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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자까야 Jan 19. 2020

내가 내 마음을 알아차리는 방법


학교에서의 나는 매우 쾌활하다. 그리고 자주 크게 웃는다. 어느날 학교에서  꽤나 심한 목욕적인 일을 당하고 나서도 웃고 있는 내  모습을 본 몇몇 선생님들은 내가 캔디처럼 밝다며 내 성격을 칭찬했다.  그래서 나는 '양갈래 머리를 하고 들판을 뛰어다니는' 캔디는,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를 외치는 캔디는 '조증의 광녀'라고 대답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외롭고 슬픈데 어떻게 안 울고 웃을 수 있을까? 그런데 나의 캔디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 선생님들은 빵 터지며 웃어 댔다. 나의 캔디 해석론이 너무 웃긴대나? 


나는 캔디 이론을 말하면서 모순적이게도, 모욕적인 일을 겪고 기분이 우울한 와중에도, 무의식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밝은 척 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기분 보다 주변 사람들의 기분을 더 신경쓰는 내가 이러다 정말 '캔디를 능가하는 광녀'가 될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학교에서 화가 나도 화를 바로 내지 못했고 부당한 일을 당해도 내 권리에 대해  맞써 싸우지 못했다. 화가 치밀어 오르는 순간에도 학교에서 분란을 일으킬까봐 두려워 어색한 웃음으로 내 감정을 덮어 버렸다. 그리고 사사로운 것들에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락 내릴까봐도 두려웠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내 진짜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게 되었다...

사람은 힘든 일을 겪을수록 그 경험을 통해  지혜와 담대함을 얻기도하지만 동시에 상처로 인한 마음의 흉터가 더 깊게 남기도 한다. 그것을 우리는 '트라우마'라고 부른다. 나는  언젠가부터 트라우마를 다시 겪지 않기위해  캔디처럼 내 진짜 마음에 페르소나라는 사회적 가면을 두껍게 씌우고선 웃는 모습으로 가장하기 시작했던것 같다. 그래서인지 학교에서 유달리 많이 웃은 날이면 여지없이 퇴근하고 나서 우울감이 몰려왔다. 학교에선 정신없이 바쁘게 생활해서인지 미쳐 인식하지 못했던 동료 선생님의, 또는 학부모, 학생들의 날선 말들이 퇴근 후엔 구체적인 형상을 띄며 내 마음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아까 그 선생님은 내게 무슨 의도로 그런 식으로 말한 거지?"


"학부모 상담 그분은 내게 왜 적대적이었을까?"


"그 아이는 왜 내 말을  무시했을까?" 


웃는 얼굴 뒤엔 우울한 또 다른 내가 점점 커져가며 나를 잠식해 가고 있었다. 시간의 흐름이 누적될 수록 웃고 있는 페르소나와 원래의 나 사이의 괴리감이 커져갔다. 결국 타인의 무례한 말과 행동에 학습된 무기력감과 우울감은 신체적 증상으로 발병되었다. 



우울할때면 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학교생활과 조직 생활의 힘듦하소연 하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가벼운 동정심의 형태라도 위로를 받고 싶었던것 같다. 하지만 넋두리에 가까운 하소연을 하고 나면 잠시 동안만 괜찮아질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또 다시 학교에서는 과도하게 밝고 집에 돌아오면 무기력해지는 우울감이 반복되었다.


그러다  몸의  한계가 오기 시작했다. 둔감하게도 탈모가 오고,  위궤양이 도지고, 몸에 염증이 올라오고나서야  내가 그동 스트레스를 너무 참기만 했구나 라는 인식을 하게 된것이다. 몸이 아파서 출근도 못하고 몸도 마음도 밑바닥을 치며 울었던 어느 날 나는 나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나이 때문에 갱년기가 왔나?


체력이 떨어져서인가?


나는 착한 사람 콤플렉슨가?



이것저것 생각의 유랑의 끝에 결국 문제는 외부 요인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결론에 다달았다.

 직업병인지는 몰라도 항상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그리고 밖에서는 남들에게 도움을 줘야한다는 생각을 했었다. 내가 있어야 세상도 존재하는건데  그동안 정작 나 스스로를 챙기고 보듬어줘야한다는 생각은  했었다. 기껏해야 나를 생각한다는 수준은 피곤하면 영양제나 좀 사다 먹고 휴일에는 평소보다 잠을 좀 더 자면서 나 스스로를 잘 챙겨왔다고 위안하고 살았었다.


'셀프 힐러(Self-Healer)' 라는 말이 있다.  자신의 정신적 고통을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적극적인 내면의 치유자'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힘듦을, 내 정신적 문제들을 타인에 의존하기 보다 내 스스로를 보듬으며 정신적으로 건강해 지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찾아 가고 싶다.  내면 치유의 방법에는 한 가지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다르고 상태마다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림을 그리거나  켈리그라피를 하면서,  또 어떤 사람들은  요가와 명상 등을 하며 각자만의 방식으로 힐링을 한다.


나도 두 달 전 부터 시간이 나면 집에서 뻗어 있거나 의미 없는 수다로 에너지를 소비하기 보다  혼자 걸으며 사유하는 시간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글을 쓰는 것을 통해 여러 가지 감정의 덩어리들을 배출해 보려 노력 중이다. (혹자는 이것을 '치유의 글쓰기' 라고 하더라.)


 사실 지난 11월 중순부터 브런치에 글을 쓰게 된 것도 그런 이유 중의 하나였다. 오랜 시간 동안 차곡 차곡 누적된 마음의 응어리들과 나의 열등감들이 내 무의식으로 자리 잡은 것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 것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단기간에 내 상태가 호전 되거나 나를 바꾸어 나간다는 성급한 욕심은 바라지 않는다. 하나 하나씩 나를 위한 힐링 방법을 찾아가면서 언젠가는 남의 눈치 때문에 어색하게 웃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웃고 행복해 하는 내가 되길 희망한다. 그런 길을 가면서 나와 같은 사람을 만나면  좋은 생각과 마음을 공유하며 시너지 효과를 함께 누려보고도 싶다. 내 에너지를 바닥내어 남의 에너지를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에너지가 채워지는  순간이 오기를 바란다.

 


         <마음가면>을 쓴 저자 브레네 브라운의 말처럼

                "숨기지말자!  드러내면 강해진다!"


P.S.  : 나는 아무래도 '캔디'보다는 '빨강머리 앤'이 훨씬 매력적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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