을 잃고 무력감에 빠진다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약관의 시절, 내가 걷고 싶었던 인생의 이정표를 너무나 쉽사리 포기했던 건 용기가 부족한 것도 한몫했겠지만 남들과 다르지 않고 싶다는 욕구, 무리와 또래에서 벗어나길 두려워했던 익명의 권위를 이겨내지 못했던 건 아니었을까? 나는 하느님이 준 자유 의지로 산다고 자위했지만 나를 둘러싼 세계, 익명의 권위가 정하는 삶의 방향과 속도에 맞추려 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기 위해 내 능력을 때로는 과장되게 왜곡하거나 허세를 부렸으며 필요에 따라서는 가진 능력을 의도적으로 축소하거나 지나치게 소심했었을 게다.
아들러와 프롬이 언급한 자신의 능력에 대한 확신, 자존감과 자유의지를 떠올리게 하는 노래가 있다. Sinead O’Connor의 ‘Nothing compares 2 U(162위)’다. 당신과 비교할 만한 것 없다는 제목만큼 자신이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소중한 존재임을 드러내는 가사는 없다. 이 곡을 작곡했던 프린스는 자신의 레이블 소속 가수가 겪은 실연의 아픔과 상실감을 그리려 했겠지만 네트워크에서 오프 되었다는 불안감, 네트워크로 복귀하고픈 조바심, 홀로 된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란 까닭 모를 의심에 휩싸인 내게는 관계에서 오는 상실감으로 다가왔다.
삼 년 전에 깜박 핸드폰을 집에 두고 출근한 적이 있었다. 무척 불편한 하루였다. 현대인들이 스마트폰에 종속되어 살아가는 걸 체감한 계기였다. 많은 사람들이 SNS 메시지에 연연한다. 심한 경우, 노이로제 걸린 듯 수시로 메신저를 확인한다. 심심치 않게 유튜브, 멜론 등 온라인 고음질 음원을 블루투스로 연결해 DAC이나 헤드폰으로 감상한다. 오프라인 된 소스기기보다 간편한 탓이다. 여가 시간엔 넷플릭스와 인스타그램, 웹툰 등 엔터테인먼트 앱으로 소일한다. MZ 세대에게 짤방이 대세다. TV 본방사수는 옛말, 이제 본방 사수란 넷플릭스 개봉작이나 유튜브 실시간 채널을 시청하는 걸 의미한다. 이미 내 삶의 일부가 돼버린 스마트폰을 부정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핸드폰이 없다고, 내가 오프라인 되었다고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 단지 평상의 익숙함에서 잠시 일탈한 불편을 감내해야 할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사실을 까맣게 잊고선 초연결 사회의 소입자가 되길 자처한다. 가끔 일상에 지칠 때, 어디 먼 곳을 떠날 계획에 골몰하기에 앞서 하루 이틀 핸드폰으로부터 탈출하는 건 어떨는지?
시네이드는 2015년 더 이상 이 곡을 노래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25년 넘게 이 노래를 부르며 더 이상 사랑의 소실에서 오는 애잔한 감정이 우러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온라인에서 유리된 허탈함에서 벗어나려면 어떤 마음 자세를 지녀야 할까? 네트워크의 단절로 인한 고립이 아닌 네트워크에서 해방되었다는 고양감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오프라인 지도에 연연해서는 안될 일이다. 지금처럼 아주 친절한 안내표식이 없었던 중세 순례객들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어떻게 다녔을지 무척 신기하다. 아마도 서쪽을 향해 걸으며 물어물어 갔겠지. 그때에 비하면 내 길은 무척 순탄하다. 까미노 표시만 보며 걸으면 되니 말이다. 이 순간이야말로 내 삶의 진정한 해방, 자아를 돌아볼 기회라 여기며 유심이 다시 작동되기 전까지라도 위대한 팝송 명곡에 의지해 길을 걷기로 했다.
정오가 넘어서면서 지금껏 몰랐던 태양의 나라가 자랑하는 불볕을 절감하게 되었다. 더위를 잘 참는 편인데도 맑은 유월 하늘에서 내리쬐는 염양(炎陽)에 온몸의 기가 조금씩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절로 진이 빠진다. 공원을 지나 도로변에 들어섰다. 앞서 가는 동양계 젊은 여성 순례자를 지나쳤다. 그녀 역시 힘이 부치는지 서로 힘겨운 미소에 맥없는 인사를 나눴다. 내 앞가림하기 바쁜 처지에도 젊은 처자가 끝까지 힘내기를 바랐다. 일이십 분을 더 걸어 한적한 주택가로 진입했다. 저 앞으로 조그만 바가 눈에 띄었다. 쉬고 싶던 차에 마침 잘됐다며 점심 먹을 겸 기꺼이 들어갔다. 허기진 배에 태부족일지라도 토티야와 콜라가 어디냐며 게걸스레 먹었다. 한참 아쉬운 입맛을 다시며 좀 더 쉬어가자 여유를 부릴 즈음 아까 만났던 처자가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한국인 아니면 중국인으로 짐작되는, 옆자리에 앉은 그녀에게 굳이 국적을 묻지 않았다. 날이 무척 덥고 표정이 힘들어 보이니 충분히 쉬었다 가라는 인사만 했다. 아까 보다 밝은 미소에 조금 안심되었다.
