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내 이 임무를 하겠다.

by 김로운

수원 장내에서 가장 부잣집답게 안뜰에는 잘 가꿔진 나무가 듬성듬성 고고하게 서 있었다. 잘 닦여서 반짝거리는 대청마루가 있었고 그 앞으로 전통 한복 차림의 중년 남녀가 꼿꼿하게 서 있었다. 도련님의 부모님이다.


검은 갓을 쓴 아버지는 설컹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꼬장꼬장한 모습이었고 쪽진 머리를 촘촘하게 빗은 어머니는 날카로운 눈매에 바늘 하나 들어갈 곳 없어 보였다. 그들이 성큼성큼 들어서는 나를 노려보자 그대로 멈추고 다소곳이 허리를 굽혔다.

“도련님을 찾아뵈러 왔습니다. 저에게 혼인을 약속하셨어요.”


설컹한 턱수염을 휘날리며 양반 아버지가 소리쳤다.


“돌아가라!”


참혹한 말이 날아와 나를 때렸다. 양반 마님의 새된 목소리가 곧바로 이어졌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 썩 나가지 못해?”


뒤에서 종들이 쳐다보고 있었다. 양반 마님은 나를 끌어내라고 소리쳤다. 종들이 잡으러 달려드는데 나도 이대로 가만있을 수는 없었다. 낮은 벽담 너머 사랑방을 향해 소리 질렀다.


“도련님! 도련님! 저 세미 왔습니다. 나와 보세요!”


그때 담 너머에서 도련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런 년 모른다.”

갑자기 온몸의 피가 멈추는 것 같았다.


“네? 향수원의 세미를 모르십니까? 저를 데려간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내 입술과 말과 몸이 모두 와들와들 떨리고 있었다. 도련님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모른다니까.”


그 말이 내 심장을 베었다. 발밑의 땅이 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남자 종들이 내 팔을 거칠게 잡더니 끌고 나갔다. 온몸에 힘이 빠져 몸부림칠 수도 없었다.


휙! 그대로 문 밖으로 내던져졌다. 바닥에 내동댕이쳐지자 마음도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보며 혀를 찼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바닥에 엎드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몰라 끝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흙먼지가 날아와 나를 덮었다.


화강

쇼팽의 녹턴은 항상 영롱하고 부드러워 건반 위의 손가락이 저절로 춤추는 것 같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 때문에 피아노 소리는 더욱 명징하고 투명하다. 다만 튀어나온 옷소매의 레이스 장식 때문에 건반에서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거추장스럽기는 하다. 그러나 우아한 레이스 장식이 달린 실크 블라우스를 포기할 수는 없다.


마지막 부분을 마치고 손을 건반에서 떼는 데 뒤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ボラボ!やっぱり愛熟賞のピアノの実力は外見ほど美しいです。(보라보! 역시 화강상의 피아노 실력은 외모만큼 아름답습니다.)”


“私とお茶でも飲みましょう!(저랑 차 한잔 합시다!)”


돌아보자 학교 일본 남학생 서넛에 서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 이젠 이런 게 자연스럽다. 피아노를 치고 나면 항상 있는 일이니까. 이들이 피아노 소리보다는 외모에 더 반한 걸 알고 있다. 커다란 레이스가 주렁주렁 달린 실크 블라우스를 입어 빛나는 나의 품격에 모든 남자들이 힘을 잃는 것 같다.


하지만 이것도 한두 번이지. 지겹다. 그리고 나의 신분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박수에 화답하지 않고 피아노 뚜껑을 닫았다. 의자에서 일어나 악보를 챙겨 가방에 집어넣는데 익숙한 조선어 목소리가 들렸다.

“사슴을 닮은 긴 목의 그대는 백옥처럼 빛나며 이 척박한 땅 위에 핀 한송이 장미요, 쏟아지는 빗 속에 핀 무지개요, 청명한 하늘에 빛나는 태양이구려.”


이렇게 낯간지러운 시를 마구 읊다니. 필용이었다. 그가 얼른 다가와 내 악보 가방을 받아 들었다. 함께 피아노 연습실 문을 나오면서 그에게 쏘아붙였다.


“부끄럽지도 않아?”


필용은 냉정한 내 얼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시를 이어갔다.


“그대는 내 인생의 단 하나의 빛이요, 어둠을 밝히는 달이로소이다.”


필용이 내 옆에 붙자 새침하게 물었다.

“그래서 차 한 잔 하자고?”


도쿄 음악 대학 본관은 르네상스식 건축 양식으로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아직은 2월이라 차가운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지만 본관 앞 정원에는 따뜻한 햇살이 가득 차 움추러든 몸이 활짝 펴졌다. 돌계단을 내려 걸어가며 조금은 따뜻해진 바람을 느꼈다.


“시간 없을 거죠?”


필용이 물었다.


“어.”


“그럼 조선인 유학생 모임에 갈 시간은 있어요?”


“조선인 유학생 모임?”


도쿄 변두리에 있는 ‘조선 기독 청년 회관’에 간 건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다. 나는 항상 어머니로부터 경거망동하지 말하는 말만 듣고 자랐다. 어릴 때부터 아무나하고 놀 수 없었고 아무렇게나 옷을 입을 수도 없었다. 아무 장소나 갈 수 없었고 아무 음식이나 먹을 수도 없었다. 어머니는 항상 법도를 지키라며 한정된 장소에서 정해진 사람과만 갖추어진 옷을 입고 만나거나 놀 수 있었다.

그러나 음악 공부를 하러 도쿄까지 온 마당에 아무 장소가 갈 수 없는 건 아니지 않은가? 더구나 조선인 유학생 모임이라니. 도쿄에 온 지 벌씨 2년이 넘었지만 이런 모임에 대한 궁금증은 항상 있었다. 뭐 보통이 아닌 유학생 모임이라는 소문은 들었다.


