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드니

A 소년 시절을 따라서

by 다나 김선자



생-드니(Saint-Denis), 드니(Denis)는 3세기 때 로마 가톨릭 신앙을 프랑스에 전파하러 이태리에서 온 작은 포교의 일원으로 루떼스(Lutèce:파리의 옛 이름)에 도착한, 그 선교사들 가운데 처음으로 도시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몽마르트르에서 참수를 당하여 순교하지만 멈추지 않고 그의 잘린 목을 팔에 안고 까똘라쿠스 (Catolacus;지금의 생 드니) 마을까지 걸어와서 망연자실하게 땅에 묻히게 되었다. 따라서 생-드니 시는 그 성인의 이름을 붙인 곳이다.

또한 이곳에는 고딕 양식의 근원이자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보다 먼저 건축된 최초의 고딕식 바질릭 성당이 있고 그곳에 프랑스 대부분의 왕과 왕비와 왕자들이 안치되어 있다.

이 역사적이고 전설적인 도시가 내 남편 A를 포함한 시부모님들이 태어나 자란 고향이다.


나는 A와 그의 유년시절을 회상하러 생 드니 박물관에 갔다.

지금은 역사박물관이지만 이전에 수도원이었다는 이곳에서 A와 친구들은 학교가 쉬는 목요일마다 오전에 신부님께 성경 공부를 했었다고 한다.

입구 정면에 그리스 신전 같은 건축물은 카르멜회 (carmélites) 작은 성당이라지만 현재는 굳게 닫혀 있고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니 잘린 목을 팔에 안고 서있는 생-드니 조각상과 시인 엘뤼아르의 두상 조각들이 우리를 맞이한다. 얼떨결에 나는 그들의 환영을 받았지만 평상시에 음흉한 도시라고 선입견을 가졌던 이곳에서 뜻밖에도 이런 멋진 공간을 맞이한다는 게 솔직히 어리벙벙하였다.

건물 중앙에는 널따란 안뜰을 이등분으로 가로지른 유리 통로가 현대식으로 개조되어 있었지만 그의 기억 속에는 높은 돌담이 있었단다.

그는 불투명한 기억들을 꼭 다시 확인해 보고 싶다며 소년 시절 그 모습들을 하나씩 더듬어 회상한다. 나 역시 그를 도와 납득 가능한 것들을 찾아 나섰다.


이 17세기 건물은, 어느 수도원과 마찬가지로 정사각형 안뜰을 중심으로, 본디 입구 쪽을 제외한 삼면으로는 긴 복도식 아케이드와, 석회석 다듬돌에 천정을 받치는 나무 대들보 구조다. 안뜰을 잇는 아케이드 덕분에 자칫 내부의 갇힌듯한 답답함이 없고 개방적인 열린 느낌을 주는 건축미로써 정겹고 참신하여 온화함에 운치를 더한다. 그 앞에서 몇 그루 키 작은 앵초 꽃이 파란 잔디 위로 내밀하게 미소 짓는, 수도원 특유의 소박한 안뜰은 참으로 명상적이고 정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분위기다.

아케이드에 연결된 방마다 전시된 역사적인 그림과 자료 및 소품들은 대체로 파리 코뮌에 관한 것으로 19세기 프랑스와 독일 전쟁(프로이센 전쟁) 때, 독일군의 파리 입성에 반기를 든 민중들에 관한 역사다. 이 역시 20세기에 들어서 <붉은 도시>가 된 생-드니 시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이층에는 엘뤼아르 전시실이다. 폴 엘뤼아르(Paul Eluard)는 생-드니 시에서 태어난 프랑스 시인으로, 그의 본명은 외젠 에밀 폴 그랭델 (Eugène Émile Paul Grindel)이나, 예명으로 그의 어머니 성을 붙여 엘뤼아르로 불린다. 그는 초현실주의 시인으로, 프랑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과 친밀한 관계를 가졌고, 다다이즘 운동에도 동참하였다. 그는 1917년 러시아인 안나 갈라와 결혼했으나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와 사랑에 빠진 그녀는 1924년 엘뤼아르를 떠났고, 그 이후 1934년 그는 독일 여성 마리아 벤즈와 결혼하였다. 전시실에는 그가 사랑했던 두 여인과 그 동료들과의 사진이나 자료들 그의 공산주의 활동과 수많은 시, 습작과 자필, 그리고 대표적인 시 <자유>에 관한 내용들이었다.

