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스페인 가을 여행(4)

결혼 40년 되던 해 2019년 늦가을

by 기현서

1. 떠나기 전 날들(2019.10.28 ~ 11.3)


10월 마지막 주 분당 탄천의 가을


올해 탄천 단풍 색깔은 예년같이 붉지 못하다. 추석이 빨랐고 그 후로 질서 있게 가을 날씨로 접어들지 못한 탓인지 나뭇잎이 갈색으로 변해 조락하거나 붉게 물 들더라도 그 색깔이 선명하지 못하다. 이 것도 요즈음 화두인 기후변화 탓 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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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 전 분당 탄천은 조금 과장하면 살벌했다. 탄천 변과 언덕에는 팔뚝보다 조금 큰 어린 나무들만 심어져 있었다. 지금은 풀밭인 산책로 주변은 모두 철망을 씌운 돌밭이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생태계가 복원되고 새롭게 형성되어 봄에는 벚꽃이 화사하게 피고 가을에는 단풍이 곱게 물 드는 풍경이 되었다. 봄과 가을 탄천의 벚꽃과 단풍은 이제 꽤 멋들어져서 굳이 이들을 구경하러 먼 길 가지 않아도 될 정도이다. 매일 탄천을 산책하며 계절을 충분하게 만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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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풀과 갈대꽃도 나뭇잎을 따라 선명하지 못하다. 예년과 비교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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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산책하면서 이들을 볼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갈대는 생태계 복원을 위해 일부러 심은 것 같다. 여름에 푸른 모습을 보이다가 가을에 하얀 꽃을 피워 바람에 나부끼고 햇빛에 반사되는 모습이 꽤나 정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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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당에 20년 넘게 살면서 아내와 탄천을 수 없이 산책했다. 탄천 풍경에 대한 느낌은 계절에 따라 다르고 시각에 따라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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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을 탄천 석양에 산책하는 것을 좋아한다. 가을 석양 햇빛은 평화스럽고 안정감을 준다. 오늘도 아내와 산책을 한다. 산책 중 아내가 갈대와 강아지풀을 들여다보고 있다. 무엇을 찾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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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보는 가로등 불 빛 속의 갈대도 뜻밖에 정취가 있다. 빛을 받아 희게 보이는 갈대꽃이 바람에 흔들리며 가을의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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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은 탄천의 풍경을 이리저리 변화시킨다. 계절에 따라 다르고 같은 계절이라 하더라도 흐린 날, 맑은 날, 해가 뜰 때와 해가 질 때 그리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때 모두 다르다. 이 모든 것은 빛의 조화 때문일 것이다. 빛이 일상의 풍경을 마음에 평안을 주는 풍경으로 바꾼다. 풍경은 빛으로 빗어지고 사진은 그 순간의 빛을 포착해 저장한다. 그러나 한 가지 같은 것이 있다. 가을 탄천 풍경은 시각이 다르더라도 항상 쓸쓸함이 배어 있다는 것.


밤 가로등에 비치는 탄천 주변 길의 단풍은 또 어떻고. 가로등 불빛을 받아 낯보다 더 진한 단풍 색깔을 뿜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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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넘어가 어둑해진 탄천을 걷다 보면 갑자기 피부에 가을의 서늘함이 느껴진다. 길 건너 대로에 있는 카페에 가서 커피 한 잔 마실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집으로 발걸음을 서둔다.


달라진 남편 대우


올 늦가을에 스페인 여행을 갈 것이라고 연초에 미리 얘기해 둬서 아내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두 달 전 온라인으로 항공권을 발권하고 보여주니 아내는 비로소 현실감이 드는 모양이었다.


뭐라고 꼭 집어서 얘기할 수는 없지만 내게 대하는 태도가 약간 달라졌다. 살갑게 구는 것이다. 자기가 생각했던 2주 정도 패키지여행이 아니고 27일 동안의 자유여행이라고 하니 기분이 좋았을까?


우리 나이로 26살에 나와 결혼하고 40년을 함께 살아온 아내의 나이도 이제 66세이다. 이런 나이에 여행 기간이 자기 예상보다 두 배 넘게 길고 거기에다 남편과 자유롭게 여행한다고 하니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매사 긍정적이고 밝다. 그런 아내가 나도 만족스럽다.


