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는 산책 | 두 번째 이야기
무작정 도서관 산책을 나가기로 마음먹은 후에도 나는 열흘 넘게 시작을 미루고 또 미루었다. 무기력한 사람에게 제일 힘든 건 떨치고 일어나는 일. 몸을 일으키기도 힘든 나에게 밖에 나가 산책을 하라니, 그야말로 미션 임파서블 아닌가.
처음 한동안은 꾸역꾸역 외출 준비를 해서 현관까지 나와 신발을 신는 그 순간까지도 ‘그냥 가지 말까? 그래도 가야겠지?’라는 질문을 거짓말 조금 보태어 100번 정도 나에게 던지곤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오케이 고! 하면 다행이었는데, 결국 안 나가기로 하고 슬그머니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오면 더 큰 무기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하루도 결국 이렇게 지내시겠다고? 내 그럴 줄 알았지! 같은 자조 섞인 내 목소리가 귀에 뱅뱅 맴도는 듯하다가 이내 조용해지면, 나는 이미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기 싫은 상태로 되돌아갔다.
산책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하필 나를 비롯한 온 가족이 코로나에 걸려 자가격리를 해야 했다. 나는 입으로는 어쩌지 걱정하면서도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산책을 나가지 않아도 되는 정정당당한 사유가 생겼기에. (물론 그 후로 며칠간 코로나 증상에 시달려 쾌재고 뭐고 죽다 살아났지만 ㅜ)
아무튼 이런 악순환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산책이 필요하고 산책을 위해서는 의지가 필요한데, 그놈의 의지가 다 어디로 간 건지, 믿을 거라곤 의지뿐인데……
그런데 가만! 의지가 과연 믿을 만한 놈이 맞나???
“내일부터 진짜 열심히 할 거야!”를 외치며 의지만 믿고 무언가를 시도했다가 연거푸 실패하고 오히려 더 큰 좌절을 경험한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가. 작심삼일도 열 번만 반복하면 한 달이라고 스스로를 기만하면서 작심삼일을 밥 먹듯이 하다가 진짜로 그 일을 흐지부지 밥 말아먹은 경우도 얼마나 많았냐 말이다.
영 못 믿을 게 의지라면 우리는 대체 무엇을 믿어야 할까.
이때 떠오른 옛날이야기 하나.
옛날 옛적에(ㅎㅎ) 친언니와 함께 새벽마다 수영을 배우러 다닌 적이 있었다. 둘 다 미혼이었고, 친정집 부엌에 달린 조그마한 방을 함께 쓰던 때였다. 보란 듯이 수영 4 종목을 마스터하고야 말겠다는 비장한 결심으로 당시 꽤 높은 강습료를 지불하고 수영 강습을 끊었음에도 우리는 비장함과는 거리가 멀게도 새벽마다 코미디를 연출했다. 어둑어둑한 새벽에 시끄럽게 알람이 울리면 우리 둘은 무표정한 얼굴로 좀비(또 좀비 출연;;)처럼 몸을 일으킨 뒤 눈도 제대로 뜨지 않은 채 아무 말 없이 이불을 개고 주섬주섬 각자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고는 여전히 서로 아무 말도 주고받지 않는 상태로 집을 나서서, 버스를 타고, 수영장에 도착해, 샤워를 하고, 수영복으로 갈아입은 후 풀에 퐁당 빠져 강습을 받기 시작했다. 남이 보면 지난밤에 둘이 머리채라도 잡고 싸운 줄. 아니 애초부터 둘이 전혀 모르는 사이인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수영 강습이 끝날 무렵에 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세상 둘도 없이 다정하고 친한 친자매로 돌변해있었다. 서로의 수영 동작을 봐주며 이러쿵저러쿵 코칭을 해주면서 열정적으로 수영을 끝내고 나서도 뭐가 더 부족한지 출근 직전까지 끝도 없이 모닝 수다를 떨곤 했다.
지금도 가끔 그때 이야기를 하면서 언니와 깔깔거리며 웃는다.
그렇게 몇 달간 꾸준히 수영 강습을 받고 어설프게나마 수영 4 종목을 흉내 낼 수 있게 된 우리. 그게 과연 오로지 수영을 마스터하고야 말겠다는 의지 덕분이었을까? 아니면 비싼 강습료가 아까워서? 물론 그 이유들이 큰 몫을 차지했겠지만 전부는 아니었을 것이다.
거기엔 분명 그때 우리가 알람이 울린 뒤부터 무심하게 행한 일련의 기계적인 행동들, 딱히 질문도 생각도 필요 없는 습관적인 절차들도 한몫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따뜻한 이부자리를 빠져나와 그다지 따뜻하지도 않은 수영장 물에 몸을 담그기까지 두뇌가 끼어들 틈 없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던 그 과정들 말이다. 그 결과 우리는 마치 영화 속 점프컷처럼 ‘정신을 차리고 나니 어느새 차가운 풀 속에 수영복만 입고 팔다리를 허우적거리고 있더라’는 상황을 크게 힘을 들이지 않고도 날마다 연출할 수 있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도 바로 그런 게 아닐까. 어떻게 보면 ‘덜 의식적인’ 루틴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것. 나의 산책 준비도 그렇게 물 흐르듯 자연스러우면 좋으련만.
그래서 나는 요즘 의지를 불태우기보다는 일련의 자연스러운 과정을 하나둘씩 이어 붙이려고 노력한다. 안 그래도 없는 기력을 헛되이 쓰지 않도록 정해진 과정대로 별생각 없이 해나가면 몸이 어느새 집을 나서고 있을 테니까. 아침에 눈을 뜨면 자연스럽게 욕실에 가서 볼일을 보고 손을 씻고 양치질을 하고 물을 한잔 마시듯! 외출 전 아무 생각 없이 거울을 들여다보고 선크림을 바르듯!
암요, 산책에 선크림은 필수죠 필수. 더 이상의 기미는 곤란합니다. n