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4일 토요일 ; 모든 것을 보상받는 날
내 생전 가장 향기롭고 맛있는 크림 커피를 마신 날.
비엔나에서 못다 이룬 모든 것들을 보상받았다.
이 한잔의 맛.
살아온 동안 마신 수천만 잔의 커피를 단숨에 잠식시켰다.
내 추억 속 제노바에서 마신 최고의 에스프레소를 막 밀어내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원하던 그림 감상은커녕 박물관, 대성당, 왕궁, 오페라 공연장 그 어디에도 들어갈 수 없었지만 그나마 괜찮았다. 아휄카 (café Hawelka) 카페의 비엔나커피가 있으니까.
카페 샹트랄처럼 호화로운 장식이 아니어도 카페 스펠르같이 넓고 우아한 공간이지 않아도 괜찮다. 화려하지 않아서 더 좋았다. 전통적, 서민적인 분위기, 어둡고 칙칙한 내부, 낡은 의자가 좋았다. 그 장소에 딱 어울린 중년 갸르숑이 있어 좋고, 그 무엇보다 내 미각을 즐겁게 자극하고, 내 마음을 쏙 빼앗은 고소한 커피와 쵸코렛 케이크 비엔노와즈리가 있어 커다란 위안이 되었다. 그 어느 것도 없어서는 안 될 황홀한 조합.
나는 그 마력에 풍덩 기분 좋게 빠져 버렸다.
비엔나는 옛 도시와 근현대적인 시가지가 링(Ring;테두리)을 기점으로 나눠져 있다. 따라서 건축물도 시대별로 다양하게 뒤섞여 있다. 중심부의 17세기 건축물들은 훌륭한 비례, 균형, 절제, 단순미가 있고, 링 주변 19세기 건축물은 거만스레 오만방자 웅장한 모습이다.
어제와 마찬가지 우리는 아르누보 양식 건축물 투어를 이어간다. 궁전 입구 광장 맞은편 대각선으로 궁전과 대조를 이루어 아시아 풍 느낌의 건물과 명품 상점 거리에 있는 검정 대리석으로 장식된 19세기 건축가 아돌프 로스 (Adolf Loos) 작품들을 보았다.
아돌프 로스 (Adolf Loos) 건축물
사람 발길이 많은 토요일.
어느 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명품거리, 싫어도 목적지를 가려면 매번 거치지 않을 수 없다. 혼혼한 길눈인 나도 이 길만큼 아니 더듬고 지나갈 길을 또 가로지른다. 우리는 대성당을 중심으로 뱅글뱅글 사향을 돌고 돈다.
슈테판 대성당은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에서 보는 색색이 유약된 기와지붕과 입구 정면 로마네스크 양식이 특이점이다. 몇 번의 전쟁으로 파괴, 증축된 뒷부분과 종탑은 고딕식 건축물로써 프랑스 고딕 대성당에서 보는 것보다 조화로운 세련미가 미미하다. 나에게는 기하학적 얽힌 듯 복잡한 그러나 체계 있고 섬세한 부벽이 장관인데, 단출한 버팀 벽으로 그다지 환성은 나오지 않았다. 따라서 성당 내부 구조는 보지 못해 알 수가 없지만, 외관은 거대하나 우아한 아름다움은 없었다.
코로나 19로 꾹 닫힌 대성당 대신, 우리는 문 열린 바로크 양식 이태리 성당(Monoritenkirche)에 들어갔다. 이 또한 거듭된 증축과 변형으로 재미있는 입체적 다양성이 내 눈길을 끌었다.
슈테판 성당 (Stephansdom)
미노리텐 성당 (Minoritenkirche)
어제보다 춥다. 지친 태양은 구름 위에서 꾸물대며 휴식 중인지 그 찬란한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
우리도 그 유명하다는 비엔나커피를 마시며 몸을 데우고 싶었다. 가는 길목에 가까운 카페 샹트랄을 찾았다. 자리가 없어 기다리라 했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찾아간 곳 아휄카 (café Hawelka) 카페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이게 뭐야 너무 누추하잖아' 나는 멈칫했다. 그 화려한 샹트랄을 두고 찾은 곳이 '겨우 여기'라고 슬쩍 후회가 된다. 그러나 춥고 지쳐서 그냥 들어가기로 했다. 나와 달리 만족해하는 A, 그 표정이 얄밉게 느껴졌다.
