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는 멕시코 걸프 만에 동서로 위치한 길이 1,192 킬로미터(745 마일) 폭 최대 144 킬로미터(90 마일)의 도서 국가이다. 미국 플로리다(Florida) 주 최남단으로부터 144 킬로미터 그리고 도미니카 공화국과 아이티가 위치한 히스파뇰라 섬과는 54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국토 면적은 113,232 평방 킬로 미터(44,217 평방 마일)로 구릉이 많고 비옥하다. 서쪽에는 오르가노스 산맥(Sierra de Organos) 그리고 동쪽에는 마에스트라 산맥(Sierra de Maestra)이 있으며 국토의 1/6이 열대 우림이다.
기후는 아열대 지역으로 덥고 습하며 계절적 변화가 거의 없다. 7~10월 중 허리케인이 통과한다.
인구는 11,333천 명(2019년)인데 수도 아바나(Habana)에 210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인종별 구성은 조사 기관에 따라 차이가 있어 혼란스러운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자국 인구 조사에서는 백인 비중이 65% 이지만 마이애미 대학교 쿠바연구소(University of Miami Cuban Institute)는 아프리카계 쿠바인 비중을 62%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물라토(Mullatto, 백인과 흑인 혼혈) 51%, 백인 37%, 흑인 11%, 기타 1% 정도이다. 공용어는 스페인어이다.
쿠바는 1492년 콜럼버스가 도착한 이후 1898년까지 스페인 식민지이었으며 남미와 유럽 간 교역로 상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이었다. 멕시코의 베라 크루스(Veracruz)와 콜롬비아의 카르타헤나(Cartagena)에서 각각 출발한 스페인 상선들은 일단 아바나에 입항한 뒤 스페인 군함의 호위를 받으며 대서양을 건너갔으며 올 때도 역순으로 아바나에 입항 한 뒤 각자 베라크루스와 카르타헤나로 들어갔다.
19세기 초 대부분의 스페인 식민지가 독립했음에도 불구하고 쿠바는 19세기 말 미서 전쟁(1898.4~8) 때까지 식민지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다가 1902년 5월 독립했다. 미서 전쟁이 끝난 뒤 독립 때까지 미국의 통치를 받았다.
1958년 12월 31일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가 비정규전으로 바티스타 정권을 축출하고 정권을 잡을 때까지 쿠바는 미국의 영향력 범위 내에 있었다. 그러나 카스트로 정권은 냉전 시기 소련의 배후 지지 속에서 공산주의 혁명을 수출하는 등 미국과 대립각을 세웠다. 양국 간 대립 관계는 현재까지 60년 넘게 지속되며 많은 정치 외교적 이슈를 만들고 있다.
한 국가를 이해하는데 역사적 유산에 대한 검토는 필수적이다. 쿠바는 1492년 콜럼버스가 발견한 뒤 1511년까지 정복이 완료되었다. 이 과정에서 원주민은 거의 저항하지 못했고 정복자들이 부과한 고된 노동과 전염병(epidemic)으로 인구가 빠르게 감소했다. 16세기 말까지 소수 부족이 산악 지대에 거주하다 소멸했다.
쿠바는 금과 은을 원한 스페인 정복자들에게 매력적이지 못했다. 다만 걸프만 입구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카리브에서 활약하고 있었던 해적을 퇴치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었으며 남미 대륙과 스페인을 오가는 상품의 환적지이었다는 점이 중요했다.
1762년에는 영국이 해적을 앞세워 아바나를 점령하고 2년 정도 지배하였다. 이에 놀란 스페인은 아바나를 요새화 했는데 지금도 그 유적이 견고하게 남아있다. 상업적 교역이 활발했고 인근의 자메이카와 아이티를 상대로 밀무역도 이루어졌다.
16세기 담배가 유럽에 유입되어 이용이 확산되자 쿠바는 부를 창출하는 식민지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담배는 스페인 정복자들이 섬에 들어오기 이전에 원주민들이 기호, 건강, 종교행위 목적으로 사용해왔다. 유럽에 소개된 담배는 초기에 통증 완화를 위한 의료용으로 사용되다가 점점 기호 제품이 되며 늦어도 16세기 말까지는 중요한 교역 상품으로 등장하였다. 이후 담배 씨앗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등으로 퍼져나가 재배되었지만 쿠바 산 담배가 가장 질이 좋아 유럽인들이 선호하였다.