더구나 필용의 데이트 신청을 받으니 더욱 가고 싶어졌다. 그 날이 2월 8일인 건 별 생각이 없었다. 회관에 도착한 건 어둑어둑해진 저녁 7시쯤이었다. 문 앞으로 가서 놀란 건 회관을 둘러싸고 있는 삼엄한 경찰들 때문이었다. 제복을 입은 일본 경찰이 100여 명쯤 총칼을 들고 회관을 지키고 있었다.

“이거 왜 이래? 뭐 잘 못 됐어?”


짜증이 나서 필용에게 쏘아붙이자 그는 한번 안으로 들어가서 구경이나 하자고 대답했다.


“유학생들이 모여 뭐 하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아니. 경찰이 보는 데서 데이트를 할 순 없잖아?”


화를 내자 필용은 선선하게 돌아 섰다.


“그럼 갑시다. 화강 씨도 한 번쯤 조선 유학생 모임에 와 보는 게 좋다고 생각했는데 싫으면 돌아가요.”


그때 갑자기 호기심이 확 일었다. 그들은 무슨 얘기를 할까? 내가 만나보지 못한, 내가 알지 못하는 조선에서 온 유학생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일을 하며 살고 있을까?


“아냐. 들어가! 구경이나 하지 뭐!”


안으로 들어가자 넓은 강당 안에 학생복 차림의 조선인 남녀들이 가득 차 철재 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앞 쪽 강단 위 벽면에는 ‘재일 조선 유학생 정기 모임’이라고 쓰인 현수막이 커다랗게 붙어 있었지만 강단 위는 비어 있었다. 학생들은 두셋씩 모여 낮은 소리로 웅성웅성거렸다.


‘오늘 조직 개편에 대한 토의를 한다고 하는데...’


‘그게 아냐! 밖에 경찰 못 봤어? 실제로는 조선 독립 선언서 낭독을 하는 거야.’

불결한 철제 의자에 앉기에는 내가 입은 실크 스커트 자락이 구겨질까 봐 망설이고 서 있는데 그런 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조선 독립 선언서? 그게 뭐야? 금방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낮게 웅성거리는 그들의 목소리에는 긴장이 가득했다.


“어휴! 여기 불편하고 시끄러워. 어디 조용한 데 없어?”

의자에 앉을 수가 없어서 필용에게 묻자 그가 강단 옆 벽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문이 있었고 ‘회의실’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화강 씨! 저기로 갑시다.”


강당 안보다 더 무거운 이야기가 오갈 줄 알았다면 회의실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더 조용한 건 맞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조용하면서도 무거운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강당 안보다 긴장감이 더 팽팽하게 돌고 있었다. 10여 명의 남녀 학생들이 둘러앉은 탁자 앞에 눈빛이 형형한 남자가 서서 단호하게 말을 했다. 손에는 ‘재일 조선 유학생 선언서’라고 쓰인 종이를 들고 있었다.


“강연장에는 벌써 많은 학생들이 모여 있습니다. 경찰도 많이 와 있어요.”

무거운 얘기를 하는 남자치고는 큰 키, 균형 잡힌 체구, 수려한 이마, 형형한 눈빛을 가졌다. 탁자 끝자리 필용 옆에 앉아서도 그에게 눈을 떼기 힘들어 이야기가 귀에 잘 안 들어왔다. 그가 손에 든 선언서를 올리면서 좌중을 둘러보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선언서를 경찰에 잡히지 않고 조선으로 들여가야 합니다. 누가 하실 분 있습니까?”

말이 끝나자마자 10여 명의 학생들은 심각한 얼굴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여기 뭐 하는 데야?”


내가 필용 쪽으로 몸을 기울여 물었다. 그러자 필용이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때 맞은편에 앉은 여학생이 손을 들었다. 숨 막히게 딱 떨어진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조금 떨리지만 단호한 목소리였다. 앉아 있던 모든 학생들이 일제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눈빛이 형형한 남자가 단발머리를 쳐다보았다. 좀 뭉글해진 눈빛이었다.


“김마리아 학생! 여학생인데...”


“경찰의 눈을 피하기에 좋지 않습니까?”


단발머리가 침착하게 대응하자 눈빛이 형형한 남자는 이내 뭉글해진 눈빛을 거두었다.


“네. 그렇네요. 감사합니다.”


남자는 선언서 1장을 김마리아에게 건네고 다시 좌중을 돌아보며 물었다.


“만약을 대비해서 한 분 더 갔으면 하는데...”


그때 모든 눈빛이 나를 향했다. 왜 나를? 뭘 했다고? 여자래서? 눈빛이 형형한 남자도 보더니 말했다.


“박필용 학생 옆에 계시는 여학생 분도 맡아 주시죠?”


“내가?... 감히 이런 하찮은 명령을 내게 하느냐?”

말이 떨어지자마자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구석 누군가는 키득댄 것 같고 눈빛이 형형한 남자도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표정을 가다듬더니 심각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선언서는 하찮은 게 아니라 조선의 운명을 바꾸는 중대한 것입니다. 여학생 분은 대단한 미인이라서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기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 네가 감히 미인이라고 명하였느냐?”


눈빛이 형형한 남자는 또 당황해 말을 못 했다.


“좋다. 이것이 중대한 것이라고 하니 이 임무를 하겠다.”


모르겠다. 이런 말이 입에서 어떻게 나왔는지는. 집에서 어머니가 평소 가르치고 익힌 대로 말을 하다 보니 이런 말투가 나도 모르게 나와 버렸다. 더구나 미인이라고 하지 않는가? 기분이 좋았다. 다만 옆에 있는 필용은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하는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