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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큰 Jul 12. 2024

꼿꼿하게처럼 꼿꼿하게


다 쓴 건전지와 새 건전지를 구별하는 방법을 아는지.

아는 사람은 아는 생활팁인데, 구별법이 의외로 간단하다. 건전지를 3cm 높이에서 마이너스(-) 극을 아래로 해서 일자로 떨어뜨리는 것이다. 그러면 새 건전지는 꼿꼿하게 서는 반면에, 다 쓴 건전지는 바닥에 한두 번 통통 튀다가 픽 쓰러져 버린다.


수명을 다한 건전지가 똑바로 서지 못하고 누워 버린다는 말을 듣고 나는 왠지 서글펐다. 늙고 쇠약해진 탓에 제힘으로 꼿꼿이 서지 못하는 것이 건전지나 사람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늘 구부정한 자세였다. 2차 성징으로 가슴이 나오기 시작하던 무렵부터였나. 부끄럽기도 하고 못마땅하기도 한 마음에 일부러 어깨를 움츠리고 다니다가 그게 버릇이 되어 오랫동안을 구부정하게 지냈다. 어른이 되어 번역 일을 하면서부터는 거북목도 얻고 허리까지 구부정해져서 자세가 더욱 형편없어졌다. 구부정한 어깨, 목, 허리에다가 외출을 잘하지 않아 부실해진 다리로 흐느적흐느적 걸어 다니는 내 모습은 흡사 좀비 같아 보였을지도.


하지만 요즘은 나도 모르게 자꾸만 자세를 고치게 된다. 잘못 내리친 망치질로 구부러진 못을 억지로 힘주어 다시 펴듯, 펼 수 있는 부위는 뭐든 바루려고 노력한다. 하늘에서 누가 마치 포니테일로 묶은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턱도 자연스럽게 당기고 아랫배에 힘도 주고 하면서 말이다. 자세가 나쁘면 소화도 안되고 온갖 병이 따라온다는 등의 건강 정보들을 주워들을 때마다 기껏해야 10초 정도 자세를 고쳐 앉던 때와는 다르다. 100살을 굳이 반으로 접어서 반백이라고 놀려대는 사람들 앞에서 벌써부터 제 몸뚱이 하나 똑바로 세우지 못하는 다 쓴 건전지처럼 보이기 싫었던 걸까?


‘꼿꼿하다’는 단어는 왠지 거만하고 꼬장꼬장한 느낌이 들어서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요즘은 180도 달리 보인다. 마치 두 다리를 척 벌리고 곧게 서 있는 듯한 생김새가 야무져 보이기까지 한다. 지난 27년간 라디오를 진행하다 최근에 하차한 최화정은 얼마 전 한 방송에 나와서 이런 말을 했다. “허리 꼿꼿이 세우고 입꼬리를 올리면 못해낼 일이 없다고 했어요.” 그런 기세로 나도 일단 꼿꼿하게처럼 꼿꼿하게 서는 것에서부터 반백의 날들을 걸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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