젊었을 때 바쁘게 살다 보니까 그랬는지 아니면 너무 젊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아내의 얼굴과 모습에 그다지 관심을 두고 살지 않았다. 이제 나이 들어 젊은 모습이 사라진 지금 결혼 전 처녀 때 사진을 보니 '어 그런대로 현대적으로 생겼네'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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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젊었을 때부터 브런치를 좋아했다. 스페인 여행 가면 아마도 매일 아침 엑스프레소나 카페 꼰 레체(Cafe con Leche)를 곁들여 바 게떼 꼰 하몬(Baguete Con Jamón)을 먹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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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전 해외생활을 다 마치고 귀국한 뒤부터 지금까지 아내는 한 주에 4~5일은 맥도널드에서 맥모닝을 먹었다. 오천 원 내외 비용으로 아침에 자기만의 행복을 그렇게 찾았다. 그런데 무려 27일 동안 계속해서 본인이 좋아하는 브런치를 매일 먹을 수 있다니.


그리운 것들


그리운 것들이 어디 한 두 가지 이겠는가. 생각해 보면 살아온 날들이 다 아쉬운데.


스페인 생활도 그랬다. 살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되었던 작은 일들이 지금 생각해 보면 작은 행복 들이었는데 그때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보내 버렸다. 그리고 이제 그것들이 문득 생각나고 그리워졌다.


뭐가 그리웠냐고?


살았던 동네의 소박하고 어수선한 카페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동네 사람들이 가족 또는 친구들과 포도주 한잔에 타파스 몇 개로 두세 시간 잡담하며 버티는 장소다.


우리도 카페 콘 레체에 보카디요를 시켜 먹거나 포도주에 이베리코 하몬을 시켜놓고 천천히 마시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것이 그리웠다.


중세의 분위기가 그대로 살아있는 톨레도 구시가의 좁고 가파른 골목길 들이다. 마드리드에서 70킬로 정도 떨어져 있어 차로 1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 곳이다. 우리는 주말에 그곳에 자주 갔다.


돌로 포장된 골목길의 오래된 돌집 들과 그 집들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소박한 전통 상품 가게들을 기웃거렸다. 걷다가 배고프면 광장 카페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의 품평도 곁들어 가며 간단한 식사를 하곤 했다. 한편으로는 지루하기도 한 한적함 그것이 그리웠다.


관대함과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도시와 마을 들이다.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그것 들. 시골 마을은 물론이고 도시에서도 느껴지는 사람들의 여유로움과 관대한 분위기는 항상 마음을 편하게 하였다.


2001년 가족과 함께 프랑스와 이태리를 버스로 여행했다. 다시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의 첫 국경 마을에서 느꼈던 스페인의 여유로움과 평안함 그것이 그리웠다. 프랑스와 이태리 여행 내내 부족했던 것 들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많이 흘렀다. 세상은 변하고 사람들의 삶의 방식도 변한다. 얼마나 변했을까?


아내의 설렘


젊었을 때부터 아내는 여행을 떠나기 전 설렘으로 잠을 잘 이루지 못한다. 이 번 여행은 특히 심하다. 비행기 왕복표를 본 날부터 거의 2개월 기분이 올라 있다.


무엇이 아내를 그렇게 설레게 할까?


아내는 20대 후반부터 시작된 첫 해외생활부터 서양 음식을 좋아하고 잘 먹었다. 다행이었다. 그렇다고 우리 음식에 소홀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우리 음식에도 관심이 많아 지금까지 평생 간장과 된장은 직접 담가 먹고 있다.


평균 이상으로 서양 음식에 호기심이 많고 좋아한다는 얘기이다. 푸드 방송을 보며 소개된 음식을 보며 항상 '맛있겠다' 하고 말한다.


스페인 얘기를 하면 아내가 가장 먼저 추억하는 것은 음식이다. 스페인은 음식이 매우 다양할 뿐 아니라 대부분 우리 입맛에도 맞다. 모르시야(Morcilla)라고 불리는 우리나라 순대와 꼭 닮은 음식도 있다. 물론 맛은 다르지만 만드는 방법은 비슷하다.


아내의 설렘은 아마도 음식 때문일 것이다. 과거 먹었던 스페인 음식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한다. 머릿속에 자꾸 떠 오르는 모양이다. 아내는 이번 여행에서 스페인 음식에 대한 기대가 많다. 이 욕구가 충족되어야 한다. 아니면 미련이 남아 여행이 끝난 뒤 계속 아쉬워할 것이다. 좋은 먹거리를 찾아 잘 먹게 해 주는 것이 아내가 생각하는 여행의 질을 높이는 것이다.


