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장자가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철학에 조예가 깊은 친구 혜시도 함께였다. 그런데 다리 중간에서 장
자가 말한다.
"물고기들이 행복해 보이는군."
철저한 논리학자인 혜시는 자네가 물고기가 아닌데 어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느냐고 논리적으로 묻는다. 장자가 답한다.
"나는 물고기가 아니고 자네는 내가 아니네. 그런데 내가 물고기의 행복을 모르는 것을 자네가 어찌 아는가?”
-[생존의 조건/이주희] 중에서-
전업주부, 인생의 반은 청소 그리고 온갖 물품관리. 매일같이 바지런히 움직여야 그나마 먼지가 쌓이지 않는것. 나는 10년을 전업주부로 살았다. 전업주부라는 타이틀을 자의적으로 선택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나처럼 타의적으로 전업주부가 된 사람도 있을 터. 자의적이라 함은 전업주부의 삶에 만족하기 때문에 주부라는 직업을 선택한 것이고, 타의 적이라 함은 난 일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만 일할 여건이 되지 않다는 것이다. 난 타의적인 전업주부, 10년간, 미치도록 일하고 싶었다.
결혼 후, 임신함과 동시에 여자들은 고민에 빠진다. 우리 세 대 그러니까 ‘82년생 김지영’이라 일컫는 주부들은 대부분 일을 하다 결혼했고, 그래서 결혼과 임신 출산으로 인한 직장의 변화가 생긴다. 물론 공무원이나 공기업 또는 선생님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야 육아휴직을 쓰면 될 일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분명 육아휴직으로 몇 달 버티다가 결국은 퇴사 하게 된다. 남편이 한 달에 몇백만 원씩 벌어다 주거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든든한 시댁과 친정이 있지 않은 이상 일반적인 가정에서의 전업주부들은 갈수록 돈에 쪼들리고 삶이 힘들어지는 시기가 올 것이다. 아이에게 드는 돈은 생각보다 소소하게 많이 들고 그 외 시댁과 친정에 챙겨야 하는 각종 경조사비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남편의 수입은 대부분 일정해서 그 수입의 한도 내에서 살림을 꾸려 가야 한다. 결국은 나 자신한테 쓸 수 있는 돈을 점점 줄 일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온전히 나에게 쓰이는 돈, 예를 들어 화장품, 옷(집에만 있더라도 옷은 사야지), 심지어 길 가다 마주치는 별다방 커피 한 잔을 사 먹고 싶더라도 고민하게 된다. 처녀 때는 자주 갔던 미용실도 결혼 후엔 고민만 하다 미루기 일쑤. 결국 나에게만 쓰이는 돈을 쓸 때는 남편이 눈치를 주지 않아도 눈치 보게 된다. 누군가는 "당당하게 써라. 주부도 직업이다. 주부의 수입은 00만 원으로 환산된다." 라는데, 마음은 당당해지고 싶어도 꼭 그렇게 당당히 내 것을 사기가 쉽지 않다. 그냥 내 것 하나 아껴 내 아이 뭐라도 더 해주고 싶고 내 옷을 살 바에 직장 다니는 내 남편의 티셔츠 하나를 더 사게 된다.
모두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내 주변 40대 중반의 한 전업주부는 이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결혼하고아이가 어릴 때는 아이 키우면서 동네 엄마들이랑 같이 다니 고 살았는데 그렇게 한 10년 살다 보니 자신한테 남는 게 하나도 없는 것 같다 했다. 엄마들의 멘토, 김미경 작가도 이렇게 말한다. 10년 후의 내가 원하는 삶을 생각해보면 지금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이 나온다고. 10년 후에도 지금과 같은 삶을 원하는지 아니면 10년 후엔 커리어를 쌓은, 사회에서 인정받는, 아이가 자랑스러워하는 직업을 가진 엄마가 되어 있는 삶을 원하는지 말이다(전업주부로 산다고 해서 아이가 자랑스러워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또 다른 내 지인은 전업주부로 7년째,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앞으로도 일하지 않고 그냥 남편의 벌어오는 생활비로 아끼며 살 거라 했다. 사람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삶의 척도가 있다. 내가 전업주부의 삶을 사는 것에 만족한다면 전업주부로서 책임과의무를 다하며 살면 될 것이고, 집안일이 내게는 답답하고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된다면 여건이 되는 한 일을 하는 것이 좋겠다.