1799-1801년 아이티 독립 전쟁으로 아이티 설탕 산업이 피폐해지자 기후와 토양이 비슷한 쿠바가 이를 이어받아 황금의 기회를 맞이했다. 쿠바는 이후부터 30년 동안 사탕수수 재배 면적을 크게 늘려 최대 생산지가 되었다. 사탕수수 재배에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많은 아프리카인들이 노예상태로 쿠바에 이주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설탕과 담배는 쿠바의 주종 산업이 되었다.
쿠바 독립운동은 1867년 마누엘 세스페데스(Carlos Manuel de Céspedes)가 최초로 주도해 10년 동안 스페인 정부군과 싸웠으나 실패하였다. 그 이후 소강상태를 유지하다가 1895년 민족주의자인 마르티(José Martí)를 중심으로 다시 독립 전쟁이 시작되어 1898년까지 이어졌다.
당시 쿠바 독립 전쟁에 개입할 구실을 찾고 있었던 미국은 1898년 아바나에 정박한 미 해군 전투함이 원인모를 이유로 폭침되자 미국은 이를 스페인의 행위로 간주하고 선전포고를 했다.
1898년 4월부터 시작된 미서 전쟁은 8월까지 진행되었고 미국이 승리했다. 이는 남북 전쟁을 끝내고 북미 대륙 개척에 몰두하던 미국이 그 힘을 바탕으로 먼로주의에 입각해 중남미 국가들에 대한 제국주의 정책을 실행한 최초의 상징적 사건이었다.
미서전쟁 후 쿠바는 미국의 군정을 받게 되지만 이 기간 중 헌법을 제정한 뒤 1902년 공식적으로 독립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쿠바 신헌법 부칙에 일명 ‘플랫 수정안(Platt Amendment)을 삽입해 관타나모(Guantanamo) 해군기지를 영구 임차하고 외교권을 박탈했다.
이 결과 쿠바는 독립 이후 1958년 말까지 미국의 압도적인 정치 경제적 영향력 밑에 놓이게 되었다. 미국은 쿠바 사탕수수 산업에 대한 막대한 투자를 하며 쿠바 경제를 지배했고 정치는 친미 정권을 세워 간섭했다. 이러한 친미 정권들은 부패하고 권위주의적이며 독재 정권으로 민족주의자들의 저항을 받았다.
1952년 쿠데타로 집권한 뒤 대통령으로 취임한 바티스타(Fulgencio Batista)는 이 측면에서 매우 상징적인 인물이다. 바티스타 대통령은 집권 후 대학, 언론, 의회 등을 통제하고 헌법을 정지시키며 부패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다가 카스트로 게릴라 군에게 패전했다. 그는 1958년 12월 30일 망명했고 피델 카스트로 게릴라군은 12월 31일 아바나에 입성하였다.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는 1926년 스페인 이주민 가정에서 출생해 2016년 11월 25일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쿠바 공산주의 혁명 이론가, 마르크스-레닌 주의자, 민족주의자로 쿠바 공산당 제1서기(1965~2011), 수상(1959~1976), 국가 평의회 및 내각 의장(1976~2008), 쿠바 혁명군 총사령관 등의 직위를 가지고 쿠바 혁명 이후 사망할 때까지 직간접적으로 쿠바를 이끌어 왔다.
그는 2008년 2월 건강 문제로 국가 평의회 의장과 쿠바 혁명군 총사령관을 공식적으로 사임하고 은퇴하였으나 쿠바 공산당 제1서기 직은 유지하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2011년 쿠바 공산당 제1서기도 최종적으로 사임하고 야인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쿠바의 유일한 신문이자 당 기관지인 그란마(Granma)에 글을 기고하며 쿠바 혁명 이념이 후임자들에 의해 약화되지 않도록 경계하며 감시했다.
피델 카스트로는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린 후 권력을 공고화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도전을 국내외로부터 받았다. 그의 이념은 학창 시절부터 반제국주의와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했지만 당시 공산주의 이념을 가지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그가 미국의 냉대와 정권 전복 음모에 맞서다 보니 소련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반제국주의와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그의 입장에서 필연적으로 공산주의 이념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만약 당시 미국이 카스트로 정권을 궁지로 몰지 않고 포용을 했더라면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해 보게 하는 대목이다.