가방 꾸리기 그리고 공항에서


2개월 전부터 아내는 여행 중 입을 옷을 마련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공항 패션도 얘기한다. 나는 가지고 있는 가을과 겨울 겸용 옷 3벌 그리고 내의만 가져가면 될 거야 하고 얘기하면 '한 달 동안 머무는데?' 하고 대답한다.


종종 백화점도 둘러본다. 그래서 나는 내심 짐이 커지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짐을 보니 평균 수준이다. 신발도 신고 가는 운동화가 전부이고 과거와 같이 여분의 구두도 담지 않았다.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스페인 체류 중 필요하면 옷도 사고 구두도 사서 신을 생각인 것이다. 겨울 옷이라 부피가 커서 가져가는 것도 힘이 드니 여행 중 필요하면 사서 입고 구두도 하나 마련하자고 생각한 것 같다. 십중팔구 내 생각이 맞다.


스페인 의류는 유럽 다른 나라보다 대체적으로 우리 체격에 맞다. 스페인 사람들의 체격이 여타 유럽인들보다 상대적으로 크지 않아서 옷을 쉽게 사 입을 수 있다. 색상도 보수적이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자라(Zara)나 망고(Mango) 등도 모두 스페인 의류 브랜드이다.


구두도 잘 만든다. 유행을 잘 반영하면서 보수적이고 편하고 질긴 신발을 만든다. 캠퍼(Camper)가 우리나라에 소개된 브랜드 신발이다. 어렸을 때 좋은 구두를 말할 때 어른들이 고도방 구두라고 했다. 고도방이란 말이 아마도 코르도바(Cordova)를 지칭한 것 같다. 코로도바에서 구두가 많이 생산된다.


공항 출국 패션이 드디어 선 보인다. 르꼬끄 스포츠 패션이다. 나 모르게 언제 사서 숨겨 놓았는지... 하여튼 편해 보이고 어울리니 다행이다. 아내는 옷을 젊게 입기 위해 노력한다. 비싼 옷을 입는다는 것이 아니고 상황에 맞게 입는다.


동네 스포츠센터에서 운동할 때도 르꼬끄 운동복만 착용한다. 이 운동복이 다른 브랜드보다 색깔이나 디자인이 젊다. 아내는 천이 좋아 가볍고 땀을 잘 배출해서 좋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것도 이유가 되겠지. 그러나 오죽하면 같이 운동하는 동네 젊은 후배들이 아내를 르꼬끄 언니라고 부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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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마음


결혼 40년을 넘겼다. 짧지 않은 결혼생활을 회상해 보면 좋았던 기억보다는 좌충우돌했던 기억이 더 많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아내와 나는 서로 큰 소리를 잘 내지 않는다. 그리고 꽤 친해졌다. 은퇴하고 나니 내가 아쉬운 것이 많아서 스스로 그렇게 생각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젊었을 때부터 아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현장에서 해결하는 편이었다. 다음을 잘 기약하지 않고 본인이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현장에서 바로 샀다. 그럴 형편이 못되면 기억해 두었다가 시간이 지나서라도 반드시 갖게 해 주었다.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나중에 사주겠다는 말은 사실상 부정하는 표현이라 아내 마음에 섭섭함을 남긴다. 그럴 필요가 없다. 둘째 갖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하면 살아가며 내내 미련을 가진다. 그리고 푸념으로 변한다. 나는 그것이 싫다. 셋째 그 돈을 절약한다고 해서 내가 조금 더 부자가 되거나 그 반대의 경우에도 더 가난해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다.


그렇게 살아왔다. 아내는 나의 이러한 생각을 적당하게 잘 이용할 줄 안다.


2~3년 전부터는 아내가 짠하다. 나 같은 사람하고 40년 전업주부로 살아왔다는 것이 그렇다. 나는 짜증도 잘 내고 융통성도 없는 편이다. 잘 나지도 못했고 경제적으로도 넉넉하지 못했던 봉급쟁이 남편이었다. 그래도 한 눈 안 팔고 열심히 살아왔다. 이제 나이도 들고 무릎도 시원하지 않아서 계단 내려갈 때 어려워하는 것을 보면 애잔하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삶이라는 것이 살고 돌아서서 보면 허망한 것인데 살아가는 현재 즉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닌 오늘 바로 아내와 잘 지내고 위해 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현실적으로도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지 평생 얻어먹은 누룽지 붙은 돌솥 밥을 앞으로도 계속 얻어먹을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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