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시대에 따라 참 다른 모습을 보인다. 서로 얼굴을 보지 않고 인터넷으로 소통하며 감정을 키워 나간 사랑도 있다. 1997년에 개봉한 영화 ‘접속’ 속의 사랑이 그렇다.
‘접속’ 속 남자 주인공 방송국 라디오 PD 동현과 케이블 TV의 텔레 마케터 수현이 영화 속에서 만나는 건 마지막 부분이다. 그전에 둘은 1990년대 PC 통신을 통해서만 대화한다. 핸드폰으로 동영상 통화까지 하는 지금의 우리로서는 신석기시대의 유물을 보는 듯하다.
라디오 프로그램 게시판을 통해 동현은 수현의 존재를 알게 된다. 수현이 신청한 음악 벨벳 언더 그라운드의 노래는 동현의 옛 연인이 가지고 있던 희귀 음반의 노래이기 때문이다. 갑자기 사라져 버린 옛 연인을 필사적으로 찾고 있던 동현으로서는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볼 수밖에 없다. PC 통신을 통해. 동현이 쓰는 아이디 ‘해피 엔드’는 영화의 결말을 암시하는 듯하고 수현이 쓰는 아이디 ‘여인 2’는 오글거리는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수현은 절친의 남자 친구를 짝사랑을 하고 있었고 그 아픔을 통신상으로 동현에게 내비치며 위로를 구한다. 둘은 벨벳 언더 그라운드의 음반을 구하는 가게 앞에서 스치며 지나가기도 하지만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다. 이것이야말로 인터넷에 한번 접속하려면 화장실에 한번 다녀오는 게 나았던 속도가 느린 PC 통신 시대 로맨스의 묘미다.
불과 30년 전 90년대에는 인터넷에 사진 파일을 올리기 힘들어 서로 감정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얼굴을 마주 보고도 알아보지를 못한다. 90년대 영화를 보는 나는 무척 안타까웠지만 어제 다시 보는 나는 안타까우면서도 우스웠다.
영화에서는 시대의 아픔도 드러난다. 동현의 옛 연인은 학생 운동을 하다 강제 징집을 당한 후 군대에서 의문사한 남자에게 죄책감을 느껴 동현을 떠났다. 영화를 만든 장윤현 감독은 학생 운동 출신으로 노동 파업을 그린 영화 ‘파업 전야’를 1990년에 개봉했다. 전남대에서 상영을 막기 위해 경찰이 교문을 폐쇄하고 학생들이 그에 대항해 화염병을 던지며 시위를 벌였다는 전설의 영화이다.
그러나 장윤현 감독의 이후 영화들은 그런 경력과는 상관없는 상업 영화들이다. 다만 대단히 다른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다. 7년 후 내놓은 영화 ‘접속’은 이전의 한국 멜로 영화들과는 완전히 궤도를 달리한다. 두 주인공은 대도시 속에서 살고 첨단 직업인 방송국 PD와 텔레 마케터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여주인공은 경제적인 독립을 해 자기 차를 운전해 다니고 남주를 좋아하는 여자 조연은 방송국 작가로 당돌한 성격에 프로페셔널하다.
또한 그들의 로맨스는 얼굴도 보지 못하고 인터넷상으로만 이루어진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눈물도 보이지 않고 담담하고 건조하게 감정을 이끌어간다. 이전 한국 멜로 영화들이 눈물이 폭발하는 신파 멜로였던 것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 그래서 이 영화는 1997년 개봉해 엄청난 흥행을 하며 새로운 로맨스 물의 지평을 열었다. 당시 대중은 이런 도회적이고 세련된 로맨스를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지금 보면 그냥 90년대 감수성의 한국 로맨스 영화일 뿐이다. 2020년대 한국에서 나오는 로맨스 영화는 완전히 결이 다르다. 스마트폰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인터넷이 인공지능으로까지 간 시대, 다른 감수성을 보이고 있다. 수현과 동현이 지금 시대에 살고 있다면 레코드 앞에서 스치며 지나갈 때 서로 알아보지 못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서로의 SNS를 뒤지며 얼굴 정도는 진작에 파악할 거다.
피카디리 극장 앞에서 동현이 나타나지 않자 수현을 한낮에서부터 밤이 늦을 때까지 기다린다. 지금 같으면 그냥 기다리기만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핸드폰으로 전화를 수십 번 했을 것이다. 동현이 핸드폰을 꺼 놓고 받지 않는다면 (아무리 성격이 좋을지라고) 기껏해야 1시간 기다리고 돌아갔을 것이다.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 명장면은 지금으로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다.
사랑은 시대의 영향을 강력하게 받는다. 2020년대 로맨스 영화는 완전히 다른 양상을 보인다. 다음번에 2020년대 로맨스 영화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 배우 한석규는 꽃미남이 아님에도 과장이 없는 자연스러운 연기와 중저음의 낮은 목소리로 이 영화의 남자 주인공 캐릭터를 잘 표현한다. 그러나 ‘이런 연기가 2020년대에도 매력적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현재도 초절정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전도연은 이 영화로 본격적인 데뷔를 했다. ‘접속’ 속에서는 도시 여성 노동자의 도회적인 매력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전 멜로 영화의 여주인공들과는 완전히 다른 연기를 선보이며 오늘까지도 승승장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