엘뤼아르는 2차 대전 이후 프랑스 공산당원에 재 가담하여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었고, 현재 파리 페르라셰즈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는 젊은 시절 시인 르네 샤르(René Char)와도 친밀했으며, 그의 둘째 부인 마리아 벤즈를 소개한 사람도 르네 샤르였다.

하지만 그가 공산당원에 가입한 이후 르네 샤르와의 관계가 소원해졌다는 A의 보충 설명도 따른다. 친절하게도 A는 내가 미처 눈여겨보지 못했거나 이 자료 속에 없는 사소한 것들까지 요목조목 선생님처럼 때로는 가이드가 되어 자세히도 알려준다.


이 정통 가톨릭 문화와 유서 깊은 왕족들의 도시가 아이러니하게도 1920년 <붉은 도시>, 20세기 초 프랑스 공산당 중심도시가 되었다.

이 배경에는 프랑스가 세계 일, 이차 대전을 겪은 이후, 파리 동북쪽 근교 도시에 많은 산업공장들을 세웠는데, 대서양 서풍에 그 공해가 파리를 비껴 날 수 있는 지역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파리 서쪽을 제외한 대부분 지역들이 수많은 노동자들을 대거 유입됨으로써 노동자를 비롯한 공산 당파 도시가 되었다.

생-드니 시 역시 초기에는 브르타뉴 지방에서 온 이민자들의 터전으로 이어 스페인들의 정착지가 되기도 했었다. 이 파도에 휩쓸려 폴란드에서 온 A의 외조부모 또한 그 수많은 이민자들과 역사를 같이한다.

그 시절 이민자들은 정통 가톨릭 문화권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공산주의와는 대치를 이루면서도 공존하는 서민적인 낭만이 있었다고 한다.

그 역사를 이은 생-드니 시는 오늘날까지도 이민자와 사회주의 도시로 유명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전혀 다른 형태의 문화와 종교를 가진 이민자들로 프랑스 문화에 섞이지 않는, 또는 못한 시민 대부분이 아프리카나 이슬람교 문화권에서 유입되었으며, 불법 체류에 실업자와 범죄라는 심각한 상황에서 마약과 테러의 위험 지역으로, 특수한 공동체로 살아가는 암울한 프랑스의 한 부분이 되었다.

불과 몇 년 전 프랑스 전 국민을 경악케 했던 극 이슬람주의 테러가 일어난 곳이며, 지금도 여전히 테러리스트들의 은신처나 마약 밀매가 활발한 지역으로 유명하다.


몇 년 전 A는 내게 자신의 어린 시절 삶이 깃든 곳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서 나를 이끌고 그가 세례를 받았던 바질릭 성당과 그가 다녔던 학교 그리고 그 가족이 살았던 아파트를 두루 살펴본 적이 있었다.

우리는 그가 살았다는 중심가 아파트를 찾았을 때 총 내부수리를 이유로 텅 빈 건물에 문이 열려 있어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었다. 방치된 건물 안은 먼지투성이로 음침한 분위기였는데 그때 입구에 서있던 한 젊은 아랍 남성이 감시하듯, 우리 뒤를 계속 따라오는가 하면 아파트 위에서 흘러나오는 사람 소리에 우리는 3층까지 오르다가 되돌아 나온 적이 있었다. 마약거래나 밀매 같은 유사한 무언가가 이루어지는 우범지역이 아닐까 하는 우리의 추측이었다.

오늘 우리는 다시 그 아파트를 찾아가 보았지만 다행히도 새롭게 말끔히 단장되어 주거 중이라 들어갈 수는 없었다.

거리에는 백인 보기가 그야말로 가뭄에 콩 나듯 하고, 어떤 이유로 떠나지 못한 채 거주하는 소수 원주민도 있겠으나 보이지는 않았다. 내 시부모님도 자신들의 고향에서 노후를 보내다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졌었지만, 암울한 현재 모습에서 그 희망은 일찍이 포기했다고 하셨다.

상점들은 이슬람교도들의 의상인 히잡이나 차도르를 비롯한 아프리카 식료품점들이 주로 눈에 띄고, 거리에 흘러 다니는 그들의 독특한 향신료 냄새가, 마치 북아프리카 어느 도시에 온 듯한 이국적인 기분을 느끼게도 했다.


