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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운 Nov 03. 2022

동거

포에트리 수록, 이후 퇴고

내 잘못으로 깨진 유리컵을 줍는 네 손이 중요한 거야 그 마음이 

     

사랑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다는 신의 말 호박이 떨어지는 소리만큼이나 무력하지 그런 말을 할 때면 누군가 맞는 소리가 들린다   

   

“사랑하면 힘이 세진다고 하던데.”     


나는 감을 깎고 있었다 오래된 과도의 손잡이는 끈적끈적했다 동그란 접시에 감 조각을 내려놓을 때마다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지 댕그랑 댕그랑 잘 만들어진 매끈한 불전함을 목에 걸고     


동전 하나 감 하나 번갈아 놓으며 소원을 빌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믿음

소망

사랑     


내가 사랑이라 이름 붙인 감 조각을 네가 집어들기를 바라면서 

감을 깎았다      


그러나 언제나 사랑만이 접시에 가장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사랑을 위해 나는 꽃집에서 장미가 아닌 꽃을 고를 때마다 ‘서재에 꽂으려고요’ 하고 묻지도 않은 변명을 했다 물론 거짓말이다 나는 서재가 없으니까

우리는 집이 없으니까     


더운 마루에는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오래된 엽서처럼 너는 감을 먹고 있었지 가장 왼쪽부터  

    

믿음이 반쯤

없어진다

     

“남기지 말고 먹어. 벌레 꼬여.”

“우리도 음식물 쓰레기 압축기 살까?”    

 

산다는 것은 쓰레기가 또 늘어난다는 일일 뿐인데     


“그게 갖고 싶어.”     


나는 들리지 않은 척 감을 깎았다     


다시 한 번 접시에 믿음, 소망, 사랑을 번갈아 놓는다 함께 산다는 것은 이런 일들이 반복되는 거라고, 이런 것들과 닮은 거라고 생각했다     


불이 꺼지지 않는 숲을 바라보고 서 있거나 냉장고를 열 때마다 잘린 머리를 발견하는 것처럼 소름끼치는 일들과 접시에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번갈아 놓는 일이 반복되는 일  

   

그런 반복

그런 사건

그런 

삶     


사랑이라고 이름붙인 감을 먹으면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있게 될까

장미를 사지 않고 혼인 신고서를 쓰지 않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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