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와 V

그녀들과 저녁시간을 보내다

by 다나 김선자



V와 C는 파리 가장자리 19구에 산다. 그녀들의 아파트는 번화한 대로와 한적한 수제 공방들이 있는 작은 길을 지나 조용한 골목 주택가에 있었다. 내가 이 길을 걷기는 처음이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몇몇 다른 친구들이 살고 있지만 이쪽까지는 올 일이 없었다.

우리는 그녀들이 미리 알려준 비밀코드를 누르고 건물 입구 문을 들어서서 좁은 복도를 따라 두 개의 문을 더 통과했다. 파리의 아파트는 두세 개의 출입문을 거치는 게 항다 반사다.

아담한 안마당이 나오고 정면 넓은 창에서 얇은 커튼을 뚫고 주홍 불빛이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그 위로 등나무가 페흐골라(Pergola:등나무를 엮어서 만든 정자) 차양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계단을 몇 개 올라 또 다른 등나무 밑에서 문이 열리더니 V와 C가 우리를 맞이한다.


아파트 안으로 들어서자 따뜻한 온기로 내 두 뺨에 열기가 오른다. 쾌적한 내부는 지하층 침실로 통하는 실내 계단이 보이고 일층(한국식)에는 창쪽으로 컴퓨터와 큰 화면의 모니터가 놓인 책상과 많은 책이 촘촘히 꽂혀 있는 책장들, 회 백토를 제거하여 드러난 돌을 멋스럽게 그대로 둔 한벽면에 등을 지고 소파와 의자가 소담하다. 그리고 개방식 부엌이 모두 한 공간 안에서 질서 있게 자리한다.

소파 앞 앉은뱅이 탁자 위에는 아뻬로(apéro/apéritif의 준말:식사 전에 식욕과 분위기를 돋우는 술)를 위한 술상이 차려져 있다.

C의 아파트라고 V가 알려준다.

넓지는 않지만 꼭 필요한 것만 잘 갖춘, 그러나 많은 서적들과 한문 서예 습작품 등으로 보아 그녀의 직업과 동시에 기호와 취미를 짐작케 하고 깔끔하게 잘 정리된 모습에서 그녀의 성격을 들어다 보는 것 같았다.

V가 우리의 벗은 외투를 받아 걸 때, 나는 C에게 "어머! 너 한문 서예 배우니? 한자 뜻도 이해하니?"하고 약간의 호기심을 담아 인사치레로 물었다.

"응, 아주 조금" 하고 내 질문이 형식적이게 비쳤는지 별로 개의치 않는 듯 C가 답한다.


V의 스튜디오는 안마당을 가로질러 맞은편에 있다. C 아파트보다는 조금 더 작은 공간이나 지하 작업실까지 포함해서 혼자 지내기에 크게 불편함은 없단다. 그나마 임대료 비싼 파리에서 C의 배려가 있기에 가능하다고도 한다. 이렇게 V와 C의 내밀한 살림살이를 들어다 본다는 건 우리가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프랑스에서 손님을 집으로 초대한다는 것은 서로가 신뢰하는 가까운 관계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소중하거나 정성을 다하여 예의를 갖추는 의식은 가정에서 정찬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식사 초대를 받아 방문 시에는 일반적 선물로 여주인을 위한 꽃과 남주인을 위해서 포도주를 들고 간다. 또한 친구끼리는 편안한 금요일 저녁이나 토요일 저녁을 선호하지만 특별한 행사나 기념일을 위한 가족 정찬은 대체로 일요일 점심을 택하는 것이 전통이다.

하지만 오늘날 현대인의 다양한 형태의 삶에서 필히 지켜야 할 관습은 아니지만, 예부터 내려오는 관례로 서로가 이 전통을 바탕으로 가능한 날짜를 의논한다.


아뻬로(apéro)가 시작되고, 우리들의 대화는 순서 없이 이곳저곳을 껑충 뛰고 달린다. 아니 날아다녔다. 한국과 북한을 넘어 다니기도, 미국도 잠시 다녀오고, 남미에서 유럽을 왔다가 지구 반대편 폴리네시아 왈리스와 푸투나 섬에서 한동안 머물다, 옆 나라 피지 섬, 뉴-칼리도니아를 잠시 잠깐 방문하기도, 그러다 우리는 다시 프랑스로 되돌아온다. 그야말로 문화의 경계를 허물고 지구를 한 바퀴 돌았다.