나는 장자고, 남편은 혜시다. 이 글을 읽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쩌면 내가 혜시고 남편이 장자일지도 모르겠다. 남편의 관점에서 말이다. 끊임없이 (사실은 거의 대화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대화하면서도 서로 다른 얘기를 하는 것 같은 기분, 이야기의 핵심은 ‘이것’이라고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는것 같은 기분, 너는 내가 아니면서 나보다 더 날 아는 것처럼 대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 결국 대화의 종점은 서로 엇나가고 뒤틀려 버리고 만다. 그러고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만 남게 되었다. 괜한 자격지심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종
종 그런 생각을 한다.‘남편은 나를 무시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구겨진 자존심을 애써 되찾을 필요가 없다.’
는 생각. 쉽게 말해 남편은 돈을 벌어다 주고 나는 그 돈이있어야 먹고사는 사람이다. 그러니 싸움에서 끝까지 내 자존심을 세우고 떠들어봤자 남편은 손쉽게 나를 이길 수가 있다. 돈을 안 주면 그만이다. 물론 말도 안 되게 (아니 모르겠다. 남편이 이런 생각을 하는지도. 난 남편이 아니니까 남편의 생각을 모른다) 극단적인 예를 들었지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나는 이런 상황을 늘 염두에 두고 사는 것 같다.
가정주부의 노동을 돈으로 환산하니 뭐니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나. 내 손에 직접 쥐어지는 돈은 남편이 가져다주는 돈뿐인데 말이다. 남편의 회사 동료는 가정주부인 자신의 아내가 가장 부럽다고 한다. 자고 싶을 때 자고 쉬고 싶을 때 쉴수 있어서 좋겠다고 했다. 아마 이런 생각은 그 동료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친정엄마도 나에게 늘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네가 뭐가 걱정이냐. 겨우 애 하나 키우면서. 남편이 벌어주는 돈으로 알뜰살뜰 모으면서 살면 되지.”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 편안하게 집안일’이나’하면서 사는 팔자, 애들’이나’ 잘 키우면 되는 사람. 그래서인지 그런 사람에게 들이대는 세상의 잣대는 매우 엄격하다. 얼마가 됐든 남편이 주는 생활비는 아껴 쓰며 저축해야 한다. 어디에 돈을 썼든 간에 생활비가 바닥나는 순간 사치스러운 여자가 된다. 집안 곳곳 어딘가에 쌓인 먼지가 누군가에게 발견되는 순간, 게으른 여자가 된다. 언제 어디든 아이가 아픈 순간, 아이의 건강 하나 제대로 못 챙기는 생각 없는 여자가 된다. 잘못된 모든 것에 대한 비난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사치스럽건 게으르건 생각이 있건 없건, 누가 날 어떻게 보든 말든 왜 신경써?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만 나로서는 싫다. 내가 잘했던 모든 것들이 한순간 깡그리 부서지는 것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내내 돈을 벌고 싶어 했는지도 모르겠다. 돈이 필요하니까 돈을 벌고 싶은 마음 그걸 떠나서, 사회에서 인정받고 싶은 마음(우리는 다들 그러라고 교육받고 자라지 않았나), 돈을 버니까 실수를 눈감아 줬으면 하는 마음, 자신 있게 돈을 쓰고 싶은 마음(친정에, 내 화장품에, 내 옷에, 하다못해 기부금 에라도) 같은 것들 때문에.
나는 돈을 벌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고, 그래서 돈을 버는 남편을 보며 괜한 자격지심을 갖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잘났다고 떠들어봤자 나는 남편을 이길 수 없고(돈을 벌지 않으니까) 그래서 은연중에 남편이 나를 무시한다고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 남편과의 대화가 어느 순간 엇나가게 되면 무시하는 듯한(자기는 절대 아니라고 한다) 그의 태도에 나는 약간의 모멸감을 느끼고, 그것은 나에게 ‘돈을 벌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품게 한다.
결혼 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직업을 갖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거의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지만, 그래서 아직도 ‘실패자’지만 그래,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하며 스스로 토닥여줄 수밖에. 안다.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하지만 내가 지금 하는 얘기는 돈을 많이, 아주 많이 벌고 싶다는 얘기가 아니지 않는가.
가끔 온라인상에서 워킹맘 vs 전업주부 어느 삶이 더 나은지에 대한 쓸데없는 설전들이 오가곤 하는데, 워킹맘과 전업 주부를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잣대로 해석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냥 어떤 것을 선택하든 자신이 그 삶에 얼마나 만족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닌가 싶다.
*이 글은 2020년 창업으로 사회에 발을 내닫기 전에 쓴 글입니다. 그 사이 저는 창업을 했고, 여러곳의 직장도 다녔으며 전시회도 열었습니다. 10년간 전업주부 생활은 사회에 나왔을 때 나에게 어떤 형태로 다가왔을까요? 아무래도 바닥난 자존감, 변화된 직장문화에서 오는 괴리감...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그만큼 또 빠르게 적응하면 되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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