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는 산책 | 첫 번째 이야기
삶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인간의 의지를 시험합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거나,
아니면 모든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는 거죠.
<마법의 순간> 파울로 코엘료
내 첫 전자책이 출간되고 한 달이 조금 지났을 때, 나는 어이없게도 무기력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가족, 지인들의 축하와 독자들의 반응이 경기장 관중처럼 우르르 빠져나간 뒤 내가 책을 낸 사실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세상 밋밋한 날들을 보내던 무렵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나는 블로그와 브런치에 종종 글을 올리면서 새로운 글도 구상하고 늘 그랬듯 남자 셋과 아옹다옹 살아가는 모양새였지만, 속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평범한 하루,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 예전과 전혀 달라진 것도 없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들에 나는 날마다 홀로 가라앉았다.
그러는 사이 드문드문 들어오던 번역 일마저 또, 다시, 어게인,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이대로 번역 일을 그만둘 수 없다며 불안함에 몸서리치다가 ‘이런 번역가도 있습니다’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그때처럼 말이다. 명색이 번역가에 관한 책을 낸 사람이 번역가란 타이틀 무색하게 이렇게 마냥 논다고? 심지어 몇 달 전에 끝낸 쉰다섯 번째 번역의 소박한 번역료가 내 통장에 입금되었을 때는 이것이 어쩌면 나의 마지막 번역료가 될 것 같은 불길함마저 느꼈다. 남부끄러워 어디 하소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야, 괜찮아, 번역 일이 없어도 내겐 글쓰기가 있잖아. 남아도는 게 시간이면 그 시간에 글을 쓰면 되지, 혹시 알아? 두 번째 책을 낼 기회가 또 주어질지…
라며 가라앉는 마음을 겨우 끌어올려 노트북 앞에 앉았는데, 이번에는 작가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도통 글이 써지지가 않았다. 무작정 덤비는 심정으로 아무 부담 없이 글을 썼던 때와는 다르게 자꾸만 욕심을 내는 나. 정말 엉망으로 쓴 건지 아니면 너무 잘 쓰고 싶었던 마음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꾸역꾸역 쓴 몇 꼭지의 글들은 전혀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작 전자책 하나 내놓고서 뭐라도 된 것처럼 촌스럽게 오버하기냐 싶어 스스로 얼마나 한심했는지….
결국 나는 한동안 좀비처럼 지냈다. 번역 공부나 글쓰기는커녕 책을 읽거나 살림하는 것도 자꾸만 미룬 채 집에만 박혀 멍하니. 죽은 것도 살아있는 것도 아닌 시체처럼. 아니 더러는 죽어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갱년기는 아닌 듯했다. 물론 나도 내 나이는 처음이고 아직 갱년기를 겪어본 적이 없어 잘은 모르지만, 그래도 갱년기는 아닌 듯했다. 아무 이유 없이 짜증이 나거나 마냥 우울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보다는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짜증을 낼 기운도, 우울함에 빠져 허우적댈 기운도 없는 상태였다고 할까. 그냥 딱 해야 할 일만 하며 하루하루 지냈다. 그거라도 할 기운이 남아있어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계속 이러면 어쩌지, 이러다가 정말로 땅으로 꺼져버리겠어, 이제 곧 갱년기도 시작될 텐데 벌써부터 이러면 어쩌려고 그래, 하며 슬슬 심각하게 걱정되던 어느 날! 다행히도 나는 ‘무기력’이라는 단어를 만난 것이다. 그리고 무기력과는 마치 연관검색어처럼 종종 붙어 다니는 ‘산책’이라는 단어도. 이토록 뻔한 결말조차 쉽게 생각해 내지 못하는 무기력이라니.
아무튼 좀비가 된 원인이 다름 아닌 허탈감과 조급함에서 오는 ‘무기력’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 순간, 나는 감히 부활을 결심했다. 그래, 무기력이었구나! 맞아, 산책이란 게 있었지! 일단 좀 나가서 걸어야겠다. 그런데 어디로? 너무 멀어서 걷기 힘들거나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은 가고 싶지 않은데……
아하!
우리 동네 도서관을 떠올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뚜벅뚜벅 걸으면 20분 만에 도착할 수 있는 우리 동네 공공 도서관. 그곳은 내가 이렇게 예상치 못한 무기력 상태에 빠지기 전에도 일주일 혹은 2주일에 한 번씩 읽고 싶은 책을 빌리러 가던 곳이었다. 그 정도 거리의 산책이, 그 정도 숫자의 사람이 그때의 내게 딱이었으니.
일주일 아니 딱 한 달만 날마다 도서관 산책을 나가보자 했다. 갔다 오면 단 몇 줄이라도 그날의 산책 일기도 쓰고.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고요?
새로 시작하는 글을 이렇게나 길게 쓰고 있네요. ㅎㅎ
생각해 보면 나의 무기력은 그렇게까지 중증은 아니었던 것 같다. 목표했던 한 달을 넘어 석 달째 계속되는 도서관 산책으로도 무기력이 많이 사라졌으니.
하지만 여전히 방심할 수 없다. 어쩌다 도서관 휴관을 핑계로 그날의 산책을 쉬면 어둑어둑해지는 저녁 무렵에는 밤처럼 어김없이 그것이 스멀스멀 찾아오니까. 그러다가 다음날 아침이 되면 도서관이고 산책이고 인생이고 미래고 다 귀찮을 만큼 다시 완전히 무기력해지기도 한다.
그렇기에 나는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도서관 산책을 멈출 수 없음. 더 이상 핑계도 대지 않고 게으름도 피우지 않으려고 뒤늦게 제목 쾅쾅 박아 본격적으로 글쓰기도 시작한다. (진작에 썼어야 했는데 많이 늦었다.)
‘산책은 장점이 너무너무 많답니다!’, ‘무기력, 이렇게 극복하세요!’와 같은 글을 쓰려는 건 아니다. 그건 왠지 좀 얄밉다. 그냥 산책길에서, 도서관에서, 책에서, 글쓰기에서 날마다 조그마한 기력들을 줍고 모으며 꽤 괜찮은 하루를 보내려고 애쓴 날들의 소박한 기록…쯤이 되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은 내 힘든 마음이 될 지도. n
오늘처럼
걷고
읽고
쓸 수 있다면
그걸로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