파리에서 북쪽으로 5킬로 미터 떨어진 이 도시는 올림픽을 치렀던, 그리고 곧 치르게 될 프랑스 종합 운동장이 있고, 샤를 드골 공항에서 파리로 들어가는 길목이며, 내가 파리를 갈 때도 거쳐야 하는 북쪽 유럽을 잇는 파리의 북쪽 관문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빈번하게 일어나는 소매치기로 여행객들에게 주의를 요하는 곳이기도 한데, 나는 십수 년째 지나다니지만 아직 당하거나 본 적은 없다.

젊은 흑인 남성들은 그들끼리 때때로 거칠고 험상 궂기도 하나, 그 개개인의 마음씀은 순하고 인정 있어 오히려 여성을 쉬이 여기거나 취급하는 아랍 남성과는 다소 문화적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에서 지금의 사회주의로 뼛속까지 극 좌 쪽으로 박혀버린 이곳은 HLM(habitation à loyer modéré의 준말;서민 주택)과 정부에서의 거대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항상 사건 사고가 많고 시끄러운 곳으로, 시민이던 정치인이건 서로의 이익 분쟁의 장을 삼기도, 때로는 방치된 듯 어느 한계점을 벗어나 있는 도시 같다. 이같이 붉은 도시에서 지금은 음산한 겨울 하늘보다 더 짙은 흑색 도시가 되었다.


사실, 나는 A가 자신이 자랐던 곳을 보여주면서 그 추억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을 백번 이해하나, 그 추억에 앞서 이 도시의 외관부터 가히 흥겨움이 생기지 않는 곳이었다. 그래서 웬만하면 우울한 겨울은 오고 싶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봄날이라도 그다지 별다를 게 없다는 마음으로, 먼저 맞는 매가 낫다는 옛말을 따라왔었는데 천만다행, 이렇게 소담한 고풍스러운 아케이드를 걸으며 레제 작품을 보았고, 시인 엘뤼아르에 대한 지식을 넓혔다. 더구나 지근거리에 두고도 속속들이 알지 못해, 시댁 가족들의 대화에 오리무중 겉돌았고, 오며 가며 외관상 겉핥기로만 알던 이 도시를 좀 더 세세 사정 들어다 볼 수 있었다.

몇몇 작품을 제외하면, 아쉽게도 빈약하지만 어두운 이 도시에도 건재한 최소한의 지적 문화적 소산물이 되는 박물관이 있으며, 수많은 장서를 갖춘 훌륭한 도서관을 갖추고 조형예술학과를 둔 파리 8 대학이 있는, 센강을 잇는 수로와 프랑스의 왕족들이 잠든 바질릭 성당이 있다는 점에서 작은 안도와 위안을 삼아 본다.


금방이라도 염문을 뿌릴 것 같던 봄은 무엇이 그렇게 두려운지 등을 돌려 왔다 갔다 비만 뿌린다. 습한 찬바람을 몰고 온 검은 도시를 걸으며 A가 들려주는 옛이야기는 아파트 창 커튼 사이로 새어 나온 주홍 불빛처럼 따스하게 전해온다. 일요일 미사를 마치면 사람들로 북적이던 카페, 시아버지가 처음 근무했었다는 경찰서, 프랑스 중앙은행도 아직 그대로 있다.

축제가 열리는 날은, 저 넓은 광장에 시청의 공산 당파와 바질릭 성당에서 나온, 두 다른 모습의 행진과 팡파르가 동시에 한 공간에 서로 맞서 경쟁하듯 울려 퍼졌고, 그 앞에 서서 A는 그의 친지들과 기울어진 시각으로 미숙한 공산 당파들의 연주를 비웃으며 놀려대기도 했단다.

이 웃지 못할 기이한 모습들도 68년 운동 이후에는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멀찍이서 바라본 바질릭 성당은 자연재해로 잃어버린 왼쪽 탑, 마치 어설픈 외다리로 경건히 우뚝 서 있는 모습에서 오늘날 저물어가는 프랑스 가톨릭처럼, 잃어버린 남편 A의 고향으로 무척이나 외로워 보인다. 뒤안길에서 나는 그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얹어 톡톡 두세 번 가볍게 온 정을 담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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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ée d'art et d'histoire de saint-Denis (생-드니 역사 예술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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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silique Saint-Denis (생-드니 바질릭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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