파델 카스트로는 1961년 미국의 외교 단절, 4월 피그만 침공(Bay of Pigs Invasion) 등을 겪은 뒤 같은 해 12월 2일 전국에 중계된 텔레비전 방송에서 '나는 마르크스-레닌 주의자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자로 죽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스스로 공산주의자임을 선언했다.
카스트로는 과거 기득권 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공고화하기 위해 토지 재분배, 생산 시설 국유화 등 혁명적인 조치를 취했다. 이러한 조치로 만들어진 미국과의 적대 관계는 결과적으로 미국의 피그만 침공, 카스트로의 사회주의 쿠바(Socialist Cuba) 선언(1961-1962), 미주기구(OAS)에서 쿠바 축출, 쿠바 미사일 위기, 사회주의 체제 강화(1962-1968), 쿠바 혁명 수출(1960-현재), 미국의 쿠바 경제 봉쇄 등 많은 정치외교 및 경제적 사건 등으로 이어졌다.
한편 피델 카스트로는 반미와 반제국주의 투쟁을 앞세워 정적을 제거하며 국내 정국을 완전하게 장악한 뒤 친소 정책을 강화할 수 있었다.
피델 카스트로는 1965년 그가 이끌어 왔던 7·26 운동, 기존의 인민 사회당, 학생 운동 조직 등을 통합해 쿠바 공산당을 창당했다. 1975년에 아바나에서 개최된 제1차 쿠바 공산당 대회에서 그는 공산주의를 쿠바의 국가 노선으로 명확하게 설정하고 공산주의 방식으로 정치, 경제, 행정 및 관료체제 구축을 완료했다.
아울러 피델 카스트로는 국제 외교 무대에서 소련의 후원을 받아 국제적 명성을 확보하고 제3세계 국가들에게 공산주의 혁명 수출을 위해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쿠바 경제는 사탕수수라는 단일 경작물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생산 규모, 국제 가격, 수출 상황에 따라 부침이 커서 국민들의 삶이 평탄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혁명 이념을 완수한다며 교육, 의료, 주거, 도로 건설 등 공공 개발 사업에 막대한 자원을 투자했다. 이 결과 과거 가난한 다수의 생활 수준이 상대적으로 높아지면서 피델 카스트로에 대한 국민적 지지는 계속 높아졌다.
1980년 사탕수수 국제 가격이 하락과 1979년 수확량 감소로 쿠바 경제가 어려워지자 쿠바인들은 보트를 타고 미국으로 불법 입국하기 시작했다. 아바나 소재 페루 대사관에는 일만여 명에 달하는 쿠바인이 난입해 미국 망명을 요청해 이 중 3,500여 명에 미국 입국이 허용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카터(Jimmy Carter) 행정부는 카스트로 정권을 흔들기 위해 초기에는 이 상황을 부추기기도 했다. 그러나 피델 카스트로는 오히려 카터 행정부의 의도를 이용해 불법 이민을 조장했다. 여기에 더해 국내의 범죄자, 정신 이상자, 마약 중독자 등을 모두 체포해 불법 이민자 속에 포함시켜 미국에 보냈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카터 행정부는 정치적 어려움에 처하기도 했다. 이 시기 중 약 12만 명의 쿠바인이 미국으로 이주했다.
1981년 들어온 공화당의 레이건(Ronald Reagan) 행정부는 카터 행정부와 다르게 쿠바에 대한 강경 정책을 구사하며 공공연하게 카스트로 정권의 전복을 언급하기도 했다. 이에 대응해 피델 카스트로도 1981년 말 국내 뎅기열 확산은 미국의 생물 무기 공격이라고 주장하고 영국과 아르헨티나 간에 발생한 포크랜드 전쟁(Falkland war)에서 미국을 포함하는 전 중남미 국가들과는 다르게 아르헨티나를 지지하며 그레나다(Grenada) 좌파정부와 니카라과 산디니스타(Sandinista) 게릴라 단체를 지원하는 등 레이건 행정부에 대한 외교적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한편 1985년 소련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당 서기장이 글라스노스트(glasnost)와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 정책 등 실용 개방 주의 노선을 취하자 쿠바와 소련 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1989년 4월 쿠바 방문 시에 피델 카스트로에게 소련의 쿠바에 대한 경제 원조를 종식한다고 통보했다. 여기에 1991년 소련에 쿠데타가 발생하고 이어서 들어선 엘친(Boris Yeltsin) 정권이 12월 소련 공산당을 해체해 버리자 소련의 쿠바에 대한 경제적 지원은 완전하게 끝났다.