한 밤중 홀로 어두컴컴한 외진 길을 걸을 때나 새벽녘 비몽사몽중 내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자신의 목소리나 정체 모를 존재가 내뱉는, 낮게 깔린 진중한 음성을 들은 적이 있는가? 아마 환청이겠지만 그럴 때마다 소름이 한가득 돋은 팔뚝을 어루만지며 무슨 말이었는지 떠올리기 위해 애를 쓰곤 했다. 어쩌면 오프라인으로 말미암아 불안정했던 심정은 이런 경험의 데자뷔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오늘 내가 맛본 불안과 상실감을 Simon and Garfunkel이 침묵으로 은유해 노래했다. 어두운 분위기가 일품인 ‘The sound of silence(156위)’다. 이 곡 역시 오프 라인에서 나를 돌아보기에 충분했다. 어둠을 내 오랜 친구라 시작하는 가사는 슬픔과 우울함이 가득 채색되어 있다. 소리 없이 말하는, 한 귀로 흘려듣는, 서로 공유하지 않는 목소리만 담긴 노래를 써 내려가는 사람들이라는 구절에서 사회적 소외와 소통의 부재를 절망한다. 어둠이 만든 환상은 침묵의 소리로 남아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속삭인다. ‘예언자들의 말이 지하철 벽이나 빈민가 주택 현관에 적혀 있다’고.
Simon and Garfunkel - The Sound of Silence(1965년, 156위)
사실 이 곡은 정치적 사건을 노래하지 않았다. 슬픔과 우울함, 자아 상실감에 대한 개인적 고백을 은유적으로 그렸을 뿐이다. 그러나 당시 미국인들은 이 노래에서 대통령 암살 사건에서 비롯된 무력감을 연상했다. 예언자의 메시지가 진실은 소외되어 어두운 곳에 숨겨져 있다는 암시로 읽힌 것이다.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의 진실은 미궁에 빠져 아직까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이 사건을 다룬 워런 보고서는 오스왈드의 단독 범행이라 결론지었으나 이를 믿는 이들은 거의 없다. 암살범 오스왈드를 포함해 관련 인물들이 차례로 암살되거나 죽어버려 진범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왜 케네디를 죽여야 했는지를 합리적으로 추정할 단서들이 있다.
존 에프 케네디는 대통령에 당선된 후 쿠바 위기를 해소하고 소련과 핵실험 금지조약을 체결하는 등 군사적 갈등을 완화했다. 군부와 달리 베트남에 대한 군사적 개입에 소극적이었다. 조직범죄 단속을 강화하면서 민권 운동을 지지했으며 군산복합체를 견제하는 동시에 CIA를 개혁하려 했다. 그의 정치적 행보를 보면 암살범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가히 짐작된다. 군산복합체나 마피아, CIA가 진범이라 의심받은 근거이다. 미국 현대사의 10대 사건 중 하나로 꼽히는 케네디 대통령 암살사건을 다룬 영화로는 ‘JFK(1992년)’가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다. 한창 혈기 방자하던 시절, 이 영화를 관람하며 과연 국가는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자문했었다.
누나 없이 홀로 걷는 길은 무척 힘들고 외로웠다. 불안감을 천천히 이겨내면서 걸어야 했다. 더위에 지쳤을 무렵 나무 그늘에서 한적하게 쉬는 스웨덴 처자들이 건네준 블루베리가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오후 두 시가 넘어 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에는 앞서 걷는 순례객을 따라 숙소를 향해 나갈 수 있었다. 비록 통신은 오프라인 되었으나 순례의 인심과 동반자들로 연결된 오프라인의 네트워크는 여전히 가동되었다. 그로부터 고립과 단절, 소외감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오프라인의 연대감에 힘입어 걷다 보니 카카벨로스에 들어서 숙소 앞에서 젬마 님과 여유로운 오후를 보내는 누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블루베리로 얻은 용기가 소진되어갈 즈음에 힘차게 앞서 걷는 순례자를 발견했다. 평소에는 잰걸음으로 앞서나갔으나 오늘은 적당히 떨어져 뒤따르기로 했다. 그렇게 카카벨로스에 들어섰다.
누나는 최악의 컨디션에서 오늘 택시에 의지해야 했으나 어찌 되었든 순례를 이어 나갔다. 인생도 이런 게 아닐까?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더라도 그렇게 이어만 가면 된다. 증기엔진이 불타기를 멈추지 않아 계속 강 위를 구르는 Creedence Clearwater Revival의 ‘Proud Mary(155위)’호의 바퀴처럼 말이다. 혼자 걸었음에도 평소에 비해 늦을 정도로 힘든 하루였다. 그래도 나를 보고 환히 웃는 누나와 젬마 님의 미소에서 오늘처럼 힘든 날에 맞이할 밤이 기대되었다. ‘‘A hard day’s night(153위)’를 만끽했던 The Beatles가 그랬듯이. 오프라인의 여운이 평소 같지 않았다. 오늘은 하루 두 곡의 명곡을 올린다는 암묵적인 약속을 깨도 상관없을 듯하다.인생의 강물 위를굴러, 굴러, 굴러가는 프라우드 메리호와 함께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