내 남편 A는 편안함과 자유로움이 있는 서민적인 분위기를 좋아한다. 고급스러운 곳에서는 왠지 형식적인 격식을 갖추야만 될 것 같아 부담스럽고 어색하단다.
창가 구석 조용한 자리를 잡고 커피 두 잔과 두 조각의 케이크를 시켰다.
유리잔 속 커피, 그 위로 소복이 쌓인 눈 같은 하얀 크림, 코를 간질대는 고소한 향기를 솔솔 풍기며 케이크와 함께 우리 앞에 놓인다.
살짝 입술을 대고 맛을 본다. '으응, 참기름 향미!' 나는 놀란다. 다시 신중하게 한 모금 더 맛본다.
이럴 수가 어떻게 여기서 고소한 참기름 향이? 미심쩍어 한 모금 두 모금 탐색하며 마신 커피가 어느새 바닥이 났다. 그렇게 나는 비엔나커피에 홀렸다.
이 고소한 맛과 참기름 향은 커피와 크림을 같은 비율로 슬쩍 빨아들이며 동시에 함께 먹어야 그 맛이 나온다. 크림만 떠먹어 본들, 커피만 마셔도 그 맛이 아니었다. 혼합된 환상의 조화였다.
쵸코렛 케이크는 달지도, 쓰지도, 밋밋하지 않으면서 부드러운 촉감으로 오감을 자극하며 입안에서 감미롭게 녹는다. 그 맛에 소롯이 혼미해진다, 그때부터 나는 모든 걸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낡은 의자와 탁자, 구식 커튼과 커피잔, 중년의 갸르숑 그리고 칙칙한 공간, 특별할 것 없고, 볼품없던 장식과 분위기가 오히려 위안이 되었다.
맛 좋은 비엔나커피와 쵸코렛 케이크 덕분에 점점 빠르게 젖어드는 아늑함, 안락과 편안함으로 그토록 쉽게 익숙해지는 곳이었다. 그렇게 천천히 특별하게 와 닿아, 내 마음속에 쑥 들어왔다.
크레타 섬에서 먹은 최고의 염소 치즈와 그라나다에서 먹은 마들렌 빵 리스본의 에그타르트와 함께 내 최고의 추억 주머니에 앉았다.
작년 그라나다에서 우리 숙소 가까운 성당 한편에 수녀님들이 만들어 파는 마들렌 빵맛에 매혹되어 다음날 또 사서 온종일 가방에 넣고 다녔던 기억. A 말에 의하면 예부터 수녀원에서 만드는 것들은 다 맛있단다. 아마도 경제적 이익을 앞선 진실된, 영혼의 맛 이리라.
그리고 몇 년 전 우리는 기도실 벽화를 보러 크레타섬 하니아에서 40여분 버스를 타고 마을도 없는 어느 경사진 시골길에 내려, 굽이굽이 한참을 걸어서 찾아간 산골마을 아주 작은 성당이었다. 그 옆의 카페 주인장이자 성당지기 연만 하신 크레타인이 들고 온 토마토 샐러드와 염소 치즈는, 그동안 최고라 여긴, 프랑스 남쪽 산골마을 농장에서 우연찮게 샀던 양 치즈를 뛰어넘는 맛이었다. 더욱이 금치 못할 감탄은 가득한 토마토 샐러드 한 접시에 염소치즈, 재래식 포도주 한잔이 합산 1유로 도심의 한잔 커피 값도 아니었다. 공해나 오염 없는 자연의 풍미, 수제의 맛이 일품이었다.
A는 그때 먹은 토마토 풍미도 최고였고 오늘 그의 몫으로 먹은 겨자 향 애플파이 역시 생전 최고의 파이란다.
걷고 걸었다. 보고 또 본다 도시의 외형만을 훑으며, 이쪽에서 저쪽까지.
돌아오는 길 흘깃흘깃 상점을 탐색하다 내 작은 발에 맞을 봄 운동화를 발견했다. "들어가 볼래" A 말에 문을 열고 들어서자 주춤하는 여주인의 미세한 동작을 보았다. 밖에서 볼 때와 다른 모양에 멀찍이서 인사만 하고 그냥 나왔다.
"여주인님 우리 결정에 매우 흡족했을걸" 남편이 말한다.
"웬 아시아 여성에 이방인 남자" 내가 답한다.
"하하하"
"호호호"
터지는 우리의 농담과 웃음
손님은 무서운 코로나 바이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