동구권의 소련 위성 국가들도 무너지면서 코메콘(Comecon)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쿠바 교역도 역시 붕괴하였다. 특히 소련의 저렴한 원유 공급 중단은 쿠바 경제에 매우 심각한 악영향을 주었다.
이 결과 쿠바 경제는 1990~91년 2년 동안 국내 총생산의 40%가 감소할 정도로 극심한 어려움에 처했다. 피델 카스트로는 이 시기를 ‘특별 시기(Special Period in Time of Peace)’로 선포하고 긴축 정책과 함께 외화 확보를 위해 부분적 시장 개방과 관광 중진 정책을 실시했다.
그는 우선 자본주의 국가와 관계 강화를 위해 서방 정치인과 투자가의 쿠바 방문을 환영하고 영국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 수상이 취한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에 대한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정치적으로도 외국의 반정부 군 조직에 대한 지지를 하지 않았고 특히 1995년에는 멕시코 정부와 사파티스타 반군(Zapatista Rebel) 간 협상을 촉구하는 성명을 내는 등 유화적 행태를 보여 주기도 했다.
1991년 10월 쿠바 산티아고에서 개최된 제4차 쿠바 공산당 대회에서 피델 카스트로는 내각 의장을 사임하고 그 직책에 행정 관료인 라헤(Carlos Lage)를 임명했다. 그러나 공산당 제1서기와 쿠바 혁명군 총사령관 지위는 유지했다.
또한 제4차 쿠바 공산당 대회는 경제 난국을 돌파하기 위해 농산물 자유 시장과 소규모 개인영업 허용, 미화 사용 허가, 이민 완화, 의회 의원 직접 선출 등의 조치를 승인했다. 이 결과 관광 산업이 특히 성과를 거두었는데 1995년 관광 산업 수입이 당해 년 사탕수수 수출로 벌어들인 수입규모를 초과했다. 이 특별 시기는 2000년까지 지속되었다.
핑크 타이드 시기 경제적 난국에 처한 쿠바를 도운 것은 베네수엘라 차베스(Hugo Chávez) 대통령이었다. 그는 중남미 좌파운동을 주도해온 카스트로의 뒤를 이으며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피델 카스트로를 스승 또는 아버지라고 부르며 정치적 지지와 지원을 받으며 그 대가로 쿠바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했다.
우선 피델 카스트로는 차베스 대통령이 가난한 다수(The Poorest Majority)를 구성하고 있는 서민층에 대한 복지정책 실행에 필요한 의료진, 교사 등 전문 인력을 파견하였고 베네수엘라는 이에 대한 대가로 쿠바가 절실하게 필요한 원유를 장기 저리 조건의 특혜 가격으로 공급해 주었다. 베네수엘라의 원유 공급은 쿠바 경제 회복에 큰 기여를 하였다.
여기에 쿠바는 베네수엘라에 정보 및 군사 부문 전문 인력을 파견해 차베스 정권이 추진하고자 했던 사회주의 개혁 프로젝트를 기획하는 등 그의 장기 집권을 지원했다.
또한 피델 카스트로는 차베스와 함께 미국이 주도한 미주 자유무역 지대(FTAA) 설치 계획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며 이에 대응하는 ‘우리 미주 인민을 위한 볼리바르 연대(Bolivarian Alliance for the Peoples of Our America, ALBA)’을 독자적으로 창설했다. 2010년에는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미주기구(OAS)에 맞서 차베스가 주도한 라틴아메리카-카리브 국가 공동체(CELAC)를 창설하도록 적극 지원했다.
다만 피델 카스트로는 핑크 타이드라는 새로운 환경과 남미 국가들의 우호적 분위기를 바탕으로 미국과 첨예한 대립 상황은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2001년 9월 11일 사태가 발생하자 미국에 연대감을 표시하며 알 카에다를 강력하게 비난했고 필요하다면 미국 항공기가 쿠바 공항을 사용해도 된다는 제안을 하는 등 유화적인 분위기를 보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 미국도 2001년 미첼 허리케인 때 쿠바에 정기적인 식량 구매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2002년 카터 전 대통령이 쿠바를 방문하는 등 미약하나마 관계 개선의 움직임을 보여 주었다.