다행히 C의 열린 정신과 문화적 관심이 높고 다양하여 우리들의 대화는 중단 없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아주 자연스럽게 흘렀다.


V가 만들었다는 으깬 뽀아-씨쉐(pois-chiche:병아리 콩) 우무스(houmous)와 올리브 타판나드(tapenade:다진 올리브 소스)는 내가 여태껏 먹어 본 중에서 최고의 맛있었다. 으깬 뽀아-씨쉐는 당근과 잘 어울리지만, 나는 소화를 돕는다는 검정 무(겉은 검지만 속은 흰색임)를 마늘향이 살짝 곁들은 다진 올리브 소스에 찍어 먹는 맛에 폭 빠졌다. 생채를 잘 먹지 않는 나도 마법에 걸린 듯이 자석처럼 당기는 손을 어쩔 수가 없었다. 어쩜 숙성이 매우 잘 된 바이오 적색 포도주의 깊고 은근한 맛과 알맞게 잘 무르익은 분위기가 한몫을 톡톡히 거들어 그 풍미를 한결 조화롭게 했을 것이다.


아뻬로(apéro)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V는 말아 피우는 담뱃불을 붙이러 마른 몸을 날렵하게, 긴 머리를 찰랑이며 현관문을 부지런히 흔들어 댄다.

그렇게 저녁이 깊어, 밤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식탁으로 자리를 옮겨 앉는다. 대화가 길어짐에 V의 요리는 식어버렸고 그래도 맛은 좋았다. 채식주의자인 V의 요리는 맛 내기가 까다로운 야채만으로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그리고 후식으로 그녀가 만든 서양배 케이크는 지나치게 달지도 밋밋하지도 않은 그윽한 풍미가 오늘 저녁상에서 끝난다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나는 V의 요리 솜씨에 그녀를 다시금 살펴보게 되었다. 지나치게 활달해서 불안정해 보이는 성향에다 술과 담배를 무진장 즐기는 그녀에게 사실상 그다지 멋진 요리를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너무나 뜻밖이었다. 역시 내 직감으로 그녀의 불안정함과 예민한 성질의 것들은 극도의 섬세함에서 온 것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렇게 자정이 지나고 세병의 포도주는 가뿐히 비워졌고, 모두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고, 내 두 다리는 저려오고 있었다.
A는 오랜만에 정치적 견해가 일치하는 C와의 대화를 유쾌하게 여기며, 우리가 미리 보고 온 그녀의 SDF(고정된 집 없이 거리에 사는 사람들) 다큐작품을 오늘 밤 대화의 마무리로 덧붙어 살짝 마침표를 찍는다.

" 디안느와 모리스 최근 소식은 듣었니?"

"아니 소식이 없다, 이미 죽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거리의 삶이 많이 거칠거든...!"

사실 오늘 저녁 대화에서는 빠졌지만, 그녀의 다큐멘터리 중 우리가 가장 흥미롭게 보았던 작품은 프랑스 남서쪽 뽀와뜌 샤항뜨(Poitou Charentes) 지방에 있는 중세 및 르네상스 시대 성당 내부 벽화와 그 재현에 관한 이야기였다. 과잉되지 않고 담백하며 지나치게 서사적이지 않은 소박한 구성이 좋았고, 자칫 거만스레 느껴질 불필요한 과장된 장식이 없어 좋았다. 또한 언젠가는 메디에발(Médiéval:중세의) 흔적들을 찾아 아직도 <라 빌 오 상 끄로쉐/la ville aux cent clochers>*라 불리는 뽀와뜌 샤항뜨(Poitou Charentes) 지방을 방문하고픈 충동도 가졌었다.

*<la ville aux cent clochers> : 백개의 종탑이 있는 도시, 그만큼 성당 유적이 많다는 뜻임.


그녀들과 작별을 고하고 우리는 건물을 빠져나왔다. 내 앵글 굽이 빠베(pavé:포석)에 부딪혀 다닥거리는 소리가 잠자는 조용한 긴 골목길에서 박차를 단 말발굽 소리같이 요란하다.

C를 알고 난 후 우리는 V가 그녀 곁에 있다는 게 천만뜻밖의 안도감을 가진다. C의 단단하고 흔들리지 않는 강한 의지와 정신이, 불안정하도록 감수성이 예민하고 허약한 V에게 좋은 버팀목이 될 것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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