현상적으로 볼 때 피델 카스트로는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을 앞세워 역내 반미와 반제국주의 정책을 이끌어 가면서 정작 자신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쿠바는 기간 중에 쿠바 인권 문제로 대립과 긴장 관계를 지속했다.
2006년 7월 31일 피델 카스트로는 장출혈 수술을 받은 뒤 건강상 이유로 국가평의회 의장직을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Raúl Castro)에게 위임한다고 발표했다. 그 이후에도 직무를 수행할 정도로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자 2008년 2월에는 국가평의회 의장(국가원수)과 쿠바 혁명군 총사령관을 사임했다. 이에 따라 2월 28일 쿠바 국회(National Assembly of People’s Power)는 라울 카스트로를 국가평의회 의장으로 공식 선출했다.
피델 카스트로는 2011년 4월 11일 그가 마지막까지 가지고 있던 쿠바 공산당 당제 1 서기를 사임하고 라울 카스트로가 이를 이어받았다. 이로서 라울 카스트로는 쿠바 정치, 행정, 군사 등 모든 부문에서 최고 지도자로 등장했다.
라울 카스트로는 1931년 생으로 형인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게릴라 투쟁을 한 쿠바 혁명 1세대로 2006년 카스트로를 대신해 국가평의회 의장 대행을 수행하다가 2008년 2월 24일 정식으로 의장에 선임되었다. 그는 카스트로를 이은 쿠바의 막강한 통치자로 군림했다.
2018년 4월 19일 제7차 공산당 대회에서 그는 국가평의회 의장을 사임하고 디아즈 카넬(MIguel Diaz-Canel)에게 이양했다. 다만 공산당 제1서기는 유지하며 막후에서 정치력을 행사했지만 이 직책도 2021년 제8차 공산당 대회에서 디아즈 카넬에게 이양했다.
라울 카스트로는 집권한 뒤 ‘구조적이고 개념적인 변화(structural and conceptual changes)’가 필요한 시점임을 주장하며 개혁 개방의 소신을 표명했다. 구체적으로는 1994년 특별 시기에 피델 카스트로가 취했던 민간 기업 설립 및 운영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고 2008년 구스타브(Gustav)와 이케(Ike) 허리케인 피해복구를 위해 개인 영농 경작 면적을 확대했다. 또한 민간인의 인터넷 접속 허용과 휴대폰 보유 허가 등의 조치도 취했다.
그러나 그가 국가 원수로서 취할 수 있는 개혁 개방은 여러 가지 이유로 한계가 있었다.
첫째는 카스트로가 유지해온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한 공산주의 혁명 이념인데 이를 포기하지 않는 한 어떠한 개혁 개방 정책도 공산주의 혁명의 기술적 수단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도 피델 카스트로는 공산당 기관지이며 쿠바 내 유일한 신문인 그란마(Granma)에 기고를 하면서 정책적 훈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라울 카스트로 의장도 피델 카스트로가 유지하고자 하는 이념적 장벽을 넘어설 수가 없었다.
둘째는 쿠바 헌법과 관료체제이다. 쿠바 헌법은 어떠한 가치도 공산주의 이념을 우선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백하게 규정하고 있고 어떠한 개혁 개방도 공산주의 혁명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여기에 혁명 이후 신진 기득권 계층으로 등장한 군부와 관료 체제가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호를 위해 개혁 개방 정책에 대한 견제와 감시를 하고 있다.
또한 미국의 쿠바에 대한 외교 정책의 목표는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의 회복인데 바로 이 지점에서 쿠바는 미국과 전혀 타협할 여지가 없다. 즉 쿠바 정권은 정치 경제와 사회 시스템 본질에 영향을 주는 변화는 기득권 보호 차원에서 결코 허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셋째는 쿠바 군부의 개혁 개방에 대한 경계심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볼 때 라울 카스트로가 최소한으로 허용한 경제 부문 개혁 개방의 최대 수혜자는 군부이었다. 특히 라울 카스트로는 1959년부터 2008년까지 국방장관을 역임했고 그 이후 군 통수권자로 군부가 그의 권력 기반이었다. 따라서 군부는 과도한 개혁개방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붕괴할 수 있다는 우려를 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과 서방 세계가 요구하는 시장 주도의